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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1 전한시대
무고의 난
역사상 진황한무(秦皇漢武)로 일컬어지는 무제가 황제의 위에 오르게 된 것은 여자의 힘에 의해서였다. 무제의 장모이자 고모인 관도 공주(館陶公主)가 무제를 제위에 올려놓은 주역이었다. 때문에 무제는 즉위 초부터 이들 여성들에 둘러싸여 그들의 눈치를 보아야 했다. 이 여성들과 그들을 둘러싼 권력 싸움은 끊임없이 되풀이되어 마침내 무고(巫蠱)각주1) 의 난이 일어나게 되었다.
맨 처음 무고의 난은 진황후(陳皇后)를 실각시킨 사건으로 공손오(公孫敖)가 그의 아내의 무고에 연좌되어 요참(腰斬, 허리를 베어 죽임)의 형을 받은 사건이었다. 그 다음이 주안세(朱安世)의 무고 사건에 관련되어 무제의 두 딸 제읍 공주·양석 공주를 비롯하여 위황후(衛皇后)의 측근인 공손하·위군유·공손경성·위항 등이 주살된 사건이다.
이것이 이른바 제1차 무고의 난으로 위황후를 고립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당시 황태자 유거(劉據)는 위황후가 낳은 단 한 사람의 아들이었다. 무제에게는 황태자 외에도 왕부인 소생인 제왕 유굉(劉閎), 이희(李姬)의 소생 단(旦)과 서(胥), 그리고 무제가 몹시 총애했던 이부인(李夫人)의 아들 창읍왕(昌邑王), 조첩여(趙婕好) 사이에 낳은 황자 불릉(弗陵) 등이 있었다.
무제가 황태자 유거를 약간 불만족스럽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은 황실의 측근이라면 다 아는 것이었다. 무제가 불만족스럽게 생각하는 이유는 자기를 닮지 않았다는 이유에서였을 뿐 다른 이유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주안세에 의한 무고의 옥사는 정화 원년에 일어났고 공손하 일족이 주살된 것은 그 다음해인 정화 2년의 일이었다. 같은 해 제2차 무고의 난이 일어나 마침내는 황태자까지 죽게 하는 커다란 사건으로 확대되었다.
제2차 무고의 난의 주동 인물은 강충(江充)이었다. 강충은 조나라 한단 출신으로 노래와 춤에 뛰어난 미모의 누이동생이 조왕의 태자에게 총애를 받고 있었다. 조왕은 무제의 이모형(異母兄)인 유팽조(劉彭祖)였는데, 엄격하고 정치에 열중하는 인물이었다. 이에 반하여 조왕의 태자 단(丹)은 아버지만 못하였다. 강충은 선천적으로 고자질을 잘 하는 기질이 있었던 때문인지 누이동생으로부터 들은 태자의 일을 낱낱이 조왕에게 고자질하였다. 이 소문을 듣고 크게 노한 태자 단이 강충을 체포하려 하자 강충은 장안으로 달아났다. 그러자 태자는 강충의 가족들을 모두 잡아다가 죽여버렸다.
이 소식을 들은 강충은 태자 단의 사건을 조정에 호소하였다. 조정에서는 태자의 소행을 조사한 끝에 태자를 체포하여 정위에게 넘겨 심리한 결과 사형의 논고가 내려졌다.
조왕 팽조는 완고한 인물이었다. 조나라 전국에서 용맹한 자를 뽑아 친히 흉노 토벌에 나서 사력을 다해 공을 세움으로써 태자의 죄를 속죄하고 싶다는 상서를 올렸다. 결국 흉노의 토벌은 허락되지 않았으나 태자는 사형을 면하고 폐태자한다는 처분으로 낙착되었다.
무제는 처음 강충을 보았을 때 지금까지 보지 못한 특이한 인물이라고 생각했다. 강충은 이때 무제로 하여금 자신의 인상을 잊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아주 기이한 복장을 하고 있었다. 이런 점이 무제의 마음을 끌었고 또 제후왕들의 일을 두려움 없이 고발하는 용기를 높이 평가하여 강충을 기용하기로 하였다.
