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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야기 중국
사1
춘추전국시대

모수자천

毛遂自薦

진나라 소양왕 50년(기원전 258)에 진나라가 조나라의 수도 한단을 포위하자 조나라에서는 평원군으로 하여금 초나라에 가 구원을 청하여 합종하라고 하였다. 평원군은 조나라 공자의 한 사람으로 이름은 승(勝)이고 여러 공자 가운데 가장 현명하고 빈객을 좋아하여 그의 문하에는 항상 식객이 수천 명에 이르렀다.

평원군은 식객과 문하 중에서 문무를 다 갖춘 용력 있는 사람 20명과 함께 가기로 약속하였다. 19명은 가려냈으나 나머지 한 사람은 뽑을 만한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모수(毛遂)라는 자가 앞으로 나서며 말하였다.

“들으니 군께서는 초나라와 합종하고자 하여 20명과 함께 가기로 약속하였는데 한 사람이 부족하다 하니 저를 끼워주시기 바랍니다.”

평원군이 말하였다.

“어진 선비가 세상에 있는 것은 비유하건대 송곳이 주머니 속에 있는 것과도 같아서 당장에 그 끝이 드러나 보이는 법인데 지금 선생이 승의 문하에 있은 지가 3년이나 되었으되 좌우의 사람들이 아직 선생을 칭송하는 일이 없었으며 승도 아직 들은 바가 없소. 이것은 선생께서 재능이 없다는 증거요. 선생은 안 되겠습니다.”

“신이 비로소 오늘에야 주머니 속에 있기를 청할 뿐입니다. 만약 신을 일찍부터 주머니 속에 있게 하였다면 아마 끝만이 드러난 것이 아니고 자루까지 드러났을 것입니다.”

평원군이 마침내 모수와 함께 가기로 하니 19명이 서로 마주 보면서 모수를 비웃었으나 겉으로는 나타내지 못하였다.

평원군이 초나라에 이르러 초나라와 합종하기 위하여 그 이해득실을 논하는데 아침부터 시작하여 정오가 되도록 결정을 못하였다. 이에 모수는 칼을 어루만지며 섬돌에 올라가 평원군에게 말하였다.

“합종의 이해는 두 마디의 말로 족할 것인데 지금까지 결정하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초왕이 노하여 꾸짖어 말하였다.

“내 지금 너의 주군과 더불어 말하고 있는데 너는 무엇하는 사람이길래 무례하게 구느냐. 당장 내려가지 못하겠느냐.”

모수는 칼을 어루만지며 앞으로 나아가 말하였다.

“대왕께서 수를 꾸짖는 것은 초나라 사람들이 많다고 생각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그러나 지금 열 걸음 안에 초나라 사람 많은 것을 믿을 수는 없습니다. 왕의 목숨은 수의 손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 주군이 앞에 있는데 꾸짖는 것은 무슨 도리입니까? 지금 초나라의 강함을 잘 이용한다면 천하에 당해낼 나라가 없을 것입니다. 그런데 백기는 하찮은 필부에 불과한데도 그가 초나라와 한 번 싸워서 언(鄢)과 영(郢)을 빼앗고, 두 번 싸워서 이릉을 불사르고, 세 번 싸워 왕의 선조를 욕되게 하였습니다. 이것은 길이 잊지 못할 원한으로서 조나라도 부끄러워하는 일이거늘 왕께서는 이를 원망할 줄 모릅니다. 합종하는 것은 초나라를 위한 것이지 조나라를 위한 것은 아닙니다.”

초왕이 말하였다.

“선생의 말이 맞는 것 같소. 내 삼가 사직을 받들어 합종하겠소이다.”

이로써 종약은 성립하였고, 모수는 초왕의 좌우에게 말하였다.

“닭·개·말의 피를 가져오시오.”

모수가 구리 쟁반에 받쳐들고 꿇어앉아 초왕에게 그 피를 올리면서 말하였다.

“왕께서 마땅히 피를 마시고 종약을 맹세하셔야 하겠습니다. 다음은 우리 주군, 다음은 수가 마시겠습니다.”

마침내 전상(殿上)에서 종약이 결정되었다. 모수가 왼손으로 쟁반의 피를 들고 오른손으로 19명을 불러서 당하에서 피를 마시게 한 후 말하였다.

“당신들은 보잘것없는 사람입니다. 소위 남의 힘에 의지하여 일을 이룩하는 자들입니다.”

평원군은 종약을 정하고 조나라에 돌아와 말하였다.

“승은 다시는 선비의 사람됨을 아는 체하지 않겠습니다.”

그리고 모수를 상객(上客)으로 삼았다.

