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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야기 중국
사1
춘추전국시대

굴원과 이소

장의가 위나라에 가서 죽은 후에도 진나라의 기본정책은 조금도 달라지지 않았다. 상앙이 추진한 전체주의 정책이 계속 추진되고 있었다.

제나라 민왕이 합종의 주역이 되고자 하여 초왕에게 친서를 보내어 유혹하자 초의 회왕은 제나라와 친교를 맺었다. 이것이 기원전 309년의 일이며 그로부터 4년 후 진나라에서는 무왕이 죽고 소왕(昭王)이 즉위하였다. 소왕은 값진 뇌물과 미녀로 초왕을 유혹하니 초왕은 제나라와 친교를 끊고 친진(親秦) 정책으로 전환하였다. 다음해(기원전 304) 회왕은 진나라의 황극(黃棘)에 나아가 맹약을 맺으니 진나라에서는 초왕의 방문을 높이 평가하여 상용(上庸)의 땅을 초나라에 베어주었다. 이로써 초나라는 진나라와의 밀월 시대(蜜月時代)로 들어갔으나 이것은 제나라를 배반하는 행위였다.

제나라는 한·위와 연합하여 초나라를 공격하였다. 공격의 구실은 합종의 맹약을 위반했다는 것이었다. 초의 회왕은 부득이 친교국인 진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였다.

진나라와 제나라 사이를 자기 입맞에 맞게 간에 붙었다 쓸개에 붙었다 하는 초나라를 진나라로선 전적으로 믿을 수가 없었다. 언제 또 진나라를 배반할지 몰라 진나라에서는 초나라 태자를 인질로 하고 원군을 보내기로 결정하였다. 진나라에서 원군이 출동하자 제나라·한나라·위나라의 3국 군대는 철수하였다.

그런데 회왕 27년(기원전 302)에 진나라에 인질로 가 있던 초나라 태자가 사사로이 진나라 대신과 싸움을 벌여 그를 죽이고 도망해 초나라로 돌아온 사건이 벌어졌다. 이로써 진나라와 초나라의 친교가 끊기고 다음해 진나라는 제나라·한나라·위나라의 3국과 연합하여 초나라를 공격하였다. 초나라는 구원을 청할 나라가 하나도 없었다. 이 싸움에서 초나라 장군 당매(唐昧)는 전사하고 초나라 동쪽의 중구(重丘)가 점령당하였다. 다음해 또 진나라는 단독으로 초나라를 공격하여 장군 경결(景缺)을 죽이고 2만 명의 군사를 죽였다. 초나라의 대참패였다. 이렇게 되면 초나라는 원래의 친제(親齊) 정책으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할 수 없이 태자를 제나라에 인질로 보내어 제나라와 친교를 맺었다.

다음해 진나라는 또 군사를 일으켜 초나라를 공격하여 여덟 성을 빼앗고 초나라에 국서를 보내어 초나라의 회왕과 무관(武關)에서의 회견을 요청하였다.

초나라 회왕은 걱정이었다.

“가는 것이 좋으냐? 안 가는 것이 좋으냐?”

친제파(親齊派)인 굴원(屈原)이 말하였다.

“진나라는 호랑이 같은 나라입니다. 믿을 수 없으니 가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회왕의 아들 자란(子蘭)은 친진파였다.

“진나라와 친교를 끊어서는 안 됩니다. 진나라의 요청대로 무관에 가는 것이 좋겠습니다.”

회왕은 자란의 말을 들어 무관으로 들어갔다.

진나라는 군사를 숨겨두었다가 그의 배후의 길을 끊고 회왕을 억류하여 금중(黔中)과 무(巫)의 땅을 베어 달라고 협박하였다. 이 두 곳을 만약 진나라에 줄 경우 진나라의 파촉에서의 형세를 더욱 증대시키게 되어 초나라로선 더욱 불리하게 되는 것이었다. 초의 회왕은 현명하지는 않았으나 단순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끝까지 이를 거절하였기 때문에 억류당한 것이었다.

초나라의 왕은 진나라에 억류되고 태자는 인질로 제나라에 가 있으니 초나라로선 일찍이 없었던 큰 국난에 부닥친 것이다. 초나라 조정에서는 이런 때 진나라와 제나라가 초나라를 공격하면 완전히 멸망할지도 모른다는 우려에서 회왕의 서자로 왕위를 잇게 하는 방법까지도 생각하였다. 그러나 왕과 태자가 모두 외국에 살아 있기 때문에 그것도 불가능한 일이었고 진나라에 있는 왕을 돌아오게 하는 일 또한 어려움이 많았다. 이에 제나라에 인질로 가 있는 태자를 모셔오기로 하고 제나라에는 거짓으로 진나라에 가 있는 회왕이 죽었으니 태자를 돌려보내 달라고 요청하였다.

