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이야기 중국
사1
춘추전국시대

여불위

양책대고, 呂不韋

전국 시대에는 상인들이 각국을 왕래하면서 상업을 경영하는 사람이 많았다. 생활이 향상되고 수요가 증가함에 따라 상업이 활발해지고 규모도 점점 확대되어 전국 시대 말기에 이르러서는 대실업가가 탄생하기에 이르렀다.

양책(陽翟, 하남성) 출신의 여불위는 이 시대를 대표하는 대실업가로 여러 나라를 왕래하면서 천금의 재산을 모은 큰 부자가 되었다. 여러 나라를 왕래하였기 때문에 그의 식견은 남다른 데가 있었고 또한 모든 일에 대한 감식안(鑑識眼)이 뛰어났다.

이 여불위가 어느 날 상업 관계로 조나라 수도 한단에 왔다가 우연한 기회에 진나라에서 인질로 와 있는 진왕의 손자 자초(子楚)와 만나게 되었다. 자초를 만나본 여불위는 “이것이야말로 기화(奇貨)로다. 사둘 만한 가치가 있다.”라고 말하였다.

기화란 말할 것도 없이 진귀한 상품으로, ‘우연히 얻게된 진귀한 물건’이란 뜻이다. 보통 사람들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상품이지만 그 방면의 전문가가 보기엔 매우 가치가 있었다. 그것도 지금 당장 값이 나가는 게 아니고 얼마 동안 간직하고 있으면 아주 고가(高價)로 팔 수 있는 것이 기화이다.

그러면 왜 진나라의 인질 자초가 기화란 말인가?

전국 시대의 관습으로 여러 제후들이 서로 인질을 교환하는 데 있어서 약한 나라에서 강한 나라로 보내는 인질은 태자와 같은 아주 중요한 인물을 보내야 했고, 강한 나라에서 약한 나라로 보내는 인질은 이와는 대조적으로 그다지 중요한 인물이 아닌 왕족의 사람으로 보내는 것이 당시의 관례였다.

진나라에서 조나라로 보내진 인질 자초는 진 소왕의 둘째아들 안국군(安國君)의 가운데 아들이었고 그의 어머니는 하희(夏姬)였는데 안국군의 사랑을 받지 못하였다. 소왕의 손자였으나 태자의 아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왕위 계승 서열로 따지면 전혀 가망이 없는 편에 속했다.

만약 인질을 교환한 나라의 어느 한 나라가 공격하면 희생당하는 것은 인질이었다. 진나라는 본래 인질 교환에 관계 없이 제후를 공격할 작정이었으므로 희생되어도 그다지 아깝지 않은 사람을 인질로 골라 보낸 것이다. 결국 자초는 진나라를 위하여 희생될 한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진나라 태자가 죽고 둘째아들인 안국군이 태자가 되니 자초는 태자의 아들이 되었을 뿐 아니라 왕위 계승 서열도 한 걸음 가까워졌다. 그러나 새로 태자가 된 안국군에게는 20여 명이나 되는 아들이 있었다. 태자의 후계자를 정할 경우 국내에 있는 아들 쪽이 훨씬 유리한 입장에 설 것이고 인질로 다른 나라에 가 있는 자초는 제외될 것이 뻔했다.

여러 나라를 여행하여 여러 가지 정보를 수집하고 있던 여불위는 진나라의 속사정을 잘 알고 있었다. 진나라 태자 안국군의 정부인(正夫人)은 화양부인(華陽夫人)으로 태자의 사랑을 받고 있었다. 그러나 화양부인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하지만 누구를 후계자로 세우느냐 하는 문제에 결정적인 권한을 행사할 수 있는 것은 화양부인이었다. 화양부인이 ‘이 사람이 가합하다.’고 지명하는 사람이 태자의 후계자로서 장차 왕위를 잇게 되는 것이다.

