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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1 고대 중국 역사의 기원
걸왕과 주지육림
걸왕은 제왕으로서 지녀야 할 덕은 닦으려 하지 않고 황음무도에 치우쳐 자신의 욕망을 채우기 위해서는 누구든지 마구 죽이고 학대하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그는 악역무도하고 탐욕스러웠으나 남다른 지력과 용기가 있었다. 그런데 이러한 지략과 용기를 송두리째 빼앗아 마침내 하나라를 망치게 한 여인이 있었으니 그녀가 바로 말희(妹喜)라는 여인이다.
걸이 한창 용력을 뽐낼 때의 일이다. 그가 막강한 병력으로 유시씨(有施氏)의 소국(小國)을 공격하자 유시씨는 도저히 대항할 힘이 없어 많은 진상품을 바치고 항복했다. 그 진상품 가운데 말희라는 여인이 끼여 있었다. 평소 용감하고 지력이 뛰어났던 걸은 말희를 보자 이성을 잃고 분별 없는 행동을 하기 시작하였다. 말희의 말이라면 무엇이든 무조건 행동에 옮기는 넋 잃은 인간이 된 것이다.
말희는 우선 궁궐을 다시 짓게 하고, 그 궁궐이 완성되자 눈부실 만큼 화려한 옷을 입은 3천 궁녀들에게 춤을 추게 하며 산해진미를 차려놓고 잔치를 계속하였다. 얼마 동안 계속되자 여기에 싫증이 난 말희가 말하였다.
“저렇게 3천 명의 여인들에게 일일이 음식을 나누어주거나 술을 따르다 보면 너무 지루하여 답답하오니 술로 연못을 만들고 고기로 숲을 만들어 춤추며 돌아가다가 못의 술을 마시고 고기숲에서 안주를 뜯어 먹도록 함이 좋겠습니다.”
“기막힌 생각이로다. 이렇게 멋진 춤놀이를 본 제왕은 일찍이 없었을 것이다.”
걸은 입을 크게 벌리고 기뻐 어찌할 줄을 몰라 했다. 드디어 주지육림(酒池肉林)의 공사가 시작되었다.
이 모양을 본 말희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말희는 처음부터 딴 생각이 있었던 것이다.
“내 사랑하는 조국이 이 자의 칼 아래 유린당하고, 나는 사랑하고 그리던 모든 사람들과 헤어져 이 자의 한낱 노리개가 되어 이곳에 붙잡혀 있다. 나를 이곳에 공물로 바치고 고향에서 부모처자와 즐겁게 살아가는 자들도 원망스럽고 이 세상 온갖 것이 다 밉살스럽기만 하다.”
그녀는 굴욕과 증오에 몸부림치면서 오로지 복수의 일념에 불타고 있었다. 말희가 복수심을 가지게 된 원인에 대해 좀 다른 설도 있다.
청나라 때 쓰인 역사(繹史)의 《죽서기년(竹書紀年)》에는 폭군으로 이름난 걸은 매우 여색(女色)을 탐하던 자로서 민산국(岷山國)을 공격했을 때 그곳에서 두 미녀를 얻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 두 미녀는 말희보다 나이도 적고 훨씬 매력적이었다. 걸이 두 미녀를 총애하자 이제까지 걸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말희는 질투에 눈이 멀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두 미녀를 미워했지만 얼마 후에는 걸왕을 증오하기에 이르러 마침내 은(殷)의 중신 이윤(伊尹)과 내통하여 국가의 기밀에 속하는 군대의 배치 상황이나 그 밖의 중대 정보를 제공하여 은나라 건국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어쨌든 주지육림의 공사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공사가 완료되자 걸왕과 말희는 작은 배에 올라 연못 둘레에서 춤추는 미녀들의 원색의 출렁임과 울리는 북소리를 신호로 무희들이 연못가로 모여들어 술을 마시고 또 북소리에 따라 안주를 먹는 모습을 매일처럼 바라보며 잔치를 벌였다. 그것뿐이 아니었다.