강충은 자신이 왜 기용되었는지를 잘 알고 있었다. 신분의 고하를 막론하고 서슴없이 고발해야겠다는 신념으로 관도 공주나 황태자의 비위 사실까지도 두려워하지 않고 적발하였다. 어느 때 천자만이 다닐 수 있는 길을 황태자의 사자가 수레를 몰고 달린 일이 있었는데 강충은 이 사건을 적발하였다. 이를 안 황태자가 사람을 시켜 강충에게 눈감아줄 것을 부탁하였으나 강충은 듣지 않고 그대로 무제에게 보고하였다. 무제는 어떠한 권위 앞에서도 굴하지 않는 강충의 강직한 태도에 만족하고 있었다.
이 일이 있은 후 강충은 황태자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었다. 이때 무제의 나이 66세이고 황태자의 나이 38세의 장년이었다. 무제가 세상을 떠나면 황태자가 즉위할 것이고 그렇게 되면 자신에게 보복할 것이 틀림없었다. 이렇게 생각한 강충은 서둘러 무고의 난을 준비하였다. 나무 인형을 여러 개 만들어 궁중 여기저기에 묻었다. 황후의 궁전, 황태자의 거처 주변에도 여러 개 묻었다.
이때 무제는 나이가 늙어 사람을 의심하는 일이 많았고 미신에 깊이 빠져 있었다. 하루는 낮잠을 자는데 꿈속에 나무로 만든 사람 수천 명이 몽둥이를 들고 무제를 때리려 하였다. 무제가 깜짝 놀라 잠을 깼는데 그 후로 무제는 병석에 눕게 되었다.
강충은 좋은 기회라 생각하여 흉노 출신 무당 단하(檀何)를 매수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게 하였다.
“궁중에 무고의 기운이 있습니다. 이를 제거하지 않으면 큰 화를 입을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무제는 강충으로 하여금 이번 무고 사건을 치죄토록 하였다. 강충은 득의양양하였다. 후궁의 거처, 황후·황태자의 궁전 곳곳이 파헤쳐졌다. 파는 곳마다 나무 인형이 나오자 이를 지켜본 사람들은 모두 입을 벌리며 아연해했다. 특히 황태자 궁전 근처에서는 많은 인형이 나왔다. 그뿐 아니라 비단에 쓴 글이 나왔는데 이 또한 무제를 저주하는 내용이었다.
강충은 이 같은 사실을 마땅히 황상에게 아뢰어야 한다며 태자를 급히 잡으려 하였다. 태자는 어찌할 바를 모르고 있었는데 태자의 소부(少傳)가 계책을 말하였다.
“강충을 죽여 없애는 것만이 황태자께서 살아날 수 있는 길입니다.”
황태자도 곰곰이 생각하니 지금까지 강충이 한 행동으로 보아 비상 수단을 쓰지 않으면 자신의 죄를 면할 길이 없다고 판단하고 마침내 뜻을 굳혔다.
황태자는 그의 가신(家臣)으로 하여금 황제의 사자를 사칭하여 강충을 잡아오게 하였다. 강충이 황태자 앞에 연행되어 오자 황태자는 “조나라 오랑캐놈아, 전에는 네 국왕 부자를 어지럽히더니 그것도 부족하여 이번에는 내 부자를 어지럽히려 드느냐!” 하고 크게 꾸짖은 다음 강충의 목을 베게 하였다. 이것이 수만의 무죄한 생명을 빼앗은 희대의 요망한 인물 강충의 최후였다. 이 무고의 난을 날조하는 데 협력한 것은 궁중에도 무고의 기운이 있다고 말한 흉노 출신 무당 단하였는데 그도 역시 연행하여 상림원(上林苑)에서 불태워 죽였다.
이때 무제는 감천궁(甘泉宮)에 있었다. 감천궁은 진의 시황제가 함양 서북쪽 감천산에 지은 별궁이었는데 무제가 이것을 확장하여 개축하였다. 태산에서 봉선(封禪)각주2) 한 다음해(기원전 109) 무제는 감천궁에 거대한 통천대(通天臺)를 세웠다. 그 이름과 같이 하늘에 닿을 듯한 높은 누대로 지상에서의 거리가 1백여 장(丈)이나 되어 비구름이 감돌았고 대 위에는 승로반(承露盤)을 만들어 구름 위의 이슬을 받게 하였다. 구름 위의 이슬이란 신선의 약이라 하여 무제가 복용하였다.
