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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야기 중국
사1
춘추전국시대

진초의 패권 다툼

제의 환공 다음에 패자가 된 것은 진(晋)의 문공이다. 진은 제나라처럼 천연자원이 풍부한 나라도 아니었는데 어떻게 천하의 패자가 되었을까? 그것은 한마디로 말해 전쟁에 의해서라고 할 수 있다.

진의 패업은 문공의 아버지 헌공(獻公) 때부터 시작되었다. 헌공은 개성이 강한 인물이었다. 즉위 5년에 여융(驪戎)을 멸망시키고 이어 군비를 증강하여 곽(霍)·경(耿)·위(衛)·우(虞)·괵(虢) 등 여러 나라를 병탄하였다.

헌공 12년(기원전 665) 그가 가장 사랑하는 여인 여희(驪姬)에게서 공자 해제(奚齊)가 태어났다. 이 여희는 여융을 토벌할 때 얻은 여자로 용모가 아름다웠을 뿐만 아니라 매우 총명하였다. 헌공은 여희를 극진히 사랑했고 여희는 헌공의 마음을 사로잡고 있었다.

당시 진나라는 이미 태자가 정해져 있었다. 태자는 유능한 신생(申生)이었고 신생의 어머니는 제의 환공의 딸 제강(齊姜)이었는데 이미 고인이 되어 있었으며 신생의 누이는 진(秦)의 목공에게 출가하였다. 그러니까 신생의 모계는 당시 천하의 패자로 군림하고 있는 제나라였고 누이동생은 신흥 국가인 진나라이었으니 진나라로선 신생의 태자 책봉이 아주 이상적이었다고 할 수 있었다.

일찍이 헌공에게는 8명의 공자가 있었는데 그중에서 현명하기로 이름난 사람이 셋이었다. 그 한 사람이 태자로 정해진 신생이고, 나머지 두 사람은중이(重耳)와 이오(夷吾)였다. 이 두 사람은 한 어머니 소생이었다.

이윽고 여융의 미녀 여희가 궁중에 들어오게 되자 헌공은 여희를 총애하였고 세 사람의 공자를 멀리하기 시작하였다. 총애하는 여희가 아들 해제를 낳자 헌공의 마음은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장차 이 나라를 해제에게 물려주고 싶은 생각이 마음 한구석에서 움트기 시작한 것이다. 이를 눈치 챈 여희는 욕심이 동하기 시작했다. 베개밑 공사를 벌여 자기 아들의 장래 문제를 보장받으려 안간힘을 썼고, 여희의 끈질긴 작전에 말려든 헌공은 마침내 태자 신생을 곡옥(曲沃)에, 중이를 포(蒲)에, 이오를 굴(屈)로 부임시켰다.

춘추 호

청동 호로는 현재까지 발견된 것 가운데 가장 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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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가 위와 곽을 멸망시킨 다음해(기원전 660) 헌공은 태자 신생을 장군으로 임명하였다. 헌공은 증강된 군대를 상군과 하군으로 나누어 상군은 헌공 자신이 거느리고, 하군은 신생에게 지휘권을 맡겼다. 이때 대부 사위(士蔿)가 신생에게 망명할 것을 권유하였다.

“나라의 주인이 되시렵니까? 죄인이 되시렵니까? 갈 길은 이 두 길밖에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위가 어떤 인물인지 알아둘 필요가 있다.

사위는 헌공에게 공자들을 없애야 한다고 진언한 사람으로 권력의 근본 구조를 환히 들여다보는 사람이었다. 그가 보기엔 신생이 헌공의 후계자가 될 가능성은 아주 희박했고, 그렇다면 차라리 망명하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했던 것이다.

“오나라의 태백(太白)이 되는 것도 과히 나쁘지는 않습니다. 좋은 이름을 후세에 전할 수도 있으니까요.”

사위는 이렇게 조언하였다.

옛날 주나라의 고공단보의 장자 태백이 그의 막내동생에게 태자의 자리를 양보하고 도망쳤다.

군주가 되는 것만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니 태백처럼 후세 사람으로부터 그 이름을 추앙받는 사람이 되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말이다. 그러나 신생은 이 말을 듣지 않았다.

