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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야기 중국
사1
은주시대

은허의 발굴

근래 역사학자 가운데는 은나라와 하나라를 통틀어 가공(架空)의 역사로 생각하는 학자도 있었으나 은허의 발굴로 은왕조의 역사는 서서히 밝혀지기 시작하였다. 은허는 안양현(安陽縣) 소둔촌(小屯村)에서 발견되었는데 은왕조를 중흥시킨 반경이 이곳으로 도읍을 옮긴 이후 은이 멸망할 때까지 2백여 년간 수도로 삼았던 곳이다.

이곳에서 구갑(龜甲, 거북의 껍질)과 수골(獸骨, 길짐승의 뼈)에 새겨진 글자를 비롯하여 당시의 문화를 나타내는 유적과 유물이 발견되었다. 은허가 발굴되기 전까지는 《사기》에 기록된 은 왕조의 역사가 가공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역사학계의 주류였다.

갑골문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은왕조는 3천 년 전에 멸망한 왕조로서 탕왕에서 시작해 주왕까지 17세 30왕이었다. 《죽서기년》에는 은이 496년 동안 천하를 다스렸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삼통력(三統曆)》에는 629년으로 되어 있어 많은 차이를 보인다.

《사기》의 저자 사마천은 그의 시대보다 천 년 전에 살았던 30명의 왕 이름을 하나하나 기록했는데, 은허에서 출토된 복사(卜辭)각주1) 에 기록된 왕의 이름과 대조한 결과 몇 사람의 이름과 계통만 다를 뿐 기본적으로는 차이가 없었다. 이 점을 감안할 때 사마천과 《사기》의 신빙성을 재인식시키고 그 가치를 보다 높이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은허의 발굴은 19세기 중엽의 일이고 그보다 1백여 년 뒤인 1950년대에는 정주(鄭州) 시내에서 상왕조 제6세의 왕인 중정(仲丁)이 수도로 삼았던 도시의 유적 상성(商城)이 발견되었다. 이어서 하북·산서·섬서·강서 등의 각 성에서도 상대의 유적이 수십 군데 발견되어 상대의 역사적 양상과 지배 영역 그리고 문화의 분포 상황 등이 안개 걷히듯 서서히 밝혀졌다.

부엉이 형상을 한 청동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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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들 유적이나 유물 가운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안양의 은허와 정주의 상성이라 할 수 있다.

정주의 상성은 3천 5백 년 전에 축조된 상대 중기의 유적으로 수천 년에 걸쳐 자연의 작용과 인위적 역사의 영향을 받아 많은 변화를 가져왔으나 현재까지도 대체적인 윤곽은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 1은허

      차마갱(車馬坑) 은허박물관

    • 2은허 발굴

      화원장 수골갱(花圓莊獸骨坑)의 발굴 모습

갑골문자를 통해 상왕조 시대에 이미 정전제(井田制)가 실시되었음을 알 수 있고 은허의 서북쪽에서 발견된 분묘에서는 예술적 가치가 높은 귀중품이 많이 출토되었다. 묘실은 눈이 부실 정도로 화려하게 장식되어 지하 궁전을 방불케 할 정도로 호화의 극치를 이루었으니 그들이 생전에 얼마나 호화로운 생활을 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은대 역사의 베일을 벗겨주는 은허의 유적이 발견된 것은 한방 약재인 용골(龍骨) 덕이었다. 약재상들은 처음에는 사업상의 비밀 때문에 용골의 산지를 쉬쉬하며 숨겼다. 이 용골이 귀중한 갑골문이라는 사실을 안 뒤부터 연구가들은 열심히 출토 장소를 조사하여 마침내 용골의 산지가 안양현 소둔촌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이를 맨 처음 발표한 사람은 나진옥(羅振王, 1866~1940)으로 그의 저서 《은상점복문자고(殷商占卜文字攷)》에서 그 사실을 밝혔다. 나진옥은 금석문 연구의 일인자로, 일찍이 자금성(紫禁城)의 내각문고(內閣文庫)에 명나라·청나라 때의 공문서가 산적해 필요없는 문서는 모두 소각하자는 주장이 나오자 보존의 필요성을 강조하여 이를 막았다. 또 스타인이나 페리오가 돈황에서 엄청난 문화재를 반출한 후 현지에 가서 나머지 문화재를 북경에 운반해온 큰 공로자였다.

나진옥과 왕국유

나진옥이 갑골문을 대규모로 수집, 탁본하였고, 왕국유가 갑골문을 연구해 문자를 해독하고 갑골문의 역사학적 가치를 입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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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진옥은 1911년 동생 나진상과 처남 범항헌(范恒軒)을 안양에 파견하여 더욱 많은 문물을 사들이기도 하였다.

나진옥이 갑골편의 출토지를 안양현 소둔촌이라고 확인, 발표한 것은 1910년이었다. 그러나 신해 혁명과 그에 따른 혼란 때문에 현지 조사는 그로부터 18년 후인 1928년 중앙연구원에서 파견된 동작빈(董作賓, 1895~1963)이 예비 조사로 진행했다. 그 후 1937년 중일전쟁 발발 직전까지 발굴 조사가 계속되었다.

은허 발굴은 원래 갑골편 채집이 주목적이었다. 이때 갑골문은 이미 선구자들에 의해 어느 정도까지는 해독이 가능하게 되었으며 보다 많은 복사(卜辭)에 의해 은대의 역사를 더욱 자세히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연구가들은 갑골편의 채집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유적에 대해서도 관심을 기울였다. 이에 따라 거대한 능묘·주거·궁전·종묘터도 발견했다. 거대한 능묘에서는 훌륭한 청동기와 옥으로 된 그릇이 부장품으로 발견되기도 하였다.

미국 하버드 대학에서 고고학과 인류학을 전공한 양사영(梁思永)은 귀국 후 연구소의 고고반에 참가하였으며 얼마 후 책임자가 되어 발굴을 지휘했다. 은허의 능묘 발굴은 주로 그의 지휘에 의해 진행된 것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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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영 집필자 소개

서울에서 태어나 한문사숙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충남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저서로 《이야기 일본사》, 《이야기 중국사》가 있다.

출처

이야기 중국사1
이야기 중국사1 | 저자김희영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중국 고대부터 전한 시대까지의 역사를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함께 이야기 식으로 풀어 썼다. 엄청난 인구와 광대한 국토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이야말로 진정한 중국의 힘이며,..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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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은허의 발굴이야기 중국사1, 김희영,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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