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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1 전한시대
전한 왕조 초기의 혼란
진왕 자영이 한왕(유방) 유방에게 항복한 것은 한왕(유방) 원년(기원전 206)의 일이다. 이 해로부터 4백여 년 계속되는 한왕(유방)조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그러나 항우가 오강에서 최후를 마치고 한고조가 정식으로 황제의 위에 오른 것은 그로부터 4년 후인 고조 5년(기원전 202)의 일이다.
한왕(유방)조는 전반 2백여 년의 전한(前漢)과 후반 근 2백 년의 후한(後漢)을 합하여 4백여 년 계속되었다. 전한을 서한(西漢), 후한을 동한(東漢)이라고도 하는데 이것은 전한의 수도가 서쪽 장안에 있었고, 후한의 수도가 동쪽 낙양에 있었음에 연유한다.
범수의 남쪽에서 황제의 자리에 오른 고조 유방은 군신들을 이끌고 낙양으로 돌아왔다. 그 직후에 공신에 대한 봉작이 시행되었다.
제왕 한신을 초왕으로 삼아 하비에 도읍하게 하였다. 초의 의제에게 후사가 없어 의제를 생각하는 초나라 백성들의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으니 이들 백성들의 마음을 위로하기 위해서는 초나라 풍습에 익숙한 한신이 적임자라 하여 초왕으로 삼는다는 것이 그 구실이었다. 그러나 항우가 죽은 후 고조는 한시도 한신을 잊은 일이 없었다. 그만큼 한신을 경계했다는 증거이다.
건성후인 팽월은 양왕으로 봉하여 정도에 도읍하게 하고, 원래의 한왕(유방) 신(한신과는 다름)을 한왕(유방)으로 삼아 양책에 도읍하게 하고, 형산왕 오예(吳芮)를 장사왕으로 삼아 임상(臨湘, 장사현)에 도읍하게 하였다.
그리고 회남왕 경포, 연왕 장도(臧茶), 조왕 조오(趙敖) 등은 그대로였다.
한신은 봉국인 초나라에 도착하자 그에게 식사를 제공해주었던 빨래하던 아주머니에게 천 금의 사례금을 주고, 자신을 욕보이던 젊은이들 중에 바짓가랑이 밑으로 나가라고 시키던 자를 불러서 중위를 시키고 여러 장상들에게 말하였다.
“이 사람은 장사다. 나를 욕보이던 때에 내가 어찌 그를 죽일 수 없었겠는가? 그를 죽인다 해도 이름이 드러나는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참고 오늘의 공을 성취한 것이다.”
낙양에 돌아온 고조는 5월에 이르러 군대를 해산하여 각자 집으로 돌려보내고 군신들을 모아놓고 잔치를 벌였다. 그는 술잔을 높이 들고 군신들을 향해 말하였다.
“내가 천하를 차지하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이며, 항우가 천하를 잃게 된 것은 무엇 때문인지 그대들은 숨김 없이 말해보라.”
왕릉(王陵)이 조심스럽게 대답하였다. “폐하께서는 거만하여 사람을 업신여기시고 항우는 인자하여 자비를 베풀었습니다. 그러나 폐하께서는 성을 공략하여 승리한 뒤에는 그 공적이 있는 자에게 나누어주어 천하와 더불어 그 이로움을 같이 하셨습니다. 항우는 그렇지가 않았습니다. 어진 자와 능력 있는 사람을 질투하고 의심하며 공이 있는 사람에게 차마 땅을 나누어주지 못하고 그 공을 모두 자기의 것으로 하였습니다. 이것이 천하를 잃은 까닭이라 생각하옵니다.”
유방은 술을 한 잔 쭉 마시고 나서 말했다.
“그대는 아직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고 있군! 군진의 장막 속에서 계책을 세워 천리 밖의 승패를 산가지각주1) 하나로 판가름 짓는 일은 내가 장량만 못하고, 국가를 다스리고 백성들을 위무하며 보급을 원활히 하는 일은 내가 소하만 못하고, 백만 대군을 거느려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공략하면 반드시 빼앗는 일은 내가 한신만 못하오. 이 세 사람은 모두가 인걸이야. 나는 이들 인걸을 잘 썼기 때문에 천하를 차지할 수 있었던 것이고, 항우에게는 홀로 범증 한 사람뿐이었는데 이 사람마저도 제대로 쓰지 못했기 때문에 천하를 잃게 된 걸세.”
군신들은 모두 탄복하였다.
이때 제나라의 전횡(田橫)은 죽임을 당할 것이 두려워 그의 무리 5백여 명과 함께 아주 멀리 떨어진 섬에 들어가서 살고 있었다. 전횡이 죽임을 당할까 두려워한 것은 일찍이 제왕이 죽자 그의 아들 전광이 제왕이 되고 전횡이 전광을 도와 정승으로 있었다. 한신이 제나라를 쳐 제왕 전광을 사로잡자 전횡은 역이기를 삶아 죽이고 흩어진 군사를 모아 스스로 제왕이 되어 관영과 싸워 패하고 팽월에게 귀순하였다. 그 후 팽월이 양왕이 되니 전횡은 한고조가 혹시 참형에 처하지 않을까 두려워하였다.
한고조가 듣고 생각하기를 “전횡의 형제가 처음 제나라를 평정했을 때 제나라 어진 사람들이 많이 따랐다. 지금 그들이 바다 가운데 있으니 불러들이지 않으면 뒤에 난을 일으킬지도 모르겠다.” 하고 곧 사자를 보내어 전횡의 죄를 용서하고 그를 불러오게 하였다.
