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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야기 중국
사1
은주시대

무왕 주를 치다

문왕(서백)은 주나라가 대업을 달성하기 전에 죽었다. 그의 나이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치세 50년이라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꽤 고령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문왕이 죽자 그 아들 발(發)이 뒤를 이으니 그가 무왕이다. 무왕은 죽은 아버지를 문왕이라 추존하고 태공망 여상을 사부(師父)로 삼아 상보(尙父)라 불렀으며 모든 일에 자문을 받는 한편 동생 주공(周公) 단(旦)이 빈틈없이 그를 보좌하여 아버지의 유업을 닦아 나갔다. 선정을 베풀어 민심을 모으고 군대를 정비하여 포학이 더해가는 주왕을 응징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무왕이 즉위한 지 9년 후 아버지의 능묘(陵墓)가 있는 필(畢) 땅에 나아가 제사를 올리고 군대를 정비하여 맹진(孟津, 盟津)까지 진격하였다. 이때 그는 문왕의 위패를 수레에 싣고 무왕 자신은 태자 발이라 칭하여 이번 원정이 문왕의 의사임을 표시하였다. 수레에 위패를 모신 것은 문왕이 살아 있음을 뜻하는 것으로 무왕은 태자로서 아버지 문왕의 친정(親征)에 종군한다는 형식을 취했던 것이다.

《사기》에는 문왕이 서백으로서 그의 명성을 떨치게 되자 그가 죽기 10년 전부터는 왕이라 칭하고 이에 복종하지 않는 제후들을 토벌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지금은 비록 문왕이 죽었지만 문왕의 명성은 제후를 비롯하여 천하의 백성들 마음속에 깊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에 그의 이름은 무왕이 의도한 대로 효력을 발휘하였던 것이다.

이번의 군사 행동에는 두 가지 뜻이 있었다. 그 하나는 주왕을 위협하여 그의 포학함을 반성시키자는 시위의 뜻이고, 또 하나는 부조 이래의 명망이 과연 어느 정도여서 이번 거병(擧兵)에 얼마만큼의 제후가 동조하여 모이는가를 시험하기 위한 것이었다. 주나라 군대가 맹진에 이르니 8백 제후가 모여 있었다. 무왕에게는 예상 밖의 많은 숫자였다. 거기에 모인 제후들은 한결같이 “포학한 주왕을 토멸해야 합니다.” 하고 외쳤다.

8백 제후가 맹진에 모인 사실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아무 약속 없이 모였다는 것이다. 모이라는 명령도 없었으며 날짜·시간 따위 전혀 약속한 일이 없이 그 많은 제후가 스스로 모여들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당시 군대를 진두지휘하고 있던 태공망이 제후들에게 동원령을 내려 “만약 시간을 어기는 자는 참(斬)할 것임.”이라는 엄명을 내렸기 때문에 모였다는 것이다.

무왕의 출정에는 여러 가지 길조가 나타났다.

무왕이 황하를 건널 때 배에 흰 고기가 뛰어올랐다. 무왕은 이 고기를 잡아 제사를 지냈다는 사실이 《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길조라는 것이다. 고대 왕조에서는 어느 왕조에서든 왕조를 상징하는 빛깔이 있었는데 은나라는 흰색이고 주나라는 붉은 색이었다. 흰 고기가 배에 뛰어든 것은 고기를 요리하듯이 은나라를 요리하라는 뜻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또 무왕이 동쪽 기슭에 상륙했을 때 강의 상류로부터 불길이 일어나더니 그 불이 흘러내려와 무왕이 쉬고 있는 진중 앞에서 붉은 까마귀로 변하니 이것 또한 길조임에 틀림없었다. 길조가 겹치고 8백 제후가 모여드니 주나라 군대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했고 모인 제후들은 무왕에 대한 충성을 맹세하니 주왕을 토멸하기에는 아주 좋은 기회였다. 그러나 무왕은 “그대들은 아직 천명을 모르오. 지금은 주를 정벌할 시기가 못되오.” 라며 군사를 돌려 서쪽으로 돌아왔다.

사기충천해 있던 제후들 가운데는 매우 불만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으나 신중에 신중을 기하는 무왕의 태도에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는 사람도 많았을 것이다.

굴원의 〈천문〉에는 맹진에서 회군하기를 주장한 사람은 주공 단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무왕이든 주공이든 그들의 생각에는 은나라가 아무리 학정에 시달리고 부패했다 하더라도 아직은 그렇게 가볍게 여겨서는 안 된다는 결론에 도달했다.

그로부터 2년이 지났다. 주왕의 포학상은 점점 더해만 갔다. 왕자 비간을 죽여 심장을 난도질하고 기자를 가두었다. 또 종묘의 제사를 받드는 태사 자(疵)와 소사 강(疆)이 제기와 악기를 가지고 주나라로 도망쳐 왔다. 무왕은 더 참을 수가 없었다. 이에 제후들에게 고하였다.

“은왕조에 중죄가 있으니 이를 토멸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 제후들은 총궐기하라!”

마침내 출병(出兵) 명령이 내린 것이다.

