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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1 전한시대
여후의 시대
고조가 죽자 태자 영이 황제의 위에 올랐으나 그는 나이가 어리고 유약하여 실권은 여후가 장악하였다.
《사기》의 저자 사마천은 냉철한 사가로 현실을 존중한 데 반하여 《한서》의 저자 반고(班固)는 원칙과 명분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었다. 《사기》와 《한서》는 모두 기전체(紀傳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천하를 지배한 왕조와 제왕의 전(傳)은 ‘본기’에 기록하고, 지방 정권, 즉 제후의 전은 ‘세가’에 기록하고, 그 밖의 여러 인물의 전은 ‘열전’에 기록하는 것이 기전체의 기록 방법이다.
태자 영이 즉위하여 혜제(惠帝)로 불렸으나 《사기》에는 혜제 본기가 없고 ‘고조 본기’ 다음에 ‘여후 본기’로 이어지고 있다. 혜제는 8년 동안 재위하였으나 정치적 실권은 사실상 여후가 장악하였기 때문에 혜제가 천하를 지배했다고 할 수 없으므로 사마천은 아무 거리낌없이 혜제를 본기에서 제외시켰다.
이에 반하여 반고는 명목상이라 하지만 엄연히 제위에 올랐기 때문에 본기에서 제외시킬 수 없다고 생각하여 《한서》에는 ‘혜제 본기’를 넣고 있다. 또한 《한서》에는 항우·진승을 모두 열전에 넣고 있다. 《한서》가 한의 역사를 기술한 것이기 때문에 그렇게 취급했을지 모르지만 《사기》는 천하의 역사를 다룬 것이기 때문에 사마천은 항우를 본기에, 진승을 세가에 넣고 있다.
한대의 학자들은 항우를 고조와 똑같이 취급했다 하여 비난의 소리도 있지만, 사마천은 짧은 동안이지만 항우의 위령이 천하에 미친 것이 사실이기 때문에 그를 본기에 넣고 진나라 토멸의 선구자격인 진승을 제후로 취급하여 세가에 넣었다. 이 같은 사마천의 역사관으로 볼 때 사실상 혜제는 천하를 지배하지 못했으므로 본기에 넣을 자격이 없음은 확실하다 하겠다.
고조가 죽자 가장 난감한 처지에 빠진 것은 척부인이었다. 여후는 많은 지지 세력을 갖고 있었지만 척부인이 믿은 것은 오직 고조 한사람뿐이었다. 고조가 죽고 난 지금 그녀는 고립무원의 외톨이가 되었다. 태자 폐립 문제, 번쾌 주살 음모 등이 모두 척부인에 의해 자행되었음을 익히 알고 있는 여후는 척부인이 미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것뿐이랴. 시앗을 보면 돌부처도 돌아앉는다는 말이 있듯이 만년의 남편 유방은 척부인만을 사랑하고 자기를 멀리한 것도 새삼 분하게 느껴졌다.
“이들 모자는 용서할 수 없다.”
마침내 여후는 척부인을 죽이기로 하였다. 그것도 단숨에 쳐 죽이는 것으로는 직성이 풀리지 않았다. 그는 역사상 잔인하기로 유명한 방법을 썼다.
여후는 우선 척부인을 영항(永巷)에 가두었다. 영항이란 원래 후궁들이 거처하던 곳으로 여러 개의 방이 거리처럼 쭉 배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며 또한 후궁이 죄를 범했을 때 치죄하던 곳이었다. 척부인은 머리를 깎이고 재갈이 물려졌으며 빨간 옷이 입혀지고 그곳에서 방아를 찧는 벌이 내려졌다.
척부인을 가둔 여후는 척부인의 아들 여의를 장안으로 불렀다. 여의는 조왕으로서 조나라에 있었다. 모자를 한꺼번에 죽일 생각으로 조왕에게 출두할 것을 명령하였다.
이때 조의 재상은 건평후 주창(周昌)이었다. 그는 여후가 척부인과 조왕을 함께 해치려는 마음을 헤아리고 “고조께서는 신에게 조왕을 위탁하셨습니다. 조왕은 지금 병석에 누워 있으므로 감히 예궐하라는 조서를 받들 수가 없습니다.”라고 거절하여 사자가 세 번이나 되풀이하여 왕복하였다.
여후는 크게 노하여 주창을 즉시 소환하라 명하였다. 조왕 여의의 일이라면 고조의 유명(遺命)을 구실로 응하지 않을 수 있지만, 주창 본인으로서는 따르지 않을 수가 없었다. 주창이 장안에 이르자 다시 사자를 보내어 조왕 여의를 불렀다.
혜제는 동생 여의가 궁중에 오면 여후에 의해 살해될 것을 알고 패상까지 나가서 동생인 조왕 여의를 맞이했다. 그리고 그 후로는 조왕과 침식을 같이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혜제는 아침 일찍 사냥을 나갔다. 이때 여의는 너무 어려서 아직 자고 있었기 때문에 같이 사냥에 나갈 수가 없었다. 날이 새기 전에 돌아오면 아무 일 없겠지 하고 혜제는 사냥을 나갔던 것이다.
혜제는 이처럼 인자하여 동생을 보호하였지만 지키는 사람 열이서 도둑놈 하나 못 당한다는 격으로 결과는 너무 뜻밖이었다.
틈을 노리고 있던 여후는 사람을 시켜 미리 준비하고 있던 짐주(酖酒)각주1) 를 조왕에게 권하여 마시게 했다. 짐주를 마시면 살아날 길이 없었다.
여후는 이렇게 해서 조왕 여의를 살해하고 영항에 가둔 척부인을 죽여 원한을 씻으려 하였다.
여후는 먼저 척부인의 두 손과 두 다리를 끊고 눈을 도려내고 귀를 잘라 귀머거리로 만든 다음 약을 먹여서 벙어리로 만들었다. 그리고 변소에 갖다 놓고 인체(人彘, 인간 돼지)라고 이름 붙였다.
며칠 후 여후는 이 인체를 자기 아들 혜제에게 보였다.
혜제는 이 인간 돼지가 척부인임을 알고 충격을 받은 나머지 병이 들어 그 후 1년 여를 병석에 누워 있으면서 사람을 시켜 여후에게 다음과 같이 그의 심정을 털어놓았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차마 할 짓이 아닙니다. 나는 어머니의 아들로서 양심상 도저히 천하를 다스려 나갈 수가 없습니다.”
혜제는 이때부터 정치를 포기하고 술과 여자를 가까이했다. 이 때문에 정치의 대권은 더욱 여후의 손에 쥐어졌다.
고조가 끝까지 태자를 바꾸려 했던 것은 단순히 척부인을 사랑했기 때문만은 아니고 태자의 이 같은 유약함이 불안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라는 추측을 갖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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