제나라에서는 태자를 돌려보내는 문제를 놓고 무조건 돌려 보내자는 주장과 회북(淮北)의 땅을 베어 받기로 하는 조건을 내세우자는 두 주장이 엇갈렸으나, 결국 땅을 달라는 조건을 붙일 경우 초나라에서는 다른 왕자를 세워 왕으로 삼을 가능성이 있고 이렇게 되면 제나라가 인질로 잡고 있는 태자는 허수아비에 지나지 않을 뿐 아니라 여러 제후들에게도 제나라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가져온다는 결론이 내려져 무조건 태자를 돌려보냈다. 귀국한 태자가 즉위하니 이 이가 곧 경양왕(頃襄王)이다. 초나라에서는 즉시 이 같은 사실을 진나라에 통고하였다.

이로써 진나라에 억류된 회왕은 완전히 허수아비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었다.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진나라는 군사를 동원하여 무관에서 초나라를 공격하여 5만 명을 참수(斬首)하는 큰 전과를 올리고 15성을 빼앗았다.

딱하게 된 것은 회왕의 신세였다. 고국에서는 태자가 이미 즉위하였으니 회왕은 이제 왕이 아니었다. 고심 끝에 진나라에서 탈출하여 조나라로 갔으나 조나라에서는 진나라를 두려워하여 회왕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이때 조나라는 무령왕(武靈王)이 퇴위하고 그의 아들 혜왕이 즉위한 때였다. 회왕은 하는 수 없이 위나라로 도망치려 하였으나 그의 뒤를 쫓는 진나라 군사에게 잡혀 도로 진나라로 연행되었다. 회왕은 망향의 한을 안은 채 3년 동안 고생하다가 끝내 진나라에서 죽고 말았다. 회왕의 유해가 초나라에 돌아오자 초나라 백성들은 회왕의 비극적인 죽음을 슬퍼하여 진나라에 대한 적개심이 불꽃처럼 타올랐으나 초나라의 국력은 이제 과거처럼 회복되기가 어려웠다.

경양왕이 즉위하자 그는 아우 자란(子蘭)으로 영윤(令尹)을 삼았다. 초나라 사람들은 일찍이 자란이 회왕을 권하여 진나라 무관에 나가게 하여 돌아오지 못하게 하였다고 책망하였으며 굴원 또한 자란을 미워하였다. 영윤 자란은 굴원이 자기를 미워한다는 말을 듣고 굴원과 사이가 나쁜 상관대부 근상으로 하여금 경양왕에게 굴원을 참소하게 하였다. 경양왕은 크게 노하여 굴원을 먼 곳으로 추방하였다.

일찍이 굴원은 회왕 때 좌도(左徒) 벼슬에 있었다. 견문이 넓고 기억력이 뛰어났으며 역대의 치란(治亂)에 밝아 회왕으로부터 신임이 두터웠다. 굴원이 회왕의 명을 받아 초나라를 부강하게 하기 위한 헌령(憲令)을 기초하고 있었는데 굴원과 왕의 은총을 다투던 상관대부 근상이 그걸 가로채어 자신의 공적으로 삼으려 하였으나 굴원은 이를 거절하였다.

근상은 이에 굴원을 회왕에게 참소하였다.

“굴원은 학식을 빙자하여 믿고 대왕을 업신여기어 무엇인가 딴 마음을 품고 있는 듯합니다.”

현명치 못한 회왕은 근상의 말을 믿고 굴원을 멀리하였다.

굴원은 왕의 듣고 보는 것이 총명하지 않고 참소와 아첨이 임금의 밝음을 가로막는 것을 근심하고 비통해하면서 장편의 시를 지어 그의 울분을 토로하니 이 시가 유명한 굴원의 〈이소(離騷)〉이다.

이 이소라는 주제의 뜻에 대하여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후한 시대 반고(班固)의 설로, ‘이(離)’는 ‘이(罹)’와 같은 뜻으로 병이나 재앙에 걸린다는 뜻이고 ‘소(騷)’는 근심을 뜻하는 것이므로 ‘근심을 만난다.’는 뜻이라는 견해이다. 또 하나는 후한 때 왕일(王逸)의 견해로 ‘이(離)’는 이별의 뜻이므로 ‘이별을 근심한다.’라는 뜻이라는 설인데 앞의 설이 유력한 것으로 인정되고 있다.

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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굴원은 제나라와 연합하여 진나라에 대항해야 한다고 주장한 친제파였다. 당시 초나라는 굴원의 반대파인 친진파가 득세하고 있었는데 이들 친진 세력들은 진나라의 장의가 6백 리의 땅을 베어주겠다는 미끼에 속아 제나라와 친교를 끊었다. 그 후 끊임없이 진나라의 침략을 받게 되고 초나라가 고립무원의 지경에 이르게 되자 회왕은 굴원을 불러들여 다시 등용하려고 하였다. 굴원은 오직 조국 초나라에 공헌하겠다는 일념으로 수도인 영(郢)으로 돌아왔으나 재차 근상의 참소를 입어 강남 지방으로 추방되는 비운에 처해졌다.

굴원은 상수(湘水)가를 방황하면서 웅혼(雄渾)의 시 〈천문(天問)〉을 써냈다. 172가지 문제를 제기하여 비통한 울부짖음으로 천지(天地)에 의문을 호소하였다.