장자

장자는 여희가 궁에 들어오기 전엔 궁에 들어가는 것이 무서워서 울었다가 궁의 화려한 생활을 하고는 오기 전에 운 것을 후회했다는 이야기를 가지고,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죽음 후의 생활을 겪어 보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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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여희는 매우 영리한 여자였다. “내 아들을 태자로 삼아 주십시오.”라고 노골적으로 말한 일은 한 번도 없었다. 어쩌다가 헌공의 입에서 “신생을 폐하고 해제를 태자로 삼아야 하겠다.”는 말이 튀어나오면, 그녀는 울면서 “아니 되옵니다. 그것은 아니 될 말씀입니다. 차라리 저를 죽여 주십시오.” 하고 거절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태자 신생이 진의 후계자가 되리라는 사실은 천하 제후들이 모두 알고 있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장군으로서의 전공도 눈부시어 백성들이 모두 흠모하고 있습니다.”라고 신생을 극구 칭찬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여희의 태도에 헌공은 그저 감탄할 따름이었다. 참으로 무서운 여자였다. 그러면서 여희는 착착 음모를 진행시키고 있었다.

헌공 21년(기원전 656)의 일이다. 어느 날 여희는 신생을 찾아가 “주군께서 제강의 꿈을 꾸시었다 하옵니다. 하루속히 제강의 사당에 제사를 지내시고 그 제사 음식을 주군에게 드리십시오.”라고 말하였다. 제강은 죽은 신생의 어머니 이름이다.

당시 죽은 사람이 꿈에 보이면 그 죽은 사람의 아들이 제사를 지내고 그 제사 음식을 꿈꾼 사람에게 보내는 풍습이 있었다. 제강의 사당은 곡옥에 있었다. 신생은 서둘러 어머니에게 제사를 지내고 그 음식을 아버지 헌공에게 바쳤다.

여희는 사전에 계획한 대로 끔찍한 일을 저질렀다. 극비리에 술과 고기에 독약을 넣었던 것이다. 사냥에서 돌아온 헌공이 그 음식을 먹으려 하자 여희는 헌공 곁에 다가앉으며 “이 음식은 먼 곳에서 온 음식이오니 한번 시험한 후 잡수시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하고 술병을 열어 땅에 부으니 땅이 부글부글 끓어올랐고, 고기를 개에게 던져주니 개가 그 자리에서 즉사하였다. 또한 내시에게 먹여보니 내시 또한 죽어버렸다.

여희는 각본대로 울며불며 태자의 잔인함을 한탄하고 “태자가 늙으신 아버지까지 죽이려 하였으니 우리 모자의 생명은 없는 것과 같사옵니다. 다른 나라로 망명을 시켜주시든지 아니면 차라리 자살하라는 명을 내려주시옵소서.” 하고 통곡하는 것이었다.

헌공의 노여움은 대단했다. 만약 신생이 그 자리에 있었다면 단칼에 목을 베고도 남았을 것이다.

이 소문을 들은 신생은 급히 신성으로 도망쳤다. 헌공은 홧김에 신생의 스승 두원관을 죽여버렸다.

태자의 측근들이 “이번 일은 여희의 소행임이 분명하니 진상을 밝히고 누명을 벗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권하였다.

“아버지께선 이미 늙으시어 여희 없이는 하루도 사실 수가 없다. 만약 진상을 밝히어 여희를 쫓아버리게 된다면 아버지께서는 어떻게 지내실 수가 있겠는가.”라고 대답하였다.

측근들이 망명할 것을 권하였으나 신생은 이를 거절하였다.

“이런 누명을 쓰고 망명하려 한들 누가 나를 받아주겠는가?”

신생은 자살의 길을 택하고 말았다.

여희는 태자 신생이 죽은 것만으로는 안심할 수가 없었다. 해제는 아직 나이가 어리고 중이와 이오 등 유능한 공자가 남아 있기 때문이었다. 여희는 중이와 이오를 그대로 둘 수가 없었다.

“신생의 독약 사건은 중이와 이오도 알고 있었다 하옵니다.”

여희는 헌공에게 이같이 말하여 중이와 이오를 참소하였다.

여희의 이 같은 음모를 눈치챈 중이와 이오는 인사도 없이 각기 자기의 거성(居城)으로 돌아가버렸다. 거성으로 돌아간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 궁중으로 들어갔다간 그곳에서 빠져나올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인사도 없이 떠났다는 말을 전해 들은 헌공은 “이놈들, 신생과 짜고 나를 죽이려 한 것이 사실이로군!” 하며 두 아들을 가만두지 않겠다고 노여움을 나타냈다.

결국 헌공은 중이와 이오의 거성에 군대를 파견하여 그들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다. 위기일발의 찰나였다.

