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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1 진나라의 흥망
진나라 중앙 집권과 군현제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기원전 221년은 중국 역사상 매우 중요한 해이다. 주나라 평왕이 섬서성의 호경에서 하남성의 낙양으로 수도를 옮긴 것이 기원전 770년의 일이고, 이 해로부터 기원전 221년까지 550년간 주왕조는 시종 쇠퇴의 길을 걸었고 각지에는 제후들이 할거하여 각 나라 사이의 패권 다툼은 쉴 날이 없었다. 이러한 격동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고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것은 나이 39세의 젊은 진의 시황제였다. 물론 이 같은 기적적인 위업은 결코 우연히 이룩된 것은 아니었다.
진의 효공은 기원전 356년 상앙을 등용하여 법질서의 개혁을 단행하고 귀족 계급의 특권을 일부 폐지하여 군주권의 강화를 도모하였다. 또한 토지 매매의 자유화, 황무지 개간의 장려, 소농경제(小農經濟)의 보호 등 일련의 경제 정책을 개혁하였으며 엄격한 법질서의 확립으로 사회는 안정되고 산업이 발달하였다.
전국 시대 후기에 이르러 진나라 영토는 전국의 3분의 1에 불과하였으나 그 경제력은 전국의 60퍼센트를 차지하는 큰 부를 이룩하였다. 이 같은 눈부신 경제 발전에 힘입어 진나라는 일찍부터 전국 칠웅 가운데 가장 강국으로 두각을 나타내면서 천하통일의 기초를 굳게 다져갔다.
상앙의 개혁 이후 진나라의 국력이 나날이 신장하고 있을 때 다른 여섯 나라는 개혁의 불철저함과 법제의 미비 등으로 나날이 쇠퇴해갔다. 겨우 13세의 어린 나이로 왕위에 오른 진왕 영정(嬴政)은 22세(기원전 238) 때 관례(冠禮)각주1) 를 치르고 친히 국정을 도맡았다. 중국 통일의 이상에 불타고 있던 진왕은 초인적인 식견과 기백으로 정적을 물리치고 실권을 한손에 장악하였다.
진왕이야말로 역사의 조류에 편승한 인물이었다. 그는 법가의 인물을 기용하여 국정을 보좌하게 하고 6국을 집어삼키는 전쟁을 일으켜 겨우 17년 만인 39세 때 중원의 봉건 할거에 종지부를 찍고 다시 북쪽의 흉노족을 물리쳤으며, 남쪽으로는 오령산맥을 넘는 광활한 대지에 통일된 대제국을 건설하는 공전의 대업을 완성하였다.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룩한 진왕은 스스로 그 권위와 지배적 지위를 확립하기 위하여 어느 날 군신들을 모아 놓고 말하였다.
“천하는 이미 통일되었소. 이 대업의 성취를 후세에 전하기 위해서는 이에 걸맞는 군주의 칭호가 없어서는 안 되겠소.”
대신들은 입을 모아 “우리 임금의 덕은 삼황(三皇)보다 낫고 그 공적은 오제(五帝)보다 높다.”고 칭송하였다.
열띤 의논 끝에 ‘진왕’의 칭호는 ‘황제(皇帝)’로 결정되었다. 중국 고대의 여러 성왕인 삼황 오제의 공덕을 한몸에 겸했다는 뜻이다. 그 후에 ‘시(始)’자를 위에 붙여 결국 ‘시황제(始皇帝)’로 칭하게 되었다. 그 뜻은 시황제의 아들은 2세 황제, 손자는 3세 황제로 자자손손이 전승하여 끝없이 이어지는 왕조임을 단정한다는 발상에서 나온 것이다. 또 황제의 명(命)은 ‘제(制)’, 영(令)은 ‘조(詔)’라 칭하고 시호(諡號)의 제도를 폐지하였으며 지금까지 보통 사람이 자신을 ‘짐(朕)’이라고 일컫던 것을 황제의 일인칭에 한해서만 사용하기로 하고 옥새(玉璽) 또한 황제의 도장에 한해서만 일컫기로 하였다.
이를 시행하기 위하여 시황제는 이사(李斯)에게 명하여 천하의 명옥(名玉) ‘화씨벽(和氏璧)각주2) ’에 ‘수명우천 기수영창(受命于天旣壽永昌)’이라는 여덟 자를 새긴 전국 옥새(傳國玉璽)를 만들게 하였다. 그가 시황제가 된 것은 천명이며 영원히 번영한다는 뜻을 옥새에 새긴 것이다.
그러나 이 역사의 풍운아는 얼마 후 역사의 냉엄한 조소를 받게 되었다. 진왕조는 2대째에 이르러 겨우 15년의 단명 왕조(기원전 221~206)로 그 막을 내리게 된 것이다.
시황제는 함양궁에서 문무백관들이 입을 모아 만수무강을 칭송하는 경축 분위기 속에서도 마음이 편안하지만은 않았다. 이 새로운 통일 국가를 어떻게 통치하여 굳건하게 하느냐가 시황제의 당면한 대과제였다.
이 통치 방법에 대하여 중신들의 의견은 두 갈래로 갈라졌다. 그 하나는 승상(丞相) 왕관(王綰)의 의견으로 연나라·제나라·초나라는 워낙 거리가 멀어 조정의 위엄이 미치기 어려우니 왕자를 그곳에 봉하여 통치하도록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이었다. 이에 대하여 정위(廷尉, 형벌을 맡은 관원) 이사는 전국 시대의 예를 들어 반대하였다. 전국 시대 천하가 전쟁의 와중에 휘말리게 된 것은 주나라 무왕이 그 일족과 공신들을 각지에 봉하여 그 자손의 대에 이르러 점점 소원해지면서 서로 원수처럼 싸우게 되고 주나라 천자는 이를 제지할 힘이 없었기 때문에 전쟁이 쉴 날이 없었고 결국 주나라도 멸망하게 되었으니 왕자를 봉하는 것은 부당하다는 의견이었다.