평원군이 조나라에 돌아오자 초나라에서는 춘신군을 장수로 하여 조나라를 구원하게 하고 위나라의 신릉군도 또한 왕명을 사칭(詐稱)하여 군대를 이끌고 조나라를 구원하기로 하였다.

전국 시대 무사 인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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춘신군은 전국 사군의 한 사람이다. 다른 삼군이 모두 왕족인데 반하여 춘신군만이 홀로 왕족이 아니었다. 춘신군의 성은 황(黃), 이름은 헐(歇)인데 초나라 태자가 진나라에 인질로 갈 때 그 수행원으로 따라간 사람이었다. 함께 진나라에 억류되어 있다가 계략을 써서 태자를 탈출시켰고, 태자를 탈출시킨 후 당연히 죽임을 당할 각오를 하고 있었다.

진나라의 응후(應侯)가 주군을 위해 몸을 바치려는 충신이니 죽여서는 안 된다고 소왕에게 진언하여 목숨을 보전하였다. 그때의 태자가 즉위하여 고열왕(考烈王)이 되자 황헐을 불러 강동 땅에 봉하고 춘신군이라 불렀다. 식객이 3천 명이나 되었으며 담력도 있고 문화를 사랑할 줄 아는 인물이었다. 그 후 계속 등용되어 이때에 이르러 초나라의 장수로서 조나라를 구원하게 되었으며 그 후 복잡한 정치적 사정에 얽혀 이원(李園)에게 모살(謀殺)되었다.

위나라의 신릉군은 위나라 소왕의 막내아들로 안리왕(安釐王)의 이모제(異母弟)이다. 소왕이 죽자 안리왕이 즉위하고 공자 무기를 신릉군으로 봉하였다.

공자 무기는 사람됨이 어질어 선비 앞에 자신을 낮추어 예를 지켜 사귀니 사방에서 선비들이 모여들어 식객이 3천 명이나 되었다. 신릉군의 맏누이는 조나라 평원군의 부인이었다. 진나라 군사가 한단을 포위하자 평원군은 자주 위왕과 신릉군에게 편지를 보내어 구원을 요청했다. 위왕은 장군 진비(晋鄙)로 하여금 10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조나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진왕은 위왕에게 사자를 보내어 위협하였다.

“내가 조나라를 쳐서 항복받는 것은 시간 문제다. 제후 가운데 감히 조나라를 구원하는 자가 있으면 반드시 군대를 옮겨 먼저 그를 공격할 것이다.”

위왕은 두려워한 나머지 사람을 시켜 진비의 진격을 중지시키고 군대를 업(鄴)에 주둔시켜 지키게 하였다. 그러면서 겉으로 조나라를 구원하는 척하며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장간삼과극

창에 세 네 개의 쌍날 가지가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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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나라 평원군의 사자는 줄을 이어 위나라에 달려와 신릉군을 책망하였다.

“평원군이 스스로 공자의 누이와 혼인한 것은 공자의 높은 의리가 남의 곤경을 급하게 여길 줄 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제 한단이 조석지간에 진나라에 항복하게 되었는데 위나라가 구원하러 오지 않으니 공자의 누이가 가엾지도 않습니까?”

신릉군은 자주 위왕에게 청하고 빈객·변사를 시켜 온갖 방법으로 위왕을 설득하려 했으나 위왕은 끝내 신릉군의 요청을 거절하였다. 이에 신릉군은 빈객과 의논하여 병거(兵車) 백여 승을 준비하고 빈객을 거느리고 진군에게 달려가 조나라와 함께 죽기로 작정하였다.

가는 길에 그의 상객(上客) 후생(侯生)을 만나보고 진군과 싸우다 죽고자 한다는 까닭을 말하였다.

“지금 공자께서 아무런 다른 계책 없이 진나라 군대에 달려들고자 하시니 이것은 마치 고깃덩이를 굶주린 범에게 던져주는 것과 같아서 아무런 공도 없을 것입니다.”

공자가 두 번 절하고 이어 계책을 물으니 후생이 드디어 사람들을 물리치고 작은 목소리로 말하였다.

“생이 들으니 진비의 병부가 항상 왕의 침실 안에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여희(女姬)가 가장 총애를 받아 왕의 침실에 출입한다 하오니 여희의 힘이라면 능히 그것을 훔쳐낼 수 있을 것입니다. 또 공자께서는 일찍이 여희의 아버지 원수를 갚아준 일이 있사오니 그는 공자를 위한 일이라면 죽음도 사양하지 않으려고 할 것입니다. 공자께서 한 번 입을 열어 부탁한다면 능히 호부(虎符)를 얻어 진비의 군대를 교탈(矯奪)각주1) 하여 북으로 조나라를 구제하고 서쪽으로 진나라를 물리친다면 이것이야말로 오패(五覇)의 공입니다.”