이 긴급한 위기에 처하여 세 공자는 각기 다른 태도를 취하였다. 태자 신생은 한마디 변명도 망명도 하지 않고 미련 없이 자결의 길을 택하였고, 이오는 거성인 굴로 돌아가 방비를 튼튼히 하여 파견군과 철저히 항전하였고, 중이는 도망쳐버렸다.

중이의 거성에 파견된 발제(勃鞮)는 중이에게 자결할 것을 권했다. 자결하지 않을 경우는 죽여버리라는 명령을 헌공으로부터 받았던 것이다. “나는 싫소.” 하고 중이가 도망치려 하자 발제는 칼을 빼어들고 중이를 쫓았다. 중이가 쫓기어 담을 넘을 때 발제는 잽싸게 중이를 노려 칼로 베었다. 칼은 아슬아슬하게 빗나가 중이의 소맷자락을 베었을 뿐이었다.

중이는 그 길로 어머니의 고국인 적(狄) 땅으로 망명하였다. 그때 중이의 나이는 43세였으며 이로부터 긴 망명 생활이 계속되었다.

진의 헌공은 중이가 적으로 망명한 지 5년 후에 죽었다. 제의 환공이 소집한 규구의 회맹 때 늦게 출발했다가 도중에서 주나라 사자를 만나 그의 권유에 따라 회맹에 참가하지 않고 되돌아간 것이 그가 죽기 직전의 일이었다.

제나라의 사왕묘

제나라 위왕, 선왕, 민왕, 양왕의 무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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헌공의 죽음은 진나라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유능한 태자 신생을 죽이고 다른 공자들까지 죽이려 했던 여희는 백성들로부터 증오를 받았다. 그녀에게는 헌공의 존재만이 그의 힘이었는지라 헌공이 죽은 후의 그녀에게는 아무런 영향력도 없었다. 자신이 낳은 아들을 꼭 후계자로 삼아야겠다는 지나친 욕심 때문에 태자를 죽인 일 등은 바로 한 치 앞도 내다볼 줄 모르는 지나친 자기 과신의 소행이라 볼 때 그녀가 과연 총명한 여자였는지 의문을 갖게 한다.

헌공이 죽은 것은 규구의 회맹이 있던 해(기원전 651) 9월이다. 헌공이 죽자 그 해 10월에 대신 비정(邳鄭)과 이극(里克)이 반란을 일으켜 여희의 아들 해제를 죽였다. 여희파의 대신 순식(荀息)은 여희의 동생이 낳은 도자(悼子)를 후계자로 옹립하였으나 11월에 이극이 다시 도자를 죽이고 대신 순식마저 순사(殉死)시키고 말았다.

이극 등은 적 땅에 가 있는 중이에게 사자를 보내어 귀국해서 즉위할 것을 요청하였다. 중이는 자신이 아버지의 명령을 어기고 도망친 사실과 아버지의 장례에도 불참한 몸으로서 아버지의 후계자가 될 수 없다고 굳이 사양하였다. 대신들은 하는 수 없이 이오를 맞이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오는 자기 거성인 굴성(屈城)에서 아버지 헌공이 파견한 군대와 끝까지 항전했으나 두 번에 걸친 공격에 견디지 못하고 양(梁)으로 망명하였다. 처음에 이오도 중이와 마찬가지로 어머니의 고국인 적으로 망명하려 하였으나 그의 대부 기예가 반대하고 나섰다.

“그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지금 적에는 형님인 중이 공자가 망명하고 있사온데 만약 형제가 똑같이 그곳으로 망명한다면 진나라에서는 반드시 대군을 일으켜 적을 공격하게 될 것입니다.”

이오는 이 말을 옳게 생각하고 양으로 망명하게 되었던 것이다. 진으로부터 귀국 요청을 받은 이오는 신중한 행동을 취했다. 중이와 같이 굳이 사양하지는 않았으나 신변의 안전에 만전을 기할 계책을 세웠다. 이오 자신이 거느린 병력이 거의 없었으므로 이오는 진(秦)에 사자를 보내어 자신이 귀국에 성공하여 즉위할 경우 하서(황하 이북의 땅)의 땅을 떼어 주겠노라고 제의했다. 진의 목공은 이 말을 받아들여 이오의 귀국을 원조해 주기로 하였다. 제의 환공도 패자로서 제후의 군대를 거느려 이오의 귀국에 협력하였다.

