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사1 전한시대
여운의 시대
무제가 죽은 후 전한이 멸망하기까지의 약 90년간은 무제의 여운(餘韻) 시대라 할 수 있다. 무제가 죽고 나자 궁정 내의 권력 투쟁은 여러 갈래로 갈라져 매우 복잡한 양상을 보였다. 우선 주요 갈래를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1. 제위 계승에 대한 투쟁
2. 내조 내부(內朝內部)의 주도권 쟁탈전
3. 내조와 외조(外朝)의 완전 장악
제위 계승 문제는 일단 불릉(소제)이 즉위함으로써 해결되었으나 그의 경쟁자 중의 한 사람이었던 연왕 유단이 불만을 품고 있었다. 유단은 무제의 죽은 상황, 유촉을 받은 경위 등이 밀실 안에서 극비리에 행해졌기 때문에 이를 믿을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소제 불릉이 모태 안에서 14개월 만에 태어났다는 사실에 대해서도 그는 깊은 의혹을 가지고 있었다. 14개월로 계산하지 않으면 무제의 자식으로 인정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런 엉터리 계산이 나온 것이지 사실은 무제의 아들이 아니고 무제의 유촉을 받은 곽광(霍光)의 아들일 가능성이 짙다는 이유를 내세워 군대를 일으키려 하였다.
유단은 이 같은 이유를 내세워 일거에 거사할 생각이었다. 중산왕인 유승의 증손과 제왕의 손자 유택(劉澤) 등이 이 거사에 가담하기로 되어 있었다.
그들은 수렵(狩獵)을 구실로 군사를 모아 거사일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들이 거사하는 이유를 밝힌 격문에는 “소제는 무제의 아들이 아니다. 마땅히 천하가 함께 쳐 없애야 한다.”라는 것이었다. 이 같은 내용은 민심을 동요시키는 작전으로는 매우 효과적이었지만 반면 누설될 가능성이 많았다.
청주 자사(靑州刺史)로 있는 준불의(雋不疑)가 이 음모 사실을 알고 유택을 체포하였다. 자사의 직책은 군수 등 지방관의 치적을 시찰·조사하여 황제에게 보고하는 관직이었다.
준불의는 유택이 황족임에 구애받지 않고 준엄하게 심문한 결과 연왕 유단이 이번 거사의 주모자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연왕은 황제의 지친(형)이라는 이유로 죽음을 면하고 유택 등은 주살됨으로써 연왕의 탈권 투쟁은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청주 자사인 준불의는 이 공로에 의해 경조윤(京兆尹, 서울특별시장)에 발탁되었다. 이 사건은 시원 원년(기원전 86)의 일이었다.
그로부터 4년 후에 누런 소가 끄는 수레를 탄 어떤 사나이가 미앙궁의 북문에 나타나 자칭 황태자 유거라고 하였다. 이 소문을 들은 장안성 안은 소연했고 수만의 인파가 그를 보기 위해 몰려들었다. 승상을 비롯하여 중신들 가운데 죽은 황태자를 알고 있던 자들도 누구 한 사람 입을 여는 자가 없었다. 누가 보아도 그는 황태자와 너무 닮아 그 진부를 식별하기 어려웠다. 그뿐 아니라 일찍이 호현에서 죽었다던 황태자는 가짜이고 진짜 황태자는 살아서 도망쳤다는 이야기가 항간에 떠돌고 있었기 때문에 더더욱 난처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뒤늦게 도착한 준불의는 망설이지 않고 대뜸 그 자를 포박하여 하옥시켰다. 준불의는 “먼저의 황태자는 선제로부터 죄를 얻었으니 죽지 않고 도망쳤다 해도 죄인임에 틀림이 없고, 지금 나타났다 해도 또한 죄인임에는 틀림없다.”고 단정하였다.
조사 결과 이 사나이는 죽은 황태자의 가신으로부터 황태자와 꼭 닮았다는 말을 듣고 장난삼아 한판 연극을 꾸며낸 하양(夏陽) 지방 출신의 방모(方某)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 사건이 있은 후 준불의의 명성은 조야에 떨쳤다. 그는 엄격하면서도 잔인하지 않다는 좋은 평판을 받았다. 준불의의 인격에 반한 대장군 곽광이 그의 딸을 주려고 하였으나 준불의가 한사코 거절했다는 것이다. 얼마 후 준불의는 건강상의 이유로 관직에서 사퇴하고 집에서 세상을 떠났다. 한나라를 위해서는 매우 애석한 인재를 잃은 셈이었다.
다음은 내조의 주도권 싸움에 눈을 돌려보자.