전횡은 이를 사절하여 말하였다.
“신은 폐하의 사자 역생을 삶아 죽였습니다. 지금 그의 아우 역상이 한나라 장군으로 있다 하오니 신은 두려워 감히 조서를 받들지 못하겠습니다. 그저 서인이 되어 섬을 지키고 살기가 소원입니다.”
한고조는 역상에게 조서를 내려 전횡이 올 경우 그를 수행하는 사람들에게 조금도 해를 입히지 말라고 명하고 다시 전횡에게 사자를 보내어 “전횡이 오면 큰 자는 왕으로 봉할 것이고 작은 자는 후로 삼겠다. 그러나 오지 않으면 군대를 동원하여 목을 벨 것이다.” 하였다.
이에 전횡은 그의 객인 두 사람과 함께 낙양으로 향하여 오다가 낙양을 30리 앞둔 시향의 역에 이르러 사자에게 말하였다.
“남의 신하된 자 천자를 알현하는 데 있어 마땅히 몸을 씻어야 할 것입니다.”
그곳에서 유숙하게 되자 전횡이 그의 객인에게 말하였다.
“횡은 처음에 한왕(유방)과 함께 남면하여 고(孤)라고 일컬었다. 그런데 지금 와서는 한왕(유방)은 천자가 되고 횡은 북면하여 그를 섬기게 되었으니 그 수치스러움은 이루 말할 수 없다. 또 나는 남의 형을 죽였으면서도 그의 아우와 어깨를 나란히 하여 한 임금을 섬기려고 하니 어찌 마음에 부끄럽지 않겠는가? 또한 폐하가 나를 보고자 하는 것은 한 번 나의 얼굴을 보고자 하는 것에 불과할 것이다. 지금 폐하는 낙양에 있으니 나의 머리를 베어 30리의 거리를 달려가더라도 나의 형용은 흐트러지지 않아 알아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두 객인이 그의 머리를 받들고 고조를 알현하였다.
“아, 할 수 없는 일이구나! 평민 출신으로 몸을 일으켜 형제 세 사람이 차례대로 왕이 되었으니 어찌 어질지 않겠는가!”
한왕(유방)은 눈물을 흘렸다. 그리고 두 객인을 도위로 삼고 왕자의 예로써 전횡을 장사지냈다.
장사를 지내고 나자 두 객인은 전횡의 무덤 곁에 구덩이를 파고 스스로 목을 베어 그 구덩이에 떨어지게 하여 죽었다.
고조는 이 소식을 듣고 매우 놀랐다.
“그 나머지 무리가 5백 명이나 바다 가운데 있다고 하니 그들을 모두 불러오도록 하라.” 하고 사자를 보냈다. 사자가 도착해보니 그들은 전횡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모두 자살한 후였다. 이것으로 전횡의 형제가 얼마나 선비들의 마음을 얻고 있었던가를 만천하에 보인 것이다.
한고조는 낙양이 한나라의 도읍지로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하고 길이 이곳을 수도로 삼으려 하였다. 제나라 사람 누경(婁敬)이 낙양을 지나다가 우장군을 통하여 고조에게 뵙기를 청하였다. 고조를 뵙게 되자 누경은 다음과 같이 진언하였다.
“폐하께서는 낙양에 도읍하셨으니 주나라 왕실보다 더 융성하여야 할 것이옵니다.”
“물론이지, 주나라 왕실보다 더욱 융성한 왕조가 되어야지.” 고조는 대답하였다.
누경은 한고조의 눈치를 살피면서 “낙양은 천하의 중심지입니다. 덕이 있는 제왕은 왕업을 펴기에 좋은 곳이지만, 덕이 없는 제왕은 멸망하기가 쉬운 곳입니다. 반면에 관중은 사방이 산과 강으로 둘러싸인 천연의 요새인지라 만약의 경우 백만의 무리를 능히 대적할 수 있으니 비유하여 말하건대 천하의 목을 한 손으로 잡고 한 손으로 그 등을 치는 것과 같은 요충지입니다. 한나라의 도읍지로서 이만한 곳은 없을 것입니다.”
낙양에 미련이 있던 고조는 누경의 말을 듣자 쉽게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군신들과 의논했다. 그런데 대부분의 군신들은 산동 출신이었다. 그들은 다투어 낙양의 장점을 들어 낙양을 수도로 정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고조는 장량에게 의견을 물었다. 그러자 장량은 “낙양이 비록 장점도 많으나 사면으로부터 적의 공격을 받기 쉬우니 이곳은 무력을 쓸 곳이 못됩니다. 관중은 옥야가 천 리이고 그 안쪽에는 파·촉의 땅을 가지고 있으며 삼면이 산으로 둘러싸여 천연의 요새를 이루고 있으며 병자루처럼 좁게 트인 동쪽으로는 작은 병력으로도 백만 대군을 견제할 수 있으니 이곳이야말로 금성천리(金城千里)요 천부(天府)의 땅입니다. 누경의 진언을 받아들임이 좋을 것입니다.”
장량의 판단을 믿은 고조는 즉일로 서쪽으로 옮겨 함양 근처에 새로운 수도를 정하기로 결정하였다. 이곳이 장안(長安)이며 소하가 임시로 장락궁(長樂宮)을 보수하여 궁전으로 사용하게 하고 새로 장려한 미앙궁(未央宮)을 짓기로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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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전한 왕조 초기의 혼란 – 이야기 중국사1, 김희영,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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