여불위는 후계자 지명권을 가진 화양부인에 대해서 모든 정보를 가지고 있었다. 그녀에게 가장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사람은 그녀의 언니라는 사실까지 알고 있었으며 화양부인의 성격, 무엇을 좋아하는가, 그녀의 언니는 어떤 사람인가 등등을 샅샅이 알고 있었기 때문에 화양부인에게 접근해서 공작을 펴는 일에도 자신이 있었다.

여불위는 자초에게 접근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내 당신의 문호(門戶)를 크게 만들어 드리겠소.

자초가 웃으며 말하였다.

“먼저 당신 자신의 문호를 크게 만드시오. 그러면 나의 문호도 크게 될 것이 아니오?”

“그것은 당신이 모르는 말씀이오. 나의 문호는 당신의 문호가 커지는 걸 기다려서 커질 것입니다.”

문호를 크게 한다는 것은 부자가 된다는 뜻이다. 당신이 먼저 부자가 되는 것을 기다려 내가 부자가 된다는 말이다.

자초는 마음속으로 여불위가 말하는 뜻을 알아차렸다. 여불위에게 물었다.

“어떻게 하면 부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당신은 가난한데다 인질의 몸이 되어 외출할 때 수레를 타는 것조차 자유롭지 못하니 빈객과 사귈 돈이 없을 것입니다. 내가 비록 가난하나 당신을 위하여 천금을 갖고 서쪽으로 가서 안국군과 화양부인을 섬겨서 당신을 후계자로 삼게 하겠습니다.”

자초는 이에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였다.

“반드시 그대의 계책대로 된다면 진나라를 그대와 함께 가지도록 하겠소.”

청동 전차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여불위는 이에 오백금을 자초에게 주어 빈객들과 사귀어 친교를 맺게 하고 다시 오백금을 가지고 진기한 물건과 보기 좋은 물품들을 사서 서쪽의 진나라로 떠났다. 먼저 화양부인의 언니에게 뵙기를 청하고 그 물건을 모두 화양부인께 바치며 말하였다.

“자초는 어질고 지혜가 있습니다. 제후들의 빈객과 친교를 맺어서 그의 빈객은 천하에 두루 퍼져 있습니다. 항상 말하기를 ‘자초는 부인을 하늘처럼 여기고 밤낮으로 울면서 태자와 부인을 사모하고 있노라’고 합니다.”

부인은 매우 기뻐하였다. 불위는 이어 그의 언니를 시켜서 부인을 설득하게 하였다.

“지금 부인께서는 태자를 섬기어 매우 사랑을 받습니다. 그러나 아들이 없습니다. 나이 젊고 아름다울 때 일찍이 임금의 여러 아들 가운데 현명하고 효도하는 자를 골라서 친근하게 결속하고 천거하여 후계자로 삼지 않으면 얼굴빛이 노쇠하여 임금의 사랑이 해이해진 뒤에는 한마디 말을 하려고 한들 어찌 될 수 있겠습니까. 지금 자초는 현명하나 스스로 자신은 중간 서열에 있는 아들이니 후계자가 될 수 없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부인께서 이때에 그를 선발하여 후계자로 삼는다면 자초에게는 없던 나라가 생기는 것이고 부인에게는 없던 아들이 생기는 것이니 부인은 일생 동안 진나라의 은총을 누릴 것입니다.”

화양부인의 마음을 움직이게 한 것은 오백금에 해당하는 선물보다도 ‘나이가 들어 얼굴빛이 노쇠하여 임금의 사랑이 끊기면 한마디 말도 할 수 없다’는 자신의 장래 문제에 대해 의표(意表)를 찌른 그의 언니의 말이었다. 자신이 직접 후계자를 지명한다면 그 은혜는 상대방에게 평생토록 깊은 감사의 뜻을 불어넣는 것이 된다.

화양부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언니의 말이 옳다 생각하고 태자의 한가한 틈을 엿보아 조용히 입을 열었다.

“조나라에 인질로 가 있는 자초는 현명하다는 소문이 사방으로 퍼져 이곳을 내왕하는 사람들이 모두 다 칭찬합니다.” 그리고는 눈물을 흘리며 말하였다.