한나라 때의 장(丈)은 지금의 2.25미터였으니 1백 장이라면 2백 미터가 넘는 셈이다. 당시의 건축 기술로 과연 이런 건물이 세워졌을지 의문이다. 《자치통감(資治通鑑)》 주석에 인용된 ‘한구의(漢舊儀)’에는 통천대의 높이가 50장이고 장안에서의 거리가 2백 리인데 통천대에서 장안성을 바라볼 수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후자의 기록이 더 신빙성이 있어 보인다.
강충의 목을 벤 황태자는 백관들에게 다음과 같이 고하였다.
“황상께서는 지금 감천궁에서 병으로 고생하고 계시다. 의심컨대 무슨 변고가 있어 간사한 무리가 반란을 일으킬 기미가 보인다.”
이렇게 선포한 황태자는 장안에 갇혀 있는 죄수들을 석방하고 북군의 영문 앞에 이르러 북군의 사자 임안(任安)을 불러 부절(符節)을 주고 북군을 출동시키도록 명하였다.
임안은 부절을 받고 북군의 영문에 들어가자 문을 굳게 닫고 나오지 아니했다. 황태자는 하는 수 없이 시민들을 끌어내어 장락궁 서문 근처에서 승상의 군대와 5일에 걸쳐 대전한 결과 수많은 사상자를 내었다.
감천궁에서 장안에 변이 일어났다는 보고를 받은 무제는 재빨리 명령을 내렸다.
“수레바퀴로 방색을 설치하라. 칼로 싸우면 병졸과 백성들이 많이 상할 것이니 칼로 싸우는 일이 없도록 하라. 성문을 굳게 닫아 반란의 무리들이 달아나지 못하게 하라.”
당시의 승상은 유굴리였는데 그는 승상의 인수를 잃어버릴 정도로 당황하였다. 반면에 무제는 반란의 진압을 명령하면서도 전투의 확대를 막는 조치를 취하는 등 자신만만하였다. 감천궁에서 앓고 있다던 무제가 장안성 서쪽 건장궁(建章宮)에 모습을 나타내자 이 소문을 들은 황태자의 민병들은 도망하기에 바빴고 점점 패색이 짙어져 갔다.
황태자는 장락궁 남쪽에 있는 두문(杜門)을 나와 도망쳤다. 이때 두문은 사직(司直) 전인(田仁)이 지키고 있었는데 전인은 부자간의 싸움이기 때문에 눈치껏 해야겠다고 판단하여 성문을 굳게 지키지 않았거나 도망가게 내버려 두었던 모양이었다.
황태자가 도망쳤다는 사실을 안 승상은 전인의 책임을 물어 그를 목베려 하였다. 그러자 어사대부 경승지(景勝之)가 이를 만류하였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무제는 격노하였다.
“모반한 자를 도망치게 한 관리를 승상이 참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거늘 어사대부는 어째서 그것을 만류하였느냐.”
무제가 크게 문책하자, 어사대부 경승지는 황공한 나머지 자살하고 말았다.
황태자 유거는 동쪽으로 도망가 호현 천구리(泉鳩里)에 은신처를 마련하였다. 의협심이 많은 신발 장수가 황태자를 숨겨주고 식사를 제공하였다. 그러나 몹시 가난하여 호화롭게 자란 황태자로선 숙식의 고통을 견딜 수가 없었다. 호현에는 황태자와 안면이 있는 부자가 살고 있어 비밀리에 연락을 취하다가 은신처가 발각되고 말았다.
호현의 병졸과 관리들이 황태자의 은신처를 포위하자 체념한 황태자는 목을 매었다. 장부창(張富昌)이라는 병졸이 문을 박차고 들어가 신안현 소속 아전 이수(李壽)와 함께 황태자를 안아 일으키고 목을 찔러 절명시켰다. 신발 장수는 포위 병졸과 싸우다 장렬한 최후를 마쳤고 황태자의 두 아들도 죽임을 당하였다.
강보에 싸여 있던 황태자의 손자만은 생명을 부지하여 옥에 갇혀 여죄수의 젖을 먹고 성장하였다.
38세에 죽은 황태자에게 손자가 있었다는 것이 현대에서는 이상하게 생각되지만 황태자는 15세 때 결혼하였으므로 손자가 있었다는 것은 조금도 의심할 여지가 없다.
황태자가 7월 임오일(壬午日)에 강충을 죽이고 쿠데타를 일으켰다가 8월 신해일(辛亥日)에 호현에서 죽기까지는 꼭 29일이었다.