시황제는 결국 이사의 의견을 채용하여 전국을 36군(나중에 4군을 추가하여 40군)으로 나누고 군 밑에는 현을 두어 통치하는 군
현 제도를 시행하였다. 그리고 각 군현의 장관은 모두 중앙 정부에서 임명, 파견하였다. 이들은 모두 엄연한 관리의 신분으로서, 제후와는 달리 세습이 허용되지 않았으며 그 인사권을 중앙 정부가 장악하고 있어 그들의 할거 상태를 미연에 방지하도록 하였다.
중앙에는 전국 각지를 통치하는 국가 기구로서 각 방면의 정무를 관장하는 구경(九卿)을 두고 그 위에 승상(정치 담당), 태위(太尉, 군사 담당), 어사대부(御史大夫, 감찰 담당)의 삼공(三公)을 두었다.
그리하여 최종적으로 모든 군사·정치 권력을 황제 한 사람이 장악하는 중앙 집권 체제를 확립하였다. 이때부터 청나라에 이르는 2천여 년간 중국의 왕조는 끊임없이 교체되었으나 시황제가 시작한 중앙 집권 체제는 면면히 이어져 갔다.
중앙 집권의 진왕조가 발표한 최초의 정령(政令)은 각종 제도의 통일에 관한 일이었다.
우선 교통에 많은 지장을 주는 봉건 할거 시대의 유물인 관소·성채 등을 헐어 함양을 중심으로 하는 방사선 모양의 간선 도로를 만들었다. 동쪽으로는 하북·산동, 남쪽으로는 강소(江蘇)·호남, 북쪽으로는 내몽골 자치구였던 음산(陰山)에 이르는 도로망을 구축하였는데, 폭은 전국 일률적으로 50보(步), 도로 양쪽에는 10미터 간격으로 소나무를 가로수로 심었다. 이렇게 하여 전국의 군현은 사방으로 통하게 되어 할거 시대의 양상을 일변시켰다.
계속해서 문자·화폐·도량형(度量衡) 및 제도와 법률을 통일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2천만 인구의 오랜 습관에 대한 이 역사적 대개혁이 십수 년 동안에 완성되었다는 것은 중앙 집권적 신왕조의 역사적 진보성을 과시한 큰 성과라고 할 수 있다.
- 1소전체12자전
진시황의 문자 통일 정책으로 이사의 소전(小篆)을 표준체로 확정했다. 이 벽돌에는 12글자의 명문이 새겨져 있는데 “海內皆臣, 歲登成熟,道毋飢人(세상은 모두 신하이고, 세월이 거듭날수록 더욱 성숙되니, 도처에 굶는 이는 하나도 없다)”라고 쓰여 있다. 아마도 진시황의 업적을 기리는 문구라고 생각된다.
- 2태산각석-소전체
2천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에 와서는 이들 간선 도로의 자취를 거의 찾아볼 수 없으나 내몽골 자치구의 황하의 오르도스 지역 부근에는 지금도 당시의 모습을 담고 있는 유적이 두어 군데 있다.
진나라 때 국토 통일을 위해 벌인 공사 가운데 지금까지도 그 형태를 고스란히 담고 있으며 또한 그 위력을 발휘하고 있는 것은 영거(靈渠)로 불리는 운하이다. 이 운하는 기원전 214년에 건설된 전장 33킬로미터의 운하로 원래는 진착거(秦鑿渠), 또는 상계 운하(湘桂運河)라 불리던 것을 당나라 때에 영거라고 불렀다. 상계 운하라는 이름에서 알 수 있듯이 호남의 상수(湘水)와 광서의 계(桂, 이강)를 잇는 수로로 장강(長江)의 물과 주강(珠江)의 물을 연결하는 파이프 구실을 하고 있다.
시황제는 천하를 통일한 후 영남 지방(광동, 광서 일대)을 개발하기 위하여 50만의 병사와 인부를 파견하였으나 식량과 물자의 수송, 보급 문제가 큰 난관에 부딪쳤다. 기원전 219년 전국을 시찰하기 위하여 상수의 상류까지 와 있던 시황제가 이 사실을 알고 친히 수리 전문가인 사록(史祿)에게 명하여 식량과 물자를 보급할 수로를 굴착토록 하였고, 이렇게 하여 탄생한 것이 상계 운하이다.
이 수로는 산을 넘어 배가 산기슭 저쪽에 있는 강에 닿을 수 있도록 계단식으로 설계된 운하로 그로부터 2천 년 후 미국에서 만든 파나마 운하와 같이 갑문식(閘門式) 운하로 되어 있었다. 이 영거 운하의 개통으로 중국 남부와 중원 지역 간의 경제·문화 교류가 촉진됨으로써 광동·광서 지구는 눈부신 발전을 보이게 되었다. 1974년 말 광주의 건축 공사장에서 진·한(秦漢) 시대의 조선장 유지가 발견된 것으로 미루어 보아 당시의 공업이 얼마나 융성하였던가를 알 수 있다.
남쪽의 영거 운하 개발과 동시에 북쪽에는 장성을 쌓도록 명하였다. 나일 강변에 높이 솟은 피라미드가 고대 이집트 노예제 사회의 걸작이라면 중국 북쪽의 평야와 산맥을 꾸불꾸불 꼬리를 물고 달리는 만리장성이야말로 중국 고대가 낳은 위대한 기적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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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진나라 중앙 집권과 군현제 – 이야기 중국사1, 김희영,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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