내조의 중심 인물은 무제로부터 어린 소제를 잘 보필하라는 유촉을 받은 곽광·김일제·상관걸 세 사람이었다. 그러나 소제 즉위 후 1년 반 남짓해서 김일제가 죽음으로써 두 사람의 싸움으로 압축되었다. 김일제가 살아 있을 때는 이들 두 사람 사이를 원만히 조정하여 별 탈이 없었으나 김일제가 죽은 후부터 이들 두 사람 사이에는 갈등이 일기 시작하였다. 처음에는 그다지 표면화되지 않았으나 시일이 지남에 따라 점점 눈에 띄게 나타났다.
곽광과 상관걸은 사돈지간이었다. 곽광의 딸이 상관걸의 아들 상관안과 결혼하여 딸을 낳았다. 상관걸에게는 친손녀, 곽광에게는 외손녀였다.
상관안은 자신의 딸을 황후로 책립하고자 하여 장인인 곽광과 의논하였다. 곽광은 조정 내에서 가장 발언권이 강하였기 때문에 곽광과 상관걸이 마음만 합치면 딸의 황후 책립은 실현이 가능하였다. 그러나 곽광은 “아직 그럴 나이가 아니다.”라고 말하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때 상관안의 딸은 겨우 7세의 어린 나이였다.
그런데 상관안은 곽광 이상으로 궁중에서 강한 실력을 행사하는 사람이 있음을 알았다. 소제가 즉위하면서 그를 보육하고 있는 개장 공주(蓋長公主)였다. 개장 공주는 소제의 누님으로 갑후(蓋侯) 왕충(王充)의 아내였으며 왕충은 무제의 어머니 왕태후의 오빠 왕신(王信)의 아들이었다.
개장 공주에게는 정외인(丁外人)이라는 하간 출신 남자 애인이 있었는데 그는 상관안과 친한 사이였다. 상관안은 이 정외인을 통하여 개장 공주의 힘을 빌려 시원 4년(기원전 83)에 마침내 겨우 8세의 딸을 소제의 황후로 책립시키는 데 성공했다. 그때 소제의 나이는 12세였다.
상관 일가는 이제 자기네 세상이 되었다고 좋아했으나 이것이 상관 일가를 파멸시키는 결과를 가져오리라는 것을 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상관안의 딸을 황후로 책립해 주었다는 인연으로 개장 공주와 상관의 집안은 아주 가까워졌다. 개장 공주는 연왕 단의 친누이였다. 연왕 단은 반란을 주동했다가 실패하였다. 그 후도 연왕 단은 제위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였고 개장 공주 또한 그 일에 적극 협력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얼마 후 상관걸 부자가 개장 공주의 애인 정외인을 열후에 봉하고자 하여 곽광에게 의논하였다. 그러자 곽광은 “공이 없는 자를 후(侯)에 봉하지 말라는 고조의 유훈(遺訓)이 있는데 어찌 정외인을 열후에 봉한단 말씀이오?” 하고 그들의 제의를 일축해 버렸다. 이 일로 인하여 곽광과 상관걸 부자의 대립은 더욱 격렬해지기 시작하였다.
상관걸 부자는 마침내 개장 공주와 음모를 꾸몄다. 그들의 음모 내용은 우선 연회장에 먼저 복병을 매복시키고 주연을 베풀어 곽광을 쳐 죽인 다음 소제를 폐하고 연왕을 맞아 황제로 세우고, 그 다음에는 상관안이 또 잔치를 베풀고 연왕을 청하여 역시 복병을 시켜 연왕을 죽인 다음 상관걸을 황제로 세운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 음모는 사전에 누설되어 그들 일당은 일망타진되었다.
어쨌든 이 사건으로 상관 일가는 곽광의 외손녀이자 황후인 어린 여자 한 사람만 목숨을 부지하고 나머지는 모두 주살되었다. 연왕 단도 천자의 조서를 받아 비참한 자결을 하였고 그의 부인 등 연왕의 뒤를 이어 죽은 자가 20여 명에 달했다.
이 사건과 관련 어사대부인 상홍양(桑弘羊)도 주살되었다. 상홍양은 외조(外朝)의 대표자로서 내조(內朝) 대표인 곽광과 대립하고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말할 것도 없고 정책상으로도 대립하는 일이 많았다. 이런 사정으로 상홍양은 곽광의 반대파인 상관걸 부자에게 접근했던 것이다.
상관걸 일가를 숙청하고 외조의 중심 인물인 상홍양을 제거한 곽광은 마침내 그가 바라던 한나라 국정의 정권을 손에 쥐게 되었다. 이것이 원봉(元鳳) 원년(기원전 80)의 일이고 그가 죽은 지절(地節) 2년(기원전 68)까지 곽광은 명실공히 독재자로서 그 권력을 휘둘렀다.