여기서 우리는 이오의 귀국에 협력한 두 사람의 입장이 다르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제의 환공은 천하의 질서 유지라는 패자로서의 권위를 지키기 위함이었고, 진의 목공은 우선 하서의 땅을 손에 넣기 위해 출병하였던 것이다. 이로써 이오는 귀국에 필요한 병력은 충분히 확보한 셈이다. 다음은 고국에 돌아가서의 문제이다. 이오는 이극에게 편지를 보내어 자신이 후계자의 자리에 오르는 데 어려움이 없도록 도와준다면 분양(汾陽)의 땅을 주어 그곳 영주로 삼겠다는 약속을 하였다.

회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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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오는 이와 같이 철석같은 준비를 끝내고 귀국하여 즉위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 사람이 진의 혜공(惠公)이다.

혜공은 즉위하자 먼저 한 약속을 일방적으로 깨버렸다. 진나라에 주겠다던 하서의 땅을 주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영주로 삼겠다던 이극을 처형하였다. 그 이유는 해제와 도자(悼子) 두 임금을 죽이고 한 사람의 대신을 죽였다는 것이었다.

혜공 4년(기원전 647) 진나라에는 흉년이 들어 백성들이 굶주리게 되었다. 규구의 회맹 제5조에 의하면 제후들은 이웃나라에 재황(災荒)이 있을 때 양곡을 융통하도록 되어 있다. 그러나 앞서 혜공이 진(秦)에 하서의 땅을 주겠다는 약속을 어긴 일이 있었기 때문에 진(秦)의 대신들은 이런 기회에 혜공을 토멸하자고 건의하였다. 그러나 진의 목공은 “혜공은 나쁘지만 그 백성들에게야 무슨 죄가 있겠느냐.” 하고 식량을 많이 보내주었다.

다음해에는 또 진(秦)나라에 흉년이 들었다. 진(晋)에서는 당연히 구호양곡을 보내주는 것이 도리였으나 진나라로부터 정식 구원 요청이 있자 혜공은 이 기회를 이용하여 진(秦)을 공격하기로 결정하였다. 배은망덕도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진의 목공은 크게 노하여 대군을 일으켜 진나라 영내 깊숙이 침공하여 혜공을 포로로 잡았다. 자업자득이란 혜공을 두고 하는 말인지도 모른다.

진나라의 석경

악기의 일종으로 돌로 만들어진 것은 제후가 사용했던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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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에서는 원한 맺힌 혜공을 당장 죽여서 상제에게 제사지내는 희생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혜공은 바로 진 목공의 처남이었다. 목공의 부인이 상복으로 갈아입고 동생을 살려달라고 애원하는 바람에 혜공은 겨우 죽음을 면하였다. 태자 어(圉)를 인질로 진나라에 보내고 혜공은 귀국하였다.

혜공은 진나라에서의 자신의 지위가 불안한 것은 형인 중이가 외국에 살아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였다. 언제 천하의 패자인 환공이 중이를 진의 영주로 옹립하고 자신을 내쫓을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떨고 있었다. 혜공은 비밀리에 자객을 보내어 형을 암살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를 알아차린 중이는 12년간 망명해 있던 적 땅을 떠나 제나라로 갔다. 그때 그의 나이 55세였는데, 이때가 관중이 죽은 후였기 때문에 혹시 제나라에서 인재를 구하지나 않을까 하는 기대를 가지고 제나라에 간 것이다.

제나라로 가는 도중 위(衛)를 지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이들 일행은 많은 냉대를 받아야 했다. 오록이라는 곳에서는 주민이 흙덩이를 넣어 식사를 제공하는 등 많은 괄시를 받은 바 있었다. 유랑 생활이란 결코 즐거움이 아니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낀 중이였다.

제나라에서는 중이를 우대하였다. 환공 자신도 일찍이 망명 생활을 경험하였기 때문에 공녀(公女)를 중이의 아내로 삼게 하는 등 극진히 후대하였다. 그는 제나라에 머무르는 5년 동안 다섯 공자의 피비린내 나는 권력 투쟁을 지켜보면서 자신의 처지에 대해서도 많은 것을 생각했다.

중이는 처음부터 패자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진의 군주가 되어 보겠다는 생각 따위도 전혀 없었다. 그저 인생을 편안히 지내는 것이 제일이지 하고 제나라에서의 생활을 만족해하고 있었다. 그의 부인과 가신들은 안타까웠다. 그의 부인은 중이를 격려하였다.

“당신은 일국의 공자로서 이곳에서 궁핍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당신을 따르는 가신들은 당신을 위해 목숨을 바치려 하고 있습니다. 하루빨리 귀국하시어 가신들의 노고에 보답하고 이 부끄러운 생활을 씻어야 합니다. 해서 안 될 일은 없습니다.”