“첩이 외람되이 태자마마의 사랑을 받고 있사오나 불행히도 아들이 없습니다. 원하옵건대 자초를 후계자로 삼아서 첩의 몸을 의탁하게 해주십시오.”

안국군은 허락하고 부인과 함께 옥부(玉符)를 새겨 자초를 후계자로 할 것을 약속하였다. 이어 자초에게 후한 예물을 보내기로 하고 여불위에게 그것을 전달하게 하였다. 이로써 자초는 더욱 여유 있는 생활을 할 수 있게 되었고 빈객과의 친교도 활발해졌다.

조나라의 수도 한단은 천하에 이름난 색향(色鄕)이었다. 부호가 된 여불위는 돈을 미끼로 뛰어나게 예쁘고 춤을 잘 추는 여인을 얻어서 살고 있었는데 그녀는 임신하고 있었다. 여불위는 어느 날 자초를 초대하여 술을 마시게 되었는데 자초는 이 여인을 보자 그만 한눈에 반했다. 자초가 일어나 여불위에게 술잔을 올리며 그 여인을 자기에게 달라고 청하였다. 여불위는 매우 불쾌하였으나 다시 생각하니 이미 자신의 전 재산을 기울여 자초를 돕는 것은 기이한 이득을 얻기 위한 것임을 깨닫고 드디어 그 미희를 자초에게 바치기로 하였다. 그때 미희는 스스로 자기가 임신하고 있음을 숨겼다가 달이 차자 아들 정(政)을 낳았다. 자초는 물론 자신의 아들이라고 생각하고 그 미희를 부인으로 세웠다.

이 자초의 아들 ‘정’이 바로 후에 6국을 멸망시키고 천하를 통일한 시황제(始皇帝) 였다. 시황제의 탄생은 진 소왕 48년(기원전 259) 정월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시황제가 태어난 2년 후 그는 생명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진나라 소왕 50년에 진나라가 왕흘(王齕)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게 하여 한단을 포위하여 차차 육박해 들어가자 조나라에서는 인질로 잡고 있는 자초를 죽이고자 하였다. 여불위는 자초와 모의하여 황금 6백 근을 감시하는 아전에게 뇌물로 주고 탈출하여 진나라 군중에 있다가 진나라로 돌아가게 되었다.

조나라는 나머지 자초의 처자를 죽이고자 하였으나 자초의 부인은 조나라 권문세도가의 딸이었으므로 어린 아들과 함께 무사히 살아날 수가 있었다. 자초의 처자가 무사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여불위의 사전 대비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여불위는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미리 그들의 은신처를 마련해 놓았었고 그들을 호위할 인물까지도 물색해 놓는 등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던 것이다.

진나라의 청동검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한단의 싸움 6년 후 진의 소왕이 죽고 태자 안국군이 즉위하니 이 이가 효문왕(孝文王)이다. 효문왕이 즉위하자 자초를 태자로 삼았으며 조나라에서는 자초의 부인과 아들 정을 받들어 진나라에 돌려보냈다. 당시에는 1년의 복상기간(服喪期間)이 지난 후에야 정식으로 즉위식을 거행하는 것이 관례로 되어 있었다. 소왕이 죽은 후 1년의 상기를 마치고 즉위식을 올린 효문왕은 즉위 3일 만에 죽으니 이에 태자로 있던 자초가 진나라 왕이 되었다. 이가 곧 장양왕(莊襄王)으로 장양왕은 자기를 태자로 지명한 화양후를 화양태후라 하고 생모인 하희를 높여서 하태후(夏太后)라고 하였다.

여불위의 예견은 적중하였다. 과연 자초는 ‘기화’임에 틀림 없었다. 장양왕이 즉위하자 여불위를 승상으로 삼고 문신후(文信侯)로 봉하여 하남·낙양의 10만 호를 식읍(食邑)으로 주었다.