그는 여기서 우주에 관한 선인(先人)들의 설명에 의문을 품고 “도대체 태고의 시작에 대하여는 누가 그렇게 말하여 전승되는 것일까? 그때는 아직 천지가 형성되지 않은 혼돈한 상태였을 것인데 무엇에 근거를 두고 그렇게 말했는가?”라고 묻고 있다.

또한 그는 인류의 기원에 대한 전설에도 의문을 품고 “여와씨(女媧氏)가 진흙을 빚어 많은 남성과 여성을 만들었다고 전하고 있는데 그렇다면 여와씨 자신의 이상야릇한 형상은 누가 만들어냈단 말인가?”라고 묻고 있다.

굴원은 또 일련의 역사의 공죄(功罪)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요컨대 자신의 뜻을 세상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아 그의 뜻을 펴지 못하고 불우한 방랑의 신세가 됨으로 인하여 모든 전통적인 사고 방식을 긍정보다는 먼저 의심하는 눈으로 관찰하여 사회의 본질을 통찰하고 자연계를 판단하는 자세로 미래를 모색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그는 시인으로서의 소질과 풍격(風格)을 갖췄을 뿐 아니라 사상가·정치가로서도 훌륭한 품격을 갖춘 사람이었다.

굴원이 상수(湘水)가에 이르러 머리털을 풀어헤치고 못가로 다니며 침음(沈吟)하니 그의 모습은 아주 파리하고 수척했다.

어부가 그를 보고 물었다.

“당신은 삼려대부(三閭大夫)가 아닙니까? 무슨 까닭으로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까?”

굴원이 대답하였다.

“온 세상이 혼탁(混濁)하되 나 홀로 맑으며 많은 사람들이 취하였으되 나 홀로 깨었소. 내 이런 까닭으로 쫓겨나 이 지경이 되었소.”

굴원은 이런 가운데서도 나라에 대한 걱정을 한시도 잊은 일이 없었다.

경양왕 19년(기원전 280) 초나라는 지금까지의 친진 정책에서 180도 전환하여 반진 정책을 펴 여러 제후의 나라에 사자를 보내어 반진동맹을 재건하려 하였다. 그러나 이를 눈치챈 진나라는 초나라를 공격하여 한북(漢北)과 상용(上庸)의 땅을 빼앗고 다음해에는 또 서릉(西陵)을 빼앗았다.

경양왕 27년(기원전 278)에는 진나라 장수 백기(白起)가 드디어 초나라의 수도 영(郢)을 함락하고 선왕의 무덤인 이릉(夷陵)을 불태워버리니 경양왕은 진성(陳城, 하남성)으로 후퇴하였고 다음해에는 다시 초나라의 무(巫)와 금중(黔中)을 점령하니 이곳은 초나라의 운명이 걸려 있는 곳이었다. 일찍이 회왕이 진나라에 억류당하면서까지도 끝끝내 내놓지 못하겠다고 버티던 요충지였는데 이제 진나라가 무력으로 빼앗아버린 것이다.

굴원은 이 소식을 듣고 조국의 앞날에 실망한 나머지 분연히 〈애영(哀郢)과 회사(懷沙)의 시〉를 짓고 음력 5월 5일 돌을 품고 멱라수(汨羅水, 호남성 상수의 지류)에 몸을 던져 순국(殉國)하니 이때 그의 나이 62세였다.

굴원의 사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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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국 시인이었던 굴원은 중국 시가의 세계에서나 중국인의 생활면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중국 역대의 위대한 시인 이백(李白)과 두보(杜甫)도 예술·품격·덕성면에서 굴원의 영향을 많이 받고 있다.

호남성 도강현(湖南省桃江縣)에 있는 굴원에 얽힌 고적의 하나인 천문대 구지(天問臺舊址)는 지금까지 완전히 보존되어 있으며, 투신 자살한 멱라수가에는 그의 무덤과 사당이 세워져 있다. 굴원이 죽은 음력 5월 5일은 속칭 단오절(端午節)이라 하여 그를 추모하는 제일(祭日)로 정해져 있다. 매년 이 날이 되면 강남 지방의 사람들은 뱃머리에 용의 머리를 장식한 용선(龍船)의 경주를 성대히 벌이고 갈대잎으로 싼 송편을 멱라수 물고기에게 던져 주고 있다. 전설에 의하면 물속에 잠긴 굴원이 고기에게 뜯어먹히지 않도록 하기 위한 놀이라고 한다. 단오절에 송편을 만드는 일은 전국적으로 퍼져 지금까지 전해오고 있으며 이 같은 풍습은 중국에서뿐 아니라 멀리 일본·말레이시아 등 여러 나라에까지 전승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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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영 집필자 소개

서울에서 태어나 한문사숙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충남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저서로 《이야기 일본사》, 《이야기 중국사》가 있다.

출처

이야기 중국사1
이야기 중국사1 | 저자김희영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중국 고대부터 전한 시대까지의 역사를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함께 이야기 식으로 풀어 썼다. 엄청난 인구와 광대한 국토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이야말로 진정한 중국의 힘이며,..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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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굴원과 이소이야기 중국사1, 김희영,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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