중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는 이대로가 제일 좋소. 제발 성가시게 굴지 마시오.”

중이는 도대체 분기(奮起)할 생각이 없었다. 공녀는 가신 조쇠(趙衰)와 상의하여 어떻게 하든 제나라를 떠나 진나라로 귀국할 한 가지 비상 수단을 생각해냈다. 그들은 중이에게 술을 고주망태가 되도록 먹여 수레에 싣고 무조건 제나라를 떠났다. 중이가 의식을 회복할 무렵, 수레는 이미 제나라 국경을 벗어난 후였다. 아직도 술이 덜 깬 채 중이는 크게 노하여 창을 쥐고 고범(咎犯)을 죽이려 하였다. 고범은 적(狄) 사람으로 중이의 외삼촌이었다. 중이의 이 같은 행동을 본 고범은 “내가 죽어서라도 네가 성공만 한다면 나는 그것으로 만족하겠다.”

“만약 성공하지 못한다면 내가 아저씨의 살을 씹어 주겠소.”

“성공하지 못한다면 내 살은 이미 썩어 씹을 수가 없겠지.”

둘은 이런 말을 주고받으며 서로 결의를 다졌다.

중이 일행은 조(曹)나라로 들어섰다. 조의 공공(共公)은 무례하고 괴팍한 인물이었다.

“중이는 변협(騈脅)이라는 소문이 있던데 과연 그런지 한번 보고 싶구나.”

변협이란 갈빗대가 하나로 되어 있는 좀처럼 보기 드문 체격을 말한다. 공공은 무례하게도 중이의 그런 체격을 좀 보고 싶다고 실언하였다.

그러나 조나라 대부 이부기(釐負羈)는 중이 일행을 정중히 맞아들여 식사를 대접하고 식기에는 보석을 넣어 보냈다. 중이는 음식만을 받고 보석은 되돌려보냈다. 중이 일행은 그곳에서 송나라로 들어섰다.

때마침 송나라 양공은 홍수의 대전에서 크게 패하여 부상을 입고 매우 어려운 형편에 놓여 있었으면서도 이들 일행을 따뜻하게 맞아주었다.

중이 일행의 이번 여행은 옛날처럼 단순한 유랑이 아니었다. 만시지탄이 있기는 하지만 중이도 이제는 진나라에 복귀하겠다는 결의를 다진 뜻있는 여행이었다. 연못에 깊이 잠겼던 용이 하늘로 오르려는 거보(巨步)를 내딛는 여행이었다.

송의 국방상 사마고(司馬固)는 전부터 고범과 친한 사이였다. 천하의 패자가 되려다가 일보 직전에 ‘송양(宋襄)의 인(仁)’으로 인하여 패자의 자리에서 물러서게 된 송나라로선 이들 일행을 도울 만한 힘이 없음을 말하고 다른 나라로 가서 힘을 빌리도록 하라고 조언하였다.

중이 일행은 정(鄭)나라로 갔다. 정나라는 진나라와 같은 성의 나라였기 때문에 많은 기대를 가졌으나 역시 허사였다. 정의 원로대신 숙첨(叔瞻)은 이들 일행을 예우(禮遇)해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나 정 문공은 “우리나라를 지나는 망명공자(亡命公子)가 한두 사람이 아닐진대 어떻게 일일이 그들을 예우한단 말씀이오.” 하고 묵살해버렸다.

“그렇다면 차라리 이들 일행을 죽여 없애 버리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이들은 사람됨이 녹록지 아니하니 만약 그대로 두었다간 앞으로 우리나라의 화근이 될지도 모르는 일입니다.”라고 숙첨이 간했으나 정 문공은 “망명공자 주제에 무슨 큰 일을 할라고.” 하고 냉소해버렸다.

정나라를 떠난 이들 일행은 초나라로 갔다. 이들은 초나라에서 처음 예우를 받았다.

초의 성왕은 이들을 제후의 예로 대접하였다. 중이는 이 같은 후대를 사양하려 하였으나 조쇠가 만류하였다. 들어오는 복을 구태여 차버릴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때 중이와 초의 성왕이 회담한 내용은 중국 역사상 멋있는 한 장면으로 기록되고 있다.

“당신이 만약 귀국하게 된다면 무엇으로써 과인에게 보답하겠소.” 하고 초의 성왕이 복귀 후원에 대한 보수를 물었다. 이 말에는 일찍이 진의 혜공(이오)이 진(秦)의 목공에게 하서의 땅을 주기로 약속했다가 헌신짝처럼 약속을 저버렸다는 비난의 화살도 담겨 있다.