장양왕이 즉위한 지 3년 만에 죽으니 태자 정이 임금이 되었다. 진왕 정의 원년은 기원전 246년으로 이때 그의 나이 13세의 어린 소년이었다. 여불위를 높여서 상국(相國)각주1) 을 삼고 중보(仲父)라고 불렀다. 춘추 시대의 첫 번째 패자 제의 환공이 관중을 중보라 부른 고사를 본받은 것으로 본래의 뜻은 아버지의 동생, 즉 숙부라는 뜻인데, 여불위의 경우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란 개념을 더 강하게 풍긴다.

여불위는 소중한 기회를 잃기는 하였으나 기화의 아들이 엄연히 왕위를 이었고 왕위에 오른 그가 사실은 자신의 아들이었으며 게다가 나이가 어렸기 때문에 진나라에서는 여불위의 권세를 따를 자가 없었다. 여불위는 어느 사이엔가 일찍이 자신의 첩이었던 시황제의 생모와 정을 통하게 되었다. 옛날에 관계했던 여인이었지만 지금은 엄연히 태후의 신분을 가진 여성이다. 여불위는 대담하게도 그런 여인과 관계를 맺은 것이다. 이 점에 대하여는 나중에 그 사실이 밝혀지겠지만 여불위보다는 태후 쪽이 더 적극적이었던 것 같다.

여불위는 전국 시대의 사군처럼 선비들을 불러모으고 그들을 후대하니 식객이 3천 명에 이르렀다. 여불위는 이에 그의 식객들에게 각각 보고 들은 바를 모두 저술케 하여 이를 편집하여 천지 만물과 고금의 사물을 모두 갖춘 이른바 백과사전(百科事典)을 펴냈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여씨춘추(呂氏春秋)》라고 불렀는데, 팔람(八覽)각주2) , 육론(六論)각주3) , 십이기(十二紀)각주4) 의 3부로 이루어져 있으며, 모두 20여 만언(萬言)이나 되었다. 이 《여씨춘추》는 극히 일부만이 유실되었을 뿐 대부분이 현존하고 있으나 후인(後人)들의 가필(加筆)도 있었던 것 같다. 그 이유는 여불위가 죽은 후의 일까지도 기록하고 있는 사실로 미루어 추측할 수 있다.

《여씨춘추》가 완성되자 여불위는 이것을 함양의 시문(市門)에 진열하여 놓고 천금을 그 위에 달아놓은 다음 ‘이 책에서 단 한 글자라도 더 보태거나 빼버리거나 고치는 자가 있으면 천금을 주겠노라.’고 호언하였다. 후세에 이르러 훌륭한 문장을 가리켜 ‘일자천금(一字千金)’이라고 말하는 것은 이 고사에서 비롯된 것이다.

시황제가 점점 성장함에 따라 여불위는 불안한 마음이 생겼다. 태후와의 관계가 발각되어 화가 미칠 것이 두려워 적당한 기회에 태후와의 관계를 끊으려 하였으나 태후 쪽에서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여불위는 자기보다 성적 매력이 있는 자를 태후에게 추천하고 그녀의 품에서 벗어나려 하였다. 이에 비밀리에 음경(陰莖)이 큰 노애라는 사람을 구하여 그를 자기집 사인(舍人)으로 삼았다. 여불위는 때때로 창악(倡樂)을 벌이고 노애(嫪毐)로 하여금 그 큰 남근(男根)으로 오동나무로 만든 수레바퀴를 꿰어 들고 다니게 하였다. 그리하여 그 이야기가 태후의 귀에 들어가도록 하여 태후의 호기심을 자극시켰다. 유달리 남자를 좋아하는 태후는 그 이야기를 듣고 가만히 있지 않았다. 여불위에게 그 사인을 자신의 궁중에서 일하게 하면 어떻겠느냐고 은근히 말하였다. 여불위는 속으로 이제 됐다 생각하고 그 자를 궁형(宮刑) 받은 자라고 속여 태후의 궁중으로 보냈다.

태후는 몰래 그와 정을 통하면서 몹시 그를 사랑하였다. 태후는 임신하게 되자 비밀이 탄로날까 두려워 거짓으로 점쟁이에게 점을 치게 한 후 “태후가 거처하는 궁을 함양에서 옛 수도였던 옹(雍) 땅으로 옮겨 살아야 한다.”고 말하게 하여 드디어 옹 땅으로 이사하였다.