곽광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는 동안 소제가 21세의 젊은 나이로 죽었다. 소제는 한 사람의 아들도 없었기 때문에 후계자를 누구로 세우느냐가 당시 조정의 중대 문제였다. 가장 가까운 형제로는 오직 무제의 아들 광릉왕 유서(劉胥) 한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 유서는 무제 생존시에 가장 미움을 받았던 황자였다. 맨손으로 맹수를 때려잡을 수 있는 힘을 가진 장사였으나 성질이 거칠어 폭군이 될 가능성이 많은 인물이었다. 그 위에 연왕 단과 개장 공주와는 동복의 자매였으므로 곽광은 이런 인물을 황제로 세울 수 없었다.
결국 이광리의 누이인 이부인이 낳은 유박(劉髆)의 아들 유하(劉賀)가 창읍왕(昌邑王)으로 있었는데 그가 황제로 옹립되어 제위에 오르게 되었다. 그런데 창읍왕은 곧바로 제위를 박탈당하고 말았다.
황제 위에 오른 창읍왕은 마치 폭군을 연상할 만큼 거친 행동을 일삼았다. 길을 가다가도 부녀자를 희롱하고 소제의 영구(靈柩)가 전전(前殿)에 모셔 있는데도 북을 치며 노래를 부르고 신하들과 술을 마셨다. 그리고 호랑이 싸움을 시킨다든지 소제의 궁인들과 음란한 행동을 하는 등 차마 볼 수 없는 행동을 일삼았다.
곽광은 승상 양창, 거기 장군 장안세(張安世) 등과 의논 끝에 대사농 전연년(田延年)의 계책에 따라 창읍왕을 폐하기로 하였다. 당시의 황제 즉위식 절차상 고조묘(高祖廟)에 배알하기 전까지는 즉위식의 절차가 완전히 끝나지 않은 것으로 되었는데 이때 창읍왕은 그 절차를 아직 마치지 않은 상태에 있었다. 따라서 완전한 즉위식 절차를 마치지 않았기 때문에 소제의 미망인인 상관씨(곽광의 외손녀)는 황태후로서 창읍왕을 폐위(廢位)할 수 있다는 것이 그들이 내세운 명분이었다.
17세의 황태후는 창읍왕을 불러 “창읍왕이 너무 무도하여 황제의 위를 폐하노라.”고 선언함으로써 창읍왕은 폐위되고 말았다. 이때 황태후가 있는 미앙궁에는 창읍왕 단 한 사람만 들어갔을 뿐, 창읍왕의 가신 2백여 명은 모두 문 밖에서 제지당하였다. 거기 장군은 군대를 이끌고 이들 2백여 명을 모두 체포하여 하옥시켰다. 이들은 창읍왕이 본국에 있을 때 창읍왕의 죄과를 조정에 보고하지 않았고 그때문에 조정에서는 창읍왕의 비행을 알 수가 없었으며 또 왕을 올바로 보필하지 못하여 대악에 빠뜨렸으니 그 죄가 모두 이들 가신에게 있다 하여 죽임을 당하였다.
다만 중위 왕길(王吉)과 낭중령 공수(龔共) 두 사람만은 자주 창읍왕에게 간언을 드렸다 하여 죽음을 면했고, 창읍왕의 부(傅)였던 왕식(王式)은 시 3백 5편을 조석으로 창읍왕에게 가르쳤으니 이것은 간언을 드린 것과 같다 하여 죽음을 면하였다.
2백여 명의 창읍왕 가신들이 처형될 때 “마땅히 죽여야 할 자를 죽이지 못하였기 때문에 도리어 우리들이 화를 입는구나!” 하고 울부짖는 자가 있었다고 한다.
이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이 사건은 아마도 창읍왕 쪽에서 곽광에 대한 쿠데타 음모가 있었기 때문에 곽광이 이를 미리 탐지하고 선수를 쳤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제위에 올라도 곽광이 있는 한 창읍왕 유하는 실권을 잡을 수가 없었다. 황제의 실권을 장악하여 명실공히 한나라의 주인이 되려면 곽광을 죽여 없애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계략이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창읍왕의 쿠데타는 왜 실패하였을까? 아마도 밀고자가 있어 사전에 누설된 것인지도 모른다. 2백여 명이 죽임을 당했는데도 세 사람만은 목숨을 구했다. 살아 남은 세 사람은 자주 간언을 드렸기 때문이라고 하는데, 이 사실은 과연 누가 증명할 것인가? 의심하면 의심할수록 이 사건은 더욱 미궁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