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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야기 중국
사1
은주시대

은왕조 시대

은(殷)의 시조는 설(契)로서 그의 어머니는 유융씨(有娀氏)의 딸 간적(簡狄)이다. 간적은 어느 날 친구 세 명과 강에서 목욕을 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제비가 날아오더니 알을 떨어뜨리고 가버렸다. 간적은 무심코 그 알을 집어서 깨어 먹었는데 곧바로 잉태하여 설을 낳았다고 전해진다. 설은 우(禹)를 도와 치수 공사에도 많은 공을 세웠으며 그의 14대손 천을(天乙)이 덕이 높기로 이름 높은 은의 탕왕이다.

탕왕의 높은 덕을 실증해주는 다음과 같은 사실이 《사기》에 기록되어 있다.

어느 날 탕왕은 몇 사람의 시종만을 데리고 교외에 나갔다가 사냥꾼 한 사람을 만났다. 사냥꾼은 동서남북 사방에 빈틈없이 그물을 쳐놓고 “천지 사방에서 날아드는 새들은 모두 내 그물에 걸려라.” 하며 빌고 있었다. 이것을 본 탕왕은 그대로 두었다간 새들의 씨가 마르겠다 생각하고 세 쪽 방향에 친 그물을 걷게 한 후, “왼쪽으로 가고 싶은 놈은 왼쪽으로 날아가고, 오른쪽으로 가고 싶은 놈은 오른쪽으로 날아가라. 명령을 어기는 놈만 내 그물에 걸려라.”라고 비는 말을 고치게 하였다. 이 말을 전해 들은 제후들은 “아, 탕왕의 덕은 이미 짐승에게까지 미치게 되었구나!” 하고 감탄했다고 한다.

이렇듯 덕이 높은 탕은 명재상 이윤의 협력으로 걸왕을 몰아내고 천하만민이 축복하는 가운데 천자의 위에 올라 덕치(德治)에 힘을 기울여 왕도 정치를 실현하는 데 성공했다. 명군과 명재상의 유대 관계는 이후 중국 역사에 많이 등장하는데 탕왕과 이윤의 관계가 그 제1호에 해당한다고 하겠다.

탕왕

전설에 의하면 탕왕은 새에게 은혜를 베풀었다는 이야기가 전해져 민심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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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면 탕왕을 보좌하여 명재상으로 후세에 이름을 남긴 이윤은 어떤 사람인가?

《사기》에 따르면 이윤은 스스로 탕의 어질고 덕이 있음에 마음이 끌려 그의 신하가 되기를 바랐으나 좀처럼 만날 기회가 나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침 유신씨(有莘氏)의 딸이 탕과 결혼할 때 그녀의 잉신(媵臣)각주1) 이 되어 은에 들어가 우선 주방 일을 맡아 탕을 위해 요리 솜씨를 발휘했으며 그 후 차차 탕에게 인정을 받아 재상의 지위까지 올랐다는 것이다.

《사기》에는 또 다른 설을 소개하고 있다. 원래 이윤은 자신의 재능을 숨기고 산야에 묻혀 사는 처사였다. 탕이 그의 현명함을 알고 사람을 보내어 맞아들이려 하였으나 이윤은 쉽사리 응하지 않았다. 탕이 다섯 차례나 사신을 보내어 예를 갖추어 청한 후에야 이윤은 비로소 부름에 응하였다는 것이다.

《여씨춘추(呂氏春秋)》나 《열자(列子)》는 이윤의 출생 경위를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윤의 어머니는 이수(伊水) 가에 살고 있었다. 이윤을 잉태하고 있었는데 하루는 꿈에 신령이 나타나 “만약 이수에 절구통이 떠내려오거든 너는 그것을 보는 즉시 동쪽을 향하여 달리되 절대로 뒤를 돌아보아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튿날 이수에 나가보니 과연 절구통이 떠내려오는지라 그는 무조건 동쪽으로 달렸다. 10리쯤 달리고 나서 이제는 괜찮겠지 하고 뒤를 돌아다 보았다. 그 순간 마을은 완전히 물바다로 변했고 그녀는 속이 텅빈 한 그루 뽕나무로 변하고 말았다.

뽕을 따러 온 유신국의 여인이 뽕나무 속에 어린아이가 있는 것을 발견하였는데 이 아이가 이윤이라는 것이다.