노애는 항상 태후를 따라다녔으며 옹 땅에서 두 아들을 낳았다. 이 추문은 드디어 시황제 9년(기원전 238)에 드러나고 말았다. 노애는 사실 환자가 아니며 항상 태후와 정을 통하여 두 아들을 낳아 모두 숨겨두고 태후와 모의하여 말하기를 “왕이 죽으면 내 아들로 후계자를 삼자.”고 한다고 고발하는 자가 있었다.

진왕은 노애를 형리(刑吏)에게 넘겨 심문하게 한 결과 그의 전모는 백일하에 드러났다. 노애가 환관이 아니라는 사실은 그의 신체를 검사한 결과 뚜렷이 밝혀졌고 여불위와도 관련이 있다는 사실까지도 밝혀졌다.

노애의 삼족을 멸하고 그의 사인들도 모두 가산을 몰수하고 촉(蜀) 땅으로 내쫓겼다.

이제 나머지 문제는 여불위를 어떻게 처벌하느냐가 큰 관심거리였다. 시황제의 당초 목적은 노애의 사건을 계기로 여불위를 숙청하려는 의도가 짙었던 것 같다. 21살의 젊은 왕에게 여불위는 매우 거추장스러운 존재임에 틀림없었다.

여불위가 시황제의 생부라는 소문이 사실무근이라고 치더라도 그가 시황제의 큰 은인임에는 틀림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시황제로선 별로 탐탁치 않은 존재였다. 의욕적인 군주일수록 자기를 견제하는 유력한 신하의 존재가 눈엣가시처럼 여겨지는 것이다. 그러나 여불위가 진나라 유일의 일등공신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기 때문에 노애처럼 반란을 이유로 숙청할 수는 없었다. 그래도 대담한 시황제는 여불위를 참형에 처하려 하였으나 3천 명이나 되는 빈객 가운데 유능한 변사들이 적극적으로 여불위를 변호하였기 때문에 왕은 차마 처단하지 못하였다.

노애의 사건이 있은 지 1년 후인 시황제 10년(기원전 237)에 여불위를 상국의 직에서 파면하고 그의 봉지인 하남·낙양으로 떠나가라는 처분이 내려졌다.

그로부터 1년 남짓하여 제후들의 빈객과 사자들이 끊임없이 여불위를 방문하며 왕래가 끊이지 않자 시황제는 여불위가 혹시 반란을 일으킬까 두려워 촉 땅으로 옮겨가서 살라는 전지를 내렸다.

“그대가 진나라에 무슨 공이 있기에 그대를 하남에 봉하고 10만 호를 식읍으로 주었단 말인가? 그대가 진나라와 무슨 친족 관계가 있기에 중보(仲父)라고 일컫는가? 그대의 가속과 함께 촉에 옮겨 있으라.”

여불위가 곰곰히 생각하니 진왕이 날이 갈수록 자신의 지위를 점점 약화시키는 것은 장차 자기를 참형에 처하려는 것 같았다. 그리하여 그는 스스로 음독자살하였다. 이것이 시황제 12년(기원전 235)의 일로서 노애 사건이 있은 지 3년 후의 일이다.

시황제 19년에 태후가 죽자 시호를 제태후(帝太后)라 하고 장양왕과 합장하였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김희영 집필자 소개

서울에서 태어나 한문사숙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충남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저서로 《이야기 일본사》, 《이야기 중국사》가 있다.

출처

이야기 중국사1
이야기 중국사1 | 저자김희영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중국 고대부터 전한 시대까지의 역사를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함께 이야기 식으로 풀어 썼다. 엄청난 인구와 광대한 국토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이야말로 진정한 중국의 힘이며,..펼쳐보기

전체목차
전체목차
TOP으로 이동


[Daum백과] 여불위이야기 중국사1, 김희영, 청아출판사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