중이는 잠시 생각하다가 “주군께서는 어떤 보물도 다 가지고 계십니다. 무엇을 드렸으면 좋을지 선뜻 생각이 나지 않습니다.”

“그렇지만 무슨 보답이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하고 초왕은 다시 물었다. 이 말의 뜻에는 보물 이외에 땅이 있지 않느냐의 뜻이 포함되어 있다. 중이는 약간 당황하는 표정을 지으면서 대답하였다.

“좋습니다. 앞으로 평원광택(平原廣澤)에서 주군의 군사와 마주 쳤을 때 3사(舍)를 후퇴하겠습니다.”

사(舍)란 당시 군사의 하루 행군 거리로 12킬로미터 해당한다. 그러니까 36킬로미터 후퇴하겠다는 뜻이다. 이 말을 들은 초나라 장군 자옥(子玉)은 노했다.

“들개처럼 여기저기 유랑하는 망명 공자 주제에 저따위 불손한 말을 입에 담으니 차라리 죽여 없애는 것이 좋겠습니다.”

그러나 성왕은 허락하지 않았다.

“진의 공자는 어진 사람이다. 외국에 유랑하면서 많은 고초를 겪었고 그를 따르는 사람들은 모두가 비범한 인물이니 이는 하늘이 그를 도움이다. 그를 죽이는 건 천명을 어김이니 그 죄를 어떻게 감당하겠소.”

성왕은 중이를 높이 평가하고 흠모하였다.

중이 일행이 수개월간 초나라에 머무르는 동안 진나라의 정세도 크게 변하고 있었다.

인질로 진나라에 가 있던 태자 어(圉)가 탈출하여 본국에 돌아온 것이다. 그는 아버지 혜공의 병세가 위독하다는 소식을 듣고 귀국했다. 혜공에게는 태자 말고도 몇 사람의 공자가 있었다. 혜공이 죽을 경우 자신이 태자로 있기는 하지만 진나라에 인질로 가 있기 때문에 대부들이 다른 공자를 후계자로 옹립할지도 모르는 형편이었다. 태자는 아무래도 혜공이 죽기 전에 귀국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생각해서 서둘러 탈출한 것이다.

인질의 탈출 사건에 대해 진나라에서는 크게 불만을 표시했다. 가뜩이나 지난날 흉년이 들었을 때 자기 나라에서는 식량을 원조했는데도 자기 나라가 흉년이 들었을 때 군사를 일으켜 침공했던 일들이 생생히 떠올라 가만히 있지 않을 태세였다.

진의 혜공은 그의 즉위 14년(기원전 637) 9월에 죽고 귀국해 있던 태자 어가 즉위하였다. 이 사람이 회공(懷公)이다. 그는 자신이 인질의 몸으로 탈출하였기 때문에 언젠가 진이 공격해오리라는 것을 예상하고 있었다.

만약 진이 공격할 경우 중이를 옹립하리라는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회공은 중이가 복귀할 때 국내에서 내응자가 없도록 하기 위해 중이와 관련 있는 인물들을 철저히 조사하는 등 공포 정치를 실시하였다. 그로 인해 그의 인기는 나날이 떨어지고 있었다.

중이와 관련된 인사들은 모두 제거했으나 그렇다고 진나라 백성들이 모두 회공을 지지한 것은 아니었다. 이 같은 사실은 중이가 복귀하기 직전에 판명되었다.

초나라의 성왕은 중이를 진(秦)나라로 보냈다. 그 이유는 초와 진(晋)은 국경이 접하고 있지 않았고 진(秦)과 진(晋)은 국경을 접해 있기 때문에 복귀에 아주 편리하였던 것이다. 진(秦)에서는 중이를 빈객(賓客)으로 대우하였다.

중이가 진(秦)에 갔다는 소문을 듣자 진(晋)의 대신 가운데는 벌써 사람을 보내서 하루속히 복귀를 권하는 사람마저 있었다.

진(秦)의 목공은 어진 임금이었다. 눈앞의 일뿐만 아니라 멀리 내다볼 줄 아는 인물이었다.

목공은 중이에게 군사를 주어 진(晋)나라로 복귀하는 일을 후원하였다.