말희는 한 가지 일이 끝나면 또 다른 일을 꾸며 하왕조의 국력을 좀먹어 들어갔고 말희의 말에 놀아난 걸왕의 행동은 도저히 보고만 있을 수 없었다. 현신 관용봉(關龍逢)이 눈물을 흘리면서 간했지만 오히려 참수되고 말았다.
또 선관(膳官)각주1) 이윤이 간했으나 “선관 주제에 무슨 참견이냐!”며 들은 척도 안 했다. 그 후로 이윤은 하나라를 버리고 당시 은나라의 수도였던 박(亳)으로 도망쳐 탕왕(湯王)을 섬겨 은나라 창업의 일등공신이 되었다.
당시 탕왕은 덕이 많은 군장으로 그를 끝까지 후원했던 위(韋)·고(顧)·곤오(昆吾) 등 세 나라 제후들의 협력을 얻어 차례차례 국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걸왕의 횡포가 나날이 심하여 백성들의 마음이 그를 떠난 기미를 알아차린 탕왕이 걸왕 타도의 깃발을 높이 들자 하나라 백성들은 단사호장(簞食壺漿)각주2) 을 들고 나와 탕의 군사를 환영하였다. 이때 재상(宰相) 이윤도 종군하여 탕을 도왔음은 말할 것도 없다.
하의 걸왕은 명조(鳴條)의 싸움에서 대패하여 달아나다가 삼종에서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었다. 얼마 후 남소(南巢, 안휘성 수현 동남쪽)에서 죽임을 당하였다. 걸왕은 죽음에 임하여 “내가 탕을 하대(夏臺)에 가두었을 때 죽이지 못한 것이 못내 후회스럽다. 그때 그를 죽였더라면 이 지경에 이르지 않았을 것을!” 하고 한탄하였다.
이로써 4백 수십 년간 계속되었던 중국 역사상 최초의 왕조는 종말을 고하게 되었다.
하의 걸왕은 은의 주왕(紂王)과 함께 옛날부터 폭군의 대명사로 불리었다. 걸왕은 유시씨를 토벌했을 때 말희라는 미녀를 얻었고 주왕은 유소씨를 토벌했을 때 달기(妲己)라는 미녀를 얻었다. 유시와 유소, 말희와 달기의 이야기는 너무나 비슷하다.
또 왕조를 창시한 인물의 예를 보아도 일단 갇혔다가 나중에 석방된 점도 너무나 비슷하다.
걸왕은 탕을 하대에 가두었다가 석방하였고 주왕은 문왕을 유리(羑里)에 가두었다가 석방하였으니 이상 몇 가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이것은 한 가지 이야기를 무리하게 둘로 나눈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을 가지게 한다. 이 같은 사실이 하왕조의 역사가 가공(架空)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하나의 근거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하왕조가 전설상의 나라인가 또는 실제로 존재했던 나라인가에 대하여 유적이나 유물의 발굴을 통하여 지금까지 알려진 사실을 더듬어 보자.
소강(少康) 시대의 도읍지로 추정되는 용산(龍山)이라는 곳에서 묘지의 유적이 발견되기 시작한 이래 용산 문화의 유적이 속속 발견되고 있다. 서쪽으로는 섬서(陝西), 남쪽은 강소(江蘇), 북쪽은 요동 반도에 이르는 넓은 지역에서 발견된다. 이것들은 하왕조에 해당하는 것으로 추측되나, ‘하허(夏墟)’로 인정할 만한 것은 발견되지 않아 하왕조가 실제로 있었는지의 여부는 아직 증명되지 않았다.
《죽서기년(竹書紀年)》에는 하왕조의 존속 연대를 우(禹)부터 걸왕(桀王)까지 472년이라 하고, 우왕을 제외하고 16제(帝) 13대로 기록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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