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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1 전한시대
봉선과 사마천의 〈사기〉
무제는 문제·경제에 비하여 신선에 대한 관심이 많았고 제사에 대해서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이 때문에 방사 신원평(新垣平)의 무리인 이소군(李少君)·제의 소옹(少翁)·난대(欒大) 등이 자주 궁정에 출입하였다.
무제 즉위 초년에는 두태후가 눈을 번득이고 있었기 때문에 황노 사상과 거리가 먼 제사나 의식은 거행할 수가 없었다. 무제가 처음으로 옹(雍) 땅에서 오제(五帝)에게 제사 지낸 것은 두태후가 죽은 다음인 원광 2년의 일이었다.
무제는 그 후 3년마다 친히 교외에 나가 제사를 지내기로 하였으며 후토(后土)에도 제사 지냈다.
원봉 원년(기원전 110) 흉노는 이미 변방을 넘보는 일이 없어졌고 남월마저 평정되었다. 또 보정(寶鼎)이 출토되는 등 성군 시대에 나타나는 상서로운 징조가 나타나 봉선(封禪)각주1) 의 시기는 점점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봉선이란 태평성대를 이룩한 성천자가 천지신명에게 제사를 올리는 의식이다. 그러니까 천자라 해도 아무나 봉선할 수는 없었다.
봉선은 비밀리에 행해지는 의식이었다. 무제는 이 해 4월 마침내 태산(泰山)에 올라 봉선하기로 하였다. 봉선에 수행한 사람은 곽거병의 아들 곽자후(霍子侯, 곽선霍嬗) 한 사람뿐이었다. 그때 곽자후는 소년이었다. 유일한 수행자인 곽자후는 그 직후에 죽었는데 모든 것은 극비에 붙여졌다.
봉선이라는 미증유의 행사에 수행하는 것은 더 없는 영광이었다. 그래서 수행하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억울해했다. 이때 태사령(太史令)으로 있는 사마담(司馬談)은 자신의 직책상 반드시 수행인에 끼일 줄 알고 있었다.
태사령이란 천자를 따라 천자의 행동을 기록하는 직책이니 사마담으로서는 당연한 생각이었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수행원에서 제외되어 낙양에 남게 되었던 것이다. 이를 분하게 여긴 사마담은 마침내 분사하고 말았다. 이 사마담은 바로 《사기》의 저자 사마천의 아버지이다.
사마천은 《사기》의 자서 서문에서 다음과 같이 술회하여 사마담의 유언을 소개하고 있다.
이 해에 천자가 처음으로 봉선의 예를 행하였는데 태사공은 낙양에 머물러 있어서 그 일에 참여할 수가 없었다. 그러므로 분을 못이겨 죽으려 하였다. 그런데 아들 천이 때마침 사명을 마치고 돌아와서 아버지를 황하와 낙수 사이에서 뵈었다. 태사공이 천의 손을 잡고 말하기를 “이제 천자께서는 천세의 대통을 이어받아 태산에서 봉선하는 예를 행하고 있다. 내가 이에 수행하지 못함은 천명으로 돌릴 수밖에 없다. 내가 죽으면 너는 반드시 태사가 될 것이다. 태사가 되거든 내가 저술하려 했던 것을 잊지 말라. 대저 효도란 어버이를 섬김으로 시작하여 임금을 섬기고 몸을 세워 그 이름을 후세에 남기고 부모를 나타나게 함으로써 끝나는 것이다.…”
사마담이 죽은 3년 후 사마천은 태사령이 되었다. 사마천은 “내가 저술하려 했던 것을 네가 저술하라.”는 아버지의 유언에 따라 《사기》를 저술하기 시작하였다. 그 뒤 7년에 흉노 정벌에 나섰던 이릉(李陵)을 변호하다가 무제의 노여움을 사 궁형(宮刑)에 처하여지는 화를 입었다. 이릉이 흉노 정벌에 나선 경위는 다음과 같다.
천한(天漢) 2년(기원전 99) 이사 장군(貳師將軍) 이광리(李廣利)는 3만의 기병을 거느리고 주천(酒泉)에서 천산(天山)으로 출격해 우현왕(右賢王)의 흉노군과 싸워 1만여의 적을 무찔렀으나 돌아오는 길에 흉노의 대군에 포위되어 궁지에 빠졌다. 이때 맹장 조충국(趙充國)의 결사적 분전에 힘입어 겨우 포위망을 뚫고 탈출했으나 한군의 6, 7할이 전사하였으니 패전이나 마찬가지인 결과였다.
같은 무렵 기도위(騎都尉) 이릉(李陵)은 보병 5천을 거느리고 거연(居延)을 거쳐 북쪽으로 준계산(浚稽山)에 도달하였다. 이릉은 전장군 이광(李廣)의 아들이다. 이광은 일찍이 흉노와의 싸움에서 길을 잃고 늦게 도착하여 이를 심문하려 하자 칼을 빼어 자결한 용장인데 그의 조상은 진나라 때의 명장 이신(李信)이었다. 때문에 이릉은 항시 무장 출신 명문의 긍지를 가지고 있었다.
처음 무제는 이릉에게 이사 장군 이광리 휘하 보급부대의 지휘관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이릉은 그따위 후방부대보다는 일선에 나가 싸우기를 자원하였다.
무제는 “그대에게 줄 기병이 없다.”고 하자 이릉은 “보병이라도 좋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릉의 5천 명 보병부대는 준계산에서 선우의 주력부대인 3만 기병과 마주쳤다. 이릉은 성난 사자처럼 사투를 벌인 끝에 수천 명의 흉노군을 쳐죽이니 선우는 크게 놀라 일단 후퇴하려 하였다. 그때 이릉의 군후(軍侯)로 있던 관감(管敢)이 이릉군의 교위(校尉)에게 모욕당한 것을 분히 여겨 도망쳐 흉노에게 항복하고 한군의 내부 사정을 선우에게 털어놓았다.