무제는 신상필벌을 원칙으로 하는 황제였다. 황태자를 도망치게 한 전인과 북군의 영문 앞에서 태자로부터 북군 출동의 부절을 받은 임안 등이 모두 요참의 형에 처해졌다. 임안은 부절을 받기는 했으나 군대를 동원하지는 않았는데, 일단 부절을 받아놓고 형세가 유리한 쪽에 가담하려는 두 마음을 가졌다는 것이 참형에 처한 이유였다. 호현에서 황태자의 목에 칼질을 한 두 병졸의 포상에 대하여는 논란이 많았으나 결국 열후에 봉해졌다.
이처럼 많은 사람을 희생시킨 황태자 무고 사건은 끝났으나 그 후 황태자의 무죄를 상서하는 사람이 잇달았다. 호관현의 삼로(三老)각주3) 영호무(令狐茂)를 위시하여 고조묘의 숙위관인 전천추(田千秋) 등 꽤 지위가 높은 사람들까지 황태자의 무죄함을 주장하고 나섰다. 무제는 전천추를 불러 보니 씩씩한 장부의 기상이 넘쳐 흐르고 그의 말은 논리가 정연했다. 이에 무제는 크게 깨닫고 “부자지간의 일은 다른 사람이 말하기 어려운 일인데도 공이 그 옳고 그름을 분명히 밝혀 말하니 이것은 고조의 신령이 공으로 하여금 나를 깨우치게 함이로다.” 하고 전천추를 대홍려(大鴻臚, 외무 장관)로 삼았다.
이 무고의 난은 앞에 열거한 사람 외에도 거짓이 많았다는 사실과 강충이 날조했다는 사실이 점차 밝혀지고 있었다. 황태자는 당초 간악한 강충을 죽이는 것이 목적이었을 뿐 아버지 무제에게 반항할 의사가 없었다는 사실도 판명되었다. 무제는 이 일을 깊이 뉘우치고 황태자가 죽은 호현에 사자궁(思子宮)각주4) 을 짓고 귀래망사지대(歸來望思之臺)각주5) 라고 이름붙였다.
황태자의 무죄 사실이 밝혀지자 무제는 강충 일가의 삼족을 멸하고 강충에 협력했던 환관 소문(蘇文)을 위수의 다리 위에서 불태워 죽였다. 호현에서 황태자의 목에 칼질을 하고 열후의 자리에 올랐던 두 사람은 관직이 삭탈되고 일가족이 모두 죽임을 당하였다.
황태자의 무죄가 판명된 것은 정화 3년(기원전 90)의 후반이었다. 이 해의 전반에 무고의 난의 여파(餘波)와 같은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에 관련되어 주살된 사람은 승상 유굴리였다. 유굴리는 무제의 이모형(異母兄) 중산왕 유승(劉勝)의 아들이었다. 유승은 철저한 향락주의자로 무려 120명에 이르는 자식을 두었는데 유굴리는 그중의 한 사람이니 무제의 조카뻘이 된다.
유굴리의 아들이 이사 장군 이광리의 딸과 결혼했으니 이광리와는 사돈지간이 된다. 그 해 3월 오원(五原)과 주천(酒泉)을 침공하여 한나라 도위를 죽인 흉노를 토벌하기 위해 이광리가 7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원정길에 올랐다.
승상 유굴리는 이광리의 출정을 위교 부근까지 전송나가 송별연을 베풀었다. 이 자리에서 이광리는 승상 유굴리에게 속삭였다.
“승상께서는 서둘러 창읍왕(昌邑王)을 태자로 세우도록 황상께 주청하십시오. 그렇게만 된다면 우리 두 사람이야 무슨 근심이 있겠습니까?”
창읍왕은 무제가 몹시 총애했던 이광리의 누이인 이부인의 아들로 그때 이부인은 죽고 없었다.
황태자 유거가 죽은 후 무제는 아직 후계자를 결정하지 못하고 있었다. 나이로 따지자면 연왕 유단의 차례였으나 무제의 마음에 차지 않았고 유단의 동생 유서도 마찬가지였다.
태시 3년(기원전 94) 후궁인 조첩여가 황자 불릉을 낳았다. 그때 무제의 나이 63세였다. 불릉은 임신한 지 14개월 만에 출생하였다. 고대(古代) 성군으로 일컬어지던 요임금이 임신한 지 14개월 만에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어 무제는 이 전설에 따라 불릉이 태어난 궁전의 문 이름을 요모문(堯母門)이라 고쳤다. 불릉은 무제를 많이 닮아 유아 때부터 기골이 장대하였다.