공자가 그 계책에 따라 여희에게 요청하니 여희는 과연 진비의 병부를 훔쳐서 공자에게 주었다. 공자가 떠나려 하자 후생이 말하였다.

“장수가 밖에 있어서는 임금의 명령도 듣지 않는 수가 있습니다. 공자께서 만일 병부를 맞추어 보이더라도 진비가 공자에게 군사를 내주지 않고 다시 국왕에게 사자를 보내게 되면 일은 위태하게 될 것입니다. 신의 객 주해(朱亥)는 역사(力士)입니다. 데리고 가셨다가 진비가 듣지 않거든 주해를 시켜 격살(擊殺)하십시오.”

공자가 업에 이르러 병부를 보이니 진비는 병부를 맞추어 보고 나서도 의심하고 손을 흔들어 공자를 보면서 말하였다.

“지금 내가 10만의 많은 무리를 거느리고 국경에 주둔하고 있으니 국가의 중대한 임무입니다. 지금 공자께서 한 채의 수레에 타고 와서 교대하려 하니 어찌된 일입니까?”

진비는 공자를 의심하는 눈치였다. 기회를 노리고 있던 주해가 소매 속에 숨겼던 40근 철퇴를 잽싸게 꺼내어 진비를 단번에 쳐서 죽였다.

공자는 드디어 진비의 군대를 거느리고 군사들을 점검하였다. 그리고 군중에 명령을 내려 말하였다.

“부자가 함께 군중에 있는 자는 아버지가 집으로 돌아가고 형제가 함께 군중에 있는 자는 형이 돌아가라. 독자로 형제가 없는 자는 돌아가 부모를 봉양하여라.”

그리하여 정선한 군인 8만 명을 이끌고 전진하여 진군을 공격하니 진군은 한단의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위왕은 공자가 병부를 훔쳐서 속이고 진비를 죽인 데 대하여 크게 노하였다. 공자도 또한 스스로 그 죄를 알고 진나라를 물리치고 조나라를 보존하게 한 다음에 장수로 하여금 그 군대를 인솔하여 위나라에 돌아가게 하였다. 그리고 공자는 홀로 식객과 함께 조나라에 머물러 있었다.

공자는 그 나라에 10년 동안 머물렀다. 진나라는 공자가 조나라에 있다는 말을 듣고 군대를 동원하여 위나라를 공격하였다. 위왕은 이를 근심하여 사자를 보내어 공자를 돌아오라고 하였으나 공자는 앞서 진비의 군대를 교탈한 일로 자기에게 노할 것이 두려워 가지 않으려 하였으나, 모공(毛公)과 설공(薛公)의 간언을 듣고 애국심에 불타 급히 수레를 몰아 위나라에 돌아왔다.

위왕은 공자를 보자 서로 붙잡고 울었다. 그리고 상장군의 인을 공자에게 주며 위기에 처한 위나라를 구출하라고 하였다. 이에 공자는 사자를 제후들에게 보내어 이 사실을 알리니 제후들은 공자가 장군이 되었다는 말을 듣고 모두 그들 장수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가서 위나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공자는 다섯 나라 군대를 이끌고 하외(河外)에서 진나라의 군대를 격퇴시켰다. 드디어 승세를 몰아 진군을 추격하여 함곡관에 이르러 진군을 눌러 막으니 진나라 군대는 감히 함곡관 밖으로 나오지 못하였다.

진왕은 공자가 위나라의 장수로 있는 한 진나라로선 승산이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황금 1만 근을 위나라에 뿌려 공자가 왕위를 노리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리게 하였다. 위왕은 뜬소문을 믿고 드디어 공자 대신 다른 사람으로 장수를 삼으니 공자는 우울한 심정을 술로 달래다 마침내 술중독으로 죽고 같은 해에 위왕도 죽었다.

진나라는 공자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위나라를 공격하여 야금야금 위나라를 먹어들어가 18년 만에 위왕을 포로로 하고 위나라를 멸망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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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영 집필자 소개

서울에서 태어나 한문사숙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충남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저서로 《이야기 일본사》, 《이야기 중국사》가 있다.

출처

이야기 중국사1
이야기 중국사1 | 저자김희영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중국 고대부터 전한 시대까지의 역사를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함께 이야기 식으로 풀어 썼다. 엄청난 인구와 광대한 국토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이야말로 진정한 중국의 힘이며,..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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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모수자천이야기 중국사1, 김희영,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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