“한군은 군사가 5천 명에 지나지 않을 뿐더러 응원부대도 없고 화살마저 다 떨어진 실정입니다.”
관감의 말을 들은 선우는 크게 기뻐하고 후퇴하려던 군사를 되돌려 한군을 맹공격하였다. 이릉은 8일간에 걸쳐 사투를 벌였으나 중과부적으로 군사의 태반을 잃고 원군마저 없었다. 이릉은 “폐하에게 보고할 면목이 없다.” 하고 마침내 흉노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이릉의 항복 소식을 들은 한나라 조정에서는 이릉을 논죄하기에 이르렀다. 처음 무제는 이릉을 이광리의 휘하에 소속시켜 그의 보급부대 지휘관으로 삼으려 했다. 무제의 이 같은 속마음은 이광리에게 공을 세울 기회를 주자는 데 있었다. 이광리는 무제가 몹시 사랑했던 이부인(李夫人)의 오빠였다. 그래서 무제는 공사를 가리지 않고 이광리에게 호의를 보였다. 그런데 이릉은 이를 거절하고 독립 보병부대를 이끌고 출전했기 때문에 무제는 이를 괘씸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군신들은 무제의 속마음을 알고 있는지라 무제의 뜻에 영합하기 위하여 모두 유죄론을 주장하였다. 이릉을 변호한 사람은 오직 한 사람, 사마천이었다. 그는 강경한 어조로 다음과 같이 이릉을 변호하였다.
“이릉은 부모에 효도하고 선비들과 사귐에 신의가 있었으며 항상 용감하여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국가의 위급한 일에 몸을 바치려 하는 것이 그의 평소 쌓아올린 바라, 국사(國士)로서의 풍도가 있었사온데 이제 한 가지 불행한 일이 있다 하여 군신들이 들고 일어나 그의 죄를 만들어내니 진실로 통탄할 일입니다. 또 이릉은 불과 5천의 보병으로 적군 깊숙이 들어가 수만의 군사를 물리치니 흉노는 사상자를 구원할 겨를이 없어 민병까지 총동원하여 함께 포위 공격하였습니다.
이릉은 8일간에 걸쳐 천 리를 전전하면서 사투를 벌여 화살은 떨어지고 길이 막히자 병졸들은 맨주먹으로 칼날을 무릅쓰고 죽기로써 싸웠으니 이처럼 사력을 다한다는 것은 비록 옛날의 명장일지라도 이릉보다 낫지 않을 것입니다. 이릉이 비록 패전했으나 그가 흉노의 예봉을 꺾은바 공로는 족히 천하에 드러날 것입니다. 그가 죽지 않고 항복한 것은 적당한 기회를 얻어 공을 세워 한나라에 보답하기 위한 것임이 분명합니다.”
사마천의 강경한 발언은 무제의 감정을 크게 상하게 하였다. 사마천의 이 말 속에는 이릉은 불과 5천의 보병으로 흉노의 주력부대와 만나 사투를 벌였는데 이광리는 3만의 기병을 거느리고도 흉노의 별동대인 우현왕과 싸워 6,7할의 군사를 잃고 목숨을 구하여 도망쳐 돌아오지 않았느냐는 이광리를 비난하는 듯한 인상마저 풍기고 있었다.
무제는 사마천이 그럴 듯한 말로 남을 속여 넘겨 이광리의 공적을 가로막고 이릉을 위하여 변명한다고 생각하여 사마천을 궁형에 처하도록 하였다. 궁형이란 거세(去勢)하는 형벌로 사대부로서는 최상의 굴욕이었다. 사마천은 이때 사대부로서의 긍지로 자결을 택해야 했는데도 삶을 계속하였다. 그도 죽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겠지만 차마 죽지 못했다.
무제가 불쾌하게 생각할 줄을 뻔히 알면서도 감히 이릉을 변호한 것은 그것이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이릉과 사마천은 같은 신하로서 서로 얼굴을 대한 일은 있었으나 그렇게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소신대로 말하여 그때문에 욕을 받는다면 죽음을 택한다는 것이 아마 사마천의 인생관이었을 것이다. 그렇지만 그는 죽어서는 안 될 일이 있었다. 아버지 사마담의 유언을 그는 아직도 다 지키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분사(憤死)하기에 앞서 그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며 말하던 아버지의 모습이 그의 뇌리에 떠올라 죽으려는 그의 마음을 호되게 꾸짖었던 것이다.
사마천이 궁형을 받은 것은 그의 나이 48세 때의 일로 2년 후 출옥하였다. 그의 출생 연대에 대해서는 《사기정의》에는 경제 중원 5년(기원전 145), 《사기색은》에는 무제 건원 6년(기원전 135)으로 되어 있다. 후자에 따른다면 38세 때 궁형을 받은 셈이 된다.
사마천은 출옥 후 중서령(中書令)의 일을 맡아보면서 《사기》의 저술에 힘썼다. 사마천이 받은 치욕의 상처는 견디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는 견디기 어려운 상처를 받은 자만이 저술에 열중할 수 있다는 마음의 자세로 임했다. 봉선의 의식에 참여하지 못했던 아버지의 굴욕과 자신이 받은 정신적 치욕과 육체적 상처를 씹으면서 사마천은 붓을 움직였다. 그가 저술한 《사기》는 본기(本紀) 12권, 표(表) 10권, 서(書) 8권, 세가(世家) 30권, 열전(列傳) 70권으로 도합 130권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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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봉선과 사마천의 〈사기〉 – 이야기 중국사1, 김희영,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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