망명 생활 19년의 긴 유랑 생활에 종지부를 찍고 복귀에 성공하여 즉위한 것은 중이가 62세 때의 일이었고 문공(文公)이라 불리었다. 혜공·회공의 시대가 지나고 문공의 새로운 정권이 출범하게 된 것이다. 혜공과 회공 2대에 걸쳐 정권을 쥐고 흔들었던 대신 여성(呂省)과 극예(郤芮) 등은 새로운 정권에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켰다. 문공은 진(秦)에 구원병을 요청하였고, 진에서는 3천 명의 군사를 보내어 반란 진압을 후원해주었다. 나중에 패자로서 그 명성을 떨쳤던 진 문공도 복귀 초에는 하는 수 없이 진의 목공의 힘을 빌렸던 것이다.

진의 문공이 복귀한 해 주왕실에서는 내분이 일어나 진나라에 구원을 요청해왔다. 주의 양왕이 그의 동생 대(帶)의 반란으로 정(鄭)나라로 도망가 같은 성의 나라인 진의 문공에게 구원을 요청한 것이다. 구원해주고 싶은 마음은 태산 같으나 정권이 바뀐 직후인지라 국내 정세가 아직 평온치 못하여 주저하고 있는 사이에 그 해를 넘겼다.

조씨고아

《사기》 〈조세가〉에 실린 유명한 조씨고아란 고대 설화. 진나라 때 모함으로 멸문당한 조씨의 복수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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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해가 되자 진(秦)나라가 선수쳐 주왕실을 돕기 위해 황하 부근에 군사를 집결시키고 있었다. 이 소식을 전해 들은 조쇠가 다음과 같이 진언하였다.

“다소 무리가 가더라도 주의 양왕을 도와야 합니다. 이번 기회야말로 천하의 패자가 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입니다. 같은 성의 대국으로서 왕실을 돕는 일을 다른 성의 진나라에 우선권을 넘겨주어서는 안 됩니다. 주군께서 천하의 패자가 되는 것은 노신의 평생 소원이옵니다.”

문공은 조쇠의 말을 받아들여 즉시 군사를 동원하여 반란을 일으켜 형 양왕을 몰아낸 대(帶)의 거성인 온(溫)을 포위하였다. 대의 병력은 진의 대군을 대항할 힘이 없었다. 대는 처형되고 양왕은 다시 왕위를 회복하였다. 주왕실에서는 이 반란을 진압한 공로로 하내(河內)와 양번(陽樊) 두 고을의 땅을 진나라에 주었다.

진의 문공 4년 초나라가 송나라를 공격하자 송나라에서는 진나라에 구원을 요청해왔다. 진나라에서는 이를 거절할 수가 없었다. 일찍이 문공이 송나라로 망명했을 때 당시 송나라는 이른바 ‘송양의 인’으로 인하여 초나라에 패전한 직후였는데도 문공을 따뜻이 대해준 일이 있었다. 거절하는 것은 배신 행위였다. 문공의 외삼촌 고범이 진언하였다.

“초나라는 조(曹)나라를 집어삼키고 위(衛)나라와는 혼인관계를 맺고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조나라와 위나라를 공격하면 초나라는 반드시 이 두 나라를 구원하기 위해 송나라를 포위하고 있는 군대를 풀게 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송나라는 저절로 구원하게 되는 셈입니다.”

문공은 고범의 진언대로 조나라와 위나라를 공격하였다. 조나라의 공공(共公)은 문공이 망명 시절에 조나라에 들렀을 때 무례하게도 이상한 갈빗대를 가진 체격이라고 놀려댄 적이 있었고 위나라도 또한 문공을 냉대했던 나라였다. 특히 흙덩이를 넣어 식사를 제공했던 오록(五鹿) 지방은 여지없이 유린당했다. 그러나 문공에게 식사를 보내주고 보물을 보내왔던 이부기의 영지에는 군사 한 명도 얼씬하지 않았다. 진의 문공은 망명 시절의 빚을 톡톡히 갚은 셈이었다. 은혜는 은혜로, 원수는 원수로 갚았던 것이다.

진문공이 나라를 얻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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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나라가 조나라와 위나라를 공격하자 정세를 관망하던 초의 성왕은 송나라의 포위를 풀고 군대를 철수시키려 하였다. 초나라의 군사력은 막강하였으나 중원에서의 패권 다툼에는 본국과의 거리가 워낙 멀어 물자를 보급하는 병참선(兵站線)이 길게 뻗어 있어 다른 나라보다 불리하였기 때문이었다. 그 위에 초의 성왕은 진의 문공에 대해 매우 호의를 가진 인물이었다. 문공의 운수는 하늘이 내린 것이니 이와 싸우는 것은 불리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문공이 복귀하기 전 초나라의 성왕과의 회담에서 3사(舍)의 거리까지 후퇴하겠다고 문공이 대답하자 크게 노하여 문공을 죽이자고 말했던 초나라 장군 자옥은 철수를 끝까지 반대하고 나섰다. 성왕은 자옥의 의사를 받아들여 초나라 군대 일부의 지휘권을 그에게 위임하여 대전토록 하였다.