주의 도읍인 풍읍은 사기충천해 있었다. 때는 한파가 밀어닥치는 엄동이었다. 무왕을 선두로 태공망 여상과 무왕의 동생인 주공 단·소공(召公)·필공(畢公)이 좌우를 옹위해 따랐다. 3백 대의 전차, 3천 명 용장의 영솔 아래 도합 4만 5천의 용감한 군대가 진군을 시작했다. 주군이 맹진에 이르자 그곳에는 이미 4천 대의 전차를 거느린 제후의 군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무왕은 전군에게 포고문을 내렸다.

“전군의 용사에게 고한다. 은왕 주는 여색을 탐하여 음락을 다하고 있다. 하늘을 공경할 줄 모르고 죄를 다스림에 있어 공평을 잃고 만민은 도탄에 빠져 허덕이고 있다. 스스로 천명을 끊는 행동을 자행하고 있으니 지금 토멸하지 않으면 천하는 더욱 혼란에 빠질 것이다. 그래서 나는 천명에 따라 주에게 천벌을 가하려 하노라.”

무왕의 군대는 동쪽을 향해 진군을 계속하여 은의 교외인 목야(牧野)에 이르러 진을 치고 최후의 결전에 대비하였다.

음락에만 빠져 있던 주왕도 주나라 군대의 진군 소식을 듣자 사태의 중대함을 느끼고 70만의 병력을 동원해서 목야로 맞서나갔다. 아무리 수적으로 우세한 병력이었지만 그들의 대부분은 전쟁 포로였으며 은나라 사람들은 주지육림 속에서 뼈가 녹은 쓸모없는 군대였다. 모두가 오합지졸에 불과했다.

이동궤(利銅)

제기로 추정되는 이 이동궤 아랫 부분에 갑자일 오전에 주나라 무왕(武王)이 상(商)을 정벌했다는 32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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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내 건곤일척(乾坤一擲)의 대결전이 벌어졌다. 주군은 물밀듯이 주왕의 본진으로 돌진해 들어갔다. 주왕의 포악에 시달리던 은군은 하루빨리 무왕이 주왕을 토멸해주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전투가 시작되자 대부분의 부대는 무기를 거꾸로 들어 항복했고 어떤 부대는 등을 돌려 주군과 함께 공격에 가담하기도 하였다.

은군은 여지없이 무너지고 말았다. 주왕은 목야에서 도망쳐 수도 조가(朝歌)에 있는 녹대(鹿臺)로 올라갔다. 주왕을 추격하던 주군이 여러 겹으로 에워싸자 녹대에서 불꽃이 타올랐다. 주왕 스스로 백성들의 고혈(膏血)을 짜서 만든 보석으로 장식한 옷을 입고 불을 질러 그 속으로 몸을 던졌던 것이다. 비곗덩어리가 부지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은 왕조는 종말을 고했다.

이동궤의 명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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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왕조는 탕왕(湯王)으로부터 17세 33왕이 계속되었다. 형제의 계승이 많았기 때문에 대수(代數)가 17세로 끝난 것이다.

주왕을 그토록 황음무도하게 만들어 은왕조를 망치게 하고 주왕 자신도 스스로 목숨을 끊게 만든 장본인이 누구인지를 독자들은 잘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달기는 그 후 어떻게 되었을까?

주왕이 녹대에서 스스로 불에 타 목숨을 끊은 후 무왕은 제후들을 거느리고 은나라 수도에 입성하였다. 은나라 백관과 백성들은 모두 교외까지 나와 이들을 환영하였다.

무왕은 녹대에 이르러 친히 주왕의 유해에 세 발의 활을 쏘고 칼로 친 후 황월(黃鉞)각주1) 로 목을 잘라 큰 백기(白旗)에 달았다. 이어서 주왕의 두 총희의 처소로 향했다. 그중의 한 사람은 달기임이 분명하다. 《사기》의 〈은본기(殷本紀)〉에는 무왕이 달기를 죽였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주본기(周本紀)〉에는 두 여인이 모두 목을 매어 자살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무왕은 두 여인의 유해에도 친히 세 발의 활을 쏘고 칼로 친 후에 현월(玄鉞)각주2) 로 목을 잘라 작은 백기에 달고 진영으로 돌아왔다.

주 시대 무사 복원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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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은 제물을 마련하고 제단을 쌓아 무왕이 천명을 받아 은을 토멸하고 천자가 되었다는 축문을 낭독하여 혁명이 이루어졌음을 선포하였다.

이상 서술한 내용이 3천 년 전의 고대로부터 지금까지 내려오는 주왕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이다. 그러나 일부 역사학자 가운데는 주왕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내리고 있다. 즉 주왕은 노예의 해방을 비롯하여 장강·회하 지역의 개발은 물론, 중원 문화를 남방에 전파하고 국가의 통일에 대해서도 공헌이 많았다고 전제하고 주왕의 공적은 “주 무왕보다 크다.”고 주장하여 지금까지의 주왕에 대한 평가를 뒤엎으려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어떤 방법으로 역사의 참모습을 규명하여 주왕에 대한 공과를 재평가할지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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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영 집필자 소개

서울에서 태어나 한문사숙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충남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저서로 《이야기 일본사》, 《이야기 중국사》가 있다.

출처

이야기 중국사1
이야기 중국사1 | 저자김희영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중국 고대부터 전한 시대까지의 역사를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함께 이야기 식으로 풀어 썼다. 엄청난 인구와 광대한 국토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이야말로 진정한 중국의 힘이며,..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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