조첩여에 대하여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조첩여는 태어나면서부터 두 주먹이 꼭 쥐어진 채 펴지질 않았다. 힘이 센 사람, 의원 등이 그 주먹을 펴려 하였으나 절대로 펴지질 않았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무제의 손에 닿자 스스로 펴졌다는 것이다. 이 때문에 궁중 사람들은 그녀를 권부인(拳夫人)이라고 불렀다.
유단·유서·유불릉 세 황자가 창읍왕의 경쟁자였다. 창읍왕이 황제가 되면 이광리·유굴리는 모두 외척으로서 그 지위가 튼튼해진다. 이런 소망을 이루기 위해서는 무고의 방법을 쓰지 않으면 안 될 것으로 생각한 승상 부인은 마침내 그 방법을 실천에 옮겼다. 이때는 여러 번 무고의 난이 휩쓸고 간 직후였고 무고의 대부분이 날조였다는 사실이 밝혀진 후여서 확실한 증거가 없이는 고발할 엄두도 못내는 형편이었다.
그러나 내자령(內者令)각주6) 으로 있는 곽양(郭穰)이 승상 부인의 무고 사실을 고발하였다. 그는 직책상 후궁들과의 접촉이 많아 궁내의 동정에 정보가 빨랐다.
조사 결과 사실임이 판명되어 승상 유굴리는 요참의 형에 처해지고 일가족이 몰살당하는 화를 입었다.
이광리는 당시 원정 중이었고 그의 처자는 옥에 갇히게 되었다. 이광리는 처자를 살리기 위해서는 큰 공을 세우는 방법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무모하게 흉노 땅 깊숙이 침공하여 무리한 작전을 거듭한 결과 5만의 기병을 거느린 선우에게 대패하여 마침내 흉노에게 항복하고 말았다. 옥에 갇힌 그의 가족들이 여지없이 몰살당한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어두운 이야기는 계속 이어진다.
흉노에게 항복한 이광리는 선우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고 최고의 대우를 받으면서 호화스런 생활을 하였다. 그런데 이보다 먼저 흉노에게 항복하여 흉노의 정령왕(丁靈王)이 된 위율(衛律)이 질투 끝에 거짓 술책을 써서 이광리를 죽였다.
선우의 어머니가 병석에 눕게 되자 무당이 흉노의 선대 혼령을 불러 물어본즉 선대의 선우 혼령이 나타나 말하기를 “제사를 지낼 때 너희들은 꼭 한나라 이사 장군을 제물로 바쳐라. 지금 이사 장군이 나라 안에 있는데도 어째서 제물로 바치지 않는고!”라고 노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흉노의 풍속에 무당의 탁선(託宣)각주7) 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마침내 선우는 이광리를 죽여 제물로 바쳤다. 이 같은 일은 모두 위율이 조작한 사건이었다.
무제는 재위 54년에 50년 동안이나 크고 작은 전쟁을 계속하였다. 이렇듯 많은 전쟁은 그 대부분이 역사의 전진을 촉진하는 것이었으나 몇몇 전쟁은 다분히 정의를 무시한 침략 전쟁이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이렇듯 오랜 세월에 걸친 전쟁 때문에 물자의 손실은 말할 것도 없고 인구의 손실 또한 막대하였다.
무제는 그의 만년에 이르러 이 이상 전쟁을 계속하다간 진왕조처럼 쉽게 멸망할지도 모른다고 깊이 깨닫게 되었다. 그래서 기원전 89년에 조칙을 내려 자신의 과오를 뉘우치고 전쟁을 중지하여 경제의 재건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신선의 도를 말하는 방사들을 모두 해산시켰다.
후원(後元) 2년(기원전 87) 무제는 오작궁에서 죽으니 그의 나이 71세였다. 권부인(조첩여)이 낳은 불릉이 황제 위에 오르니 이가 소제(昭帝)로 그의 나이 겨우 8세였다. 무제는 죽을 때 봉거 도위(奉車都尉) 곽광(霍光), 부마 도위(駙馬都尉) 김일제(金日磾), 태복(太僕) 상관걸(上官桀)에게 어린 소제를 보필하라는 유촉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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