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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1 춘추전국시대
춘추시대 패권 다툼과 병합의 근원
오나라와 월나라가 중원의 동남부에서 자웅을 겨루고 있을 때 중원에서 각 제후국 사이의 싸움은 소강 상태로 들어가고 대신 제후국 내부에서 경(卿)과 대부들간의 싸움이 치열해졌다. 그중에서도 특히 제나라·진(晋)나라·노나라에서는 치열한 내분이 계속되었다.
제나라는 원래 강태공을 봉한 나라로 춘추 시대 초기에는 여러 제후 나라 가운데 패자의 자리를 지켜왔으나, 중기에 들어서면서 쇠퇴하기 시작하더니 후기에 이르러서는 붕괴 직전에 이르고 있었다.
제나라의 재상 안영(晏嬰)이 당시 제나라의 정치 정세에 대해 말하기를 “머지 않아 제나라는 망한다.”라고 평한 일이 있었다. 당시 제나라 왕실 창고에는 피륙과 비단·곡식이 잔뜩 쌓인 채 썩어서 벌레가 득실거릴 정도였는데 백성의 생활은 말이 아니어서 굶어 죽는 자가 길을 메울 정도였다. 이러한 썩은 정치를 바로잡아 개혁하자고 주장하는 사람은 모두 중형에 처해지니 백성들은 도탄에 빠져 헤어날 길이 없었다.
제나라의 대부 전씨는 백성들의 이러한 사정을 충분히 이해하는 인물로 새로운 정치를 해야겠다고 다짐했다. 그가 가난한 사람에게 식량을 꾸어줄 때는 큰 말로 주고 그것을 받아들일 때나 세금을 거둘 때는 작은 말로 받았다. 또 천재지변이나 흉년이 든 해에는 기아에 허덕이는 백성들을 구제하는 정책을 폈다. 이러한 소문을 들은 제나라 백성들은 다투어 전씨한테 몰려드니 수십 년 사이에 막강한 세력으로 자랐다. 전씨는 세력이 차츰 강대해지자 국씨(國氏)·고씨(高氏) 등의 유력한 호족을 멸망시키거나 병탄하여 그 세력은 점점 강력해졌다.
기원전 475년 전성자(田成子)는 제나라의 나머지 구세력을 모두 소탕하는 한편 제나라 군주를 제쳐놓고 직접 여러 제후의 나라와 친교를 맺어 그들로부터 지지를 얻게 되었다.
이렇게 하여 신흥 지주 계급을 대표하는 전씨는 마침내 제나라의 군주를 국외로 추방하고 스스로 정권을 장악하였다. 이로써 사실상 제나라는 전씨의 나라가 되었다.
전성자가 제나라의 구세력을 완전히 제거한 기원전 475년은 주나라 원왕(元王) 원년(元年)에 해당된다.
중국 역사상 이 해는 춘추 시대와 전국 시대를 구분하는 해일 뿐더러 중국의 노예제가 무너지고 봉건제가 시작되는 해이기도 하다.
제나라에서 일어난 이러한 사태는 일찍이 진(晋)나라에서도 일어나고 있었다. 진나라 내부에 새로운 봉건제의 세력을 대표하는 한(韓)·위(魏)·조(趙)의 세 사람은 오랫동안의 투쟁을 거쳐 낡은 노예제의 세력을 몰아내고 마침내는 진(晋)나라 왕실의 영지를 나누어 한·위·조의 세 나라를 세우기에 이른 것이다.
이것이 역사상 진(晋)의 삼가분할(三家分割)로서 이 해가 기원전 403년에 해당한다. 이 해를 춘추 시대와 전국 시대를 구분하는 해로 정한 역사서도 있다.
제나라·진나라에 이어서 노나라에서도 이 같은 사태가 발생하였다. 노나라는 기원전 594년에 토지의 사유제를 인정하고 대신 그 토지에서 수확한 일부를 조세로 거두어들이는 이른바 ‘초세묘(初稅畝)’를 실시하였다. 이것은 정전제(井田制)와 공전제(公田制)가 완전 해체되고 토지에 대한 사유제가 정식으로 인정된 것이며, 조세의 부역제가 지대(地代)의 물납제로 바뀐 사실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러나 봉건제가 노나라에서 성립하기까지에는 거의 백 년 이상이나 걸리는 투쟁을 겪어야 했다.
노나라에서는 새로운 세력을 대표하는 계씨(季氏)가 정권을 장악하기에 이르렀다.
제·진·노에서 일어나기 시작한 봉건제는 중원을 휩쓸어 남쪽의 초나라, 북쪽의 연나라, 서쪽의 진(秦)나라에까지 파급되어 중국 대지에 깊숙이 뿌리박혔던 노예제의 얼음덩이를 차츰 녹이고 ‘백가쟁명(百家爭鳴)’ 시대의 현란한 문화가 대지를 적시게 되었다.
춘추 300년의 역사를 조감(鳥瞰)하면 천자의 권위가 떨어지자 제후의 권위가 올라가고, 제후의 권위가 떨어지자 경·대부들의 권위가 올라가고, 경·대부들의 권위가 떨어지자 그 가신들이 일어나 임금을 살해하고 국정을 농락하는 현상을 보이고 있었다. 국가의 흥망과 정권의 교체, 그리고 다음에서 다음으로 흡사 릴레이 경주처럼 이어지는 패자의 등장과 퇴장 등 주마등처럼 눈을 어지럽히고 혼란시키는 역사였다.
그러면 왜 이러한 사태가 전개되었을까? 그 근원을 따져보면 그것은 ‘철(鐵)’이었다.
춘추 시대 선진 문화를 자랑하던 대부분의 지역에서 철기(鐵器)의 보급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최근 호남성의 장사(長沙)에서 춘추 시대 말기의 것으로 보이는 철기가 발견되었을 뿐 아니라 강철로 만든 칼까지 출토되고 있다. 이 같은 사실은 당시의 제철 기술이 이미 상당한 수준에 이르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새로운 생산도구의 사용은 생산력의 증대를 가져왔고 여기에 알맞은 생산 체제를 형성하게 되었다. 따라서 새로운 생산 체제와 구체제 간의 투쟁이 일어나고 이러한 현상은 다시 빈번한 병탄과 합병·전쟁을 가져오게 되었다.
노나라의 역사책 《춘추》에 의하면 242년간 일어난 전쟁의 횟수는 무려 483회로, 거듭된 전쟁은 백성들에게 크나큰 재난을 안겨주었다. 이 때문에 후세의 많은 역사가들은 “춘추 시대에는 정의의 전쟁이 없었다.”고 평한다.
그렇다고 하지만 중국이 여러 나라가 난립하는 상태에서 통일의 시대로 향하는 역사적 대전환의 길은 이 같은 전쟁과 병탄·합병에 의하여 그 실마리가 열리게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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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춘추시대 패권 다툼과 병합의 근원 – 이야기 중국사1, 김희영,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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