진(晋)에서는 이미 송·제·진(秦) 등 중원의 유력한 제후들과 연합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제와 진(秦)의 군대는 장군이 통솔하고, 송의 군대는 송의 성공(成公)이 직접 통솔하고 있었다.

북쪽으로 자꾸 뻗어오는 초나라의 강력한 세력을 중원 제후들이 연합하여 저지한다는 춘추의 싸움에서 가장 전형적인 싸움이 이때의 성복(城濮)의 대전이다.

이 대전에서 진(晋)의 군사는 공격을 받지 않았는데도 전군을 깊숙이 후퇴시켰다. 초의 성왕과의 회담 때 3사의 거리까지 후퇴하겠다는 약속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대전의 결과는 초군의 패배로 끝났다.

초의 성왕은 패전에 대한 책임을 자옥에게 물어 문책하자 자옥은 자살하고 말았다. 성왕이 자옥을 문책한 것은 단순히 성복의 대전에서 패배한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었다. 애당초 초나라에서는 성왕을 비롯하여 그 수뇌진들이 진의 문공을 맹주로 하는 중원 연합군과의 싸움을 될 수 있는 대로 피하려 하였으나 자옥이 혼자서 주전론을 주장하고 나섰던 것이다. 그렇다면 성왕은 자옥의 주전론쯤은 충분히 누를 수 있었을 것인데도 주력부대는 자신이 통솔하여 돌아가고 소수 병력만을 자옥에게 주었을 뿐이었다. 공명심에 불타는 자옥이 행여 연합군을 격파한다면 큰 득이 될 수 있다는 만일의 요행을 바라는 술책이었음이 분명했다. 이른바 양다리를 걸쳐보겠다는 속셈이었다.

자옥은 이 같은 성왕의 술책의 희생물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겉으로 보기엔 자옥이 성왕의 의사를 거역하고 자기 주장을 관철한 것처럼 보이지만 성왕의 마음속에선 ‘잘되면 다행이다.’라고 비웃고 있었다. 질 것이 뻔한 줄 알면서도 부하를 사지에 몰아넣는 것은 군주의 자만이다. 얼마 후 성왕은 자기자만의 희생자가 되고 말았다.

성왕은 처음엔 상신(商臣)을 태자로 세웠다가 후에 상신을 폐하고 서제(庶弟)인 자직(子職)을 태자로 세우려 하였다. 이런 일은 군주의 입장에서는 대수롭지 않은 일일지 모르나 당사자의 입장에서는 사활이 걸린 중대 문제이다. 상신은 결기(決起)하여 부왕의 궁전을 포위하였다.

“마지막으로 곰의 발바닥이나 먹고 죽고 싶구나.”

포위된 성왕은 이렇게 자식에게 애원했으나 상신은 아버지의 마지막 소원마저 들어주지 않았다. 성왕은 자결하고 상신이 즉위하니 이가 곧 목왕(穆王)이다.

곰의 발바닥은 며칠을 두고 삶지 않으면 먹을 수가 없다. 성왕의 이 같은 소원은 시간을 벌기 위한 술책이었다. 곰의 발바닥을 삶는 동안에 구원군이 오기를 기다리자는 속셈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술책을 모를 상신이 아니었다.

성복의 대전이 초의 성왕 40년(기원전 632)의 일이고 성왕이 자식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 그 후 6년이니 재위 46년의 일이다. 재위 46년이라면 나이가 꽤 많았을 것이니 태자로 책봉된 상신으로서는 느긋이 기다리면 오래지 않아 군주의 자리에 오를 수 있었을 것이나 그때 형편으로는 느긋이 기다릴 수가 없는 상황에 놓여 있었다. 만약 기다리고만 있다간 결국 서제인 자직에게 태자의 자리를 빼앗겼을 것이 분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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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영 집필자 소개

서울에서 태어나 한문사숙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충남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저서로 《이야기 일본사》, 《이야기 중국사》가 있다.

출처

이야기 중국사1
이야기 중국사1 | 저자김희영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중국 고대부터 전한 시대까지의 역사를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함께 이야기 식으로 풀어 썼다. 엄청난 인구와 광대한 국토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이야말로 진정한 중국의 힘이며,..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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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진초의 패권 다툼이야기 중국사1, 김희영,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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