이 이상한 아기를 유신국의 임금에게 헌상하였는데 임금은 이 아기를 궁중의 주방 책임자에게 맡아 기르도록 명하였다. 이로 인하여 이윤은 요리 솜씨가 뛰어났으며 요리 솜씨가 계기가 되어 탕왕으로부터 인정을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탕왕이 죽은 후 제위를 이을 탕왕의 장자 태정(太丁)이 이미 죽었기 때문에 그의 동생 외병(外丙)이 즉위했다. 은에서는 장자 상속제도와 형제 상속의 제도가 있었기 때문에 동생이 즉위한 것이다. 외병이 즉위한 지 2년 만에 죽었고 외병의 동생 중임(中壬)이 즉위하여 4년 만에 죽으니 태정의 아들 태갑(太甲)이 즉위했다. 태갑은 탕왕의 적손이었지만 현명하지 못하고 포악하여 조부인 탕왕의 법을 어기고 제멋대로 행동하는 일이 많았다. 이러한 태갑에 대해서 가장 걱정하는 사람은 이윤이었다.

이윤은 태갑의 행동을 바로잡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을 다 써 보았으나 조금도 나아지는 기색이 없자 즉위한 지 3년 만에 동궁(桐宮)으로 추방했다. 동궁은 탕왕의 묘소가 있는 곳으로, 그곳에 추방한 이유는 태갑이 탕왕의 감화를 받아 개과천선(改過遷善)하기를 바라는 이윤의 충정이었는지도 모른다.

태갑은 추방된 지 3년 만에 과연 전비(前非)를 뉘우치고 새로운 사람이 되었다. 이윤은 기꺼이 태갑을 황제로 맞아들여 대권을 넘겨 주었다. 황제로 복귀한 태갑이 얼마 후 죽자 그의 아들 옥정(沃丁)이 즉위하였는데 이윤이 죽은 것이 이때였다.

이윤이 죽자 은나라는 그를 조묘(祖廟)에 배향(配享)하는 파격적인 은전을 내렸다. 씨족 의식이 강했던 당시로서는 혈연 관계가 없는 사람을 조상과 같이 제사 지낸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명신과 명재상과의 관계를 초월한 보다 강력한 유대 관계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윤이 없었다면 은나라는 천자국이 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생각해 이윤을 조묘에 배향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공신을 조묘에 배향하는 일은 이윤을 선례로 하여 은나라에서는 그 후에도 종종 있었다.

옥으로 만든 인형

은허에서 출토된 옥인형으로 은나라 사람의 의복과 관식을 한 사람 형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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옥정으로부터 3대째에 태무(太戊)가 즉위했는데 이 무렵에 이르러 은의 국력이 쇠퇴하여 조공을 게을리하는 제후가 있었다. 당시의 재상 이척(伊陟)각주2) 은 국력 부흥에 힘써 은의 국력은 다시 뻗어 나갔다. 그 후 양갑(陽甲) 때에 이르러 국력이 다시 쇠퇴해졌고 양갑의 뒤를 이어 그의 동생 반경(盤庚)이 즉위하였다. 그는 인심을 새롭게 하고 퇴폐풍조를 과감히 추방하는 일대 혁신을 단행하여 국력을 회복시키기 위한 조치로 먼저 도읍을 옮기려 하였다. 도읍을 옮기려 하자 그곳 주민들이 비통해하고 반대 의견도 많았으나 그는 도읍을 은허(殷墟, 하남성 안양현 소둔촌)로 옮기고 민심과 정치를 새롭게 하여 은나라를 중흥시켰다.

탕왕이 세운 왕조의 이름은 ‘상(商)’이었으나 반경이 은허로 도읍을 옮긴 이후는 ‘은’이라고도 부른다.

반경으로부터 3대째인 무정(武丁)이 제위에 오를 무렵에는 또다시 국력이 쇠퇴해졌다. 무정은 국력을 부흥시킬 생각을 하지 않은 날이 하루도 없었으나 국정 전반을 털어놓고 의논할 만한 인재가 없었다. 그는 널리 인재를 구하기로 결심하였다. 모든 정사를 재상에게 맡기고 밤이나 낮이나 오직 인재를 찾는 일에만 몰두하였다.

그런 지 3년이 지난 어느 날 밤 꿈에 겉으로 보기에도 보통 인물과는 다른 풍채를 지닌 사람이 나타나 “신은 열(說)이라는 사람이온데 제가 필요하시다면 힘이 되어 드리겠나이다.”라고 하였다.

다음날 아침 잠이 깬 후에도 꿈에서 본 그 모습이 역력하였다. 화공을 시켜 그의 초상화를 그리게 하고 관리에게 명하여 그 초상화를 들고 전국 방방곡곡을 돌게 하였다. 그러자 부험(傅險)이라는 곳에서 초상화와 똑같은 인물을 발견하였다. 이름을 물으니 열이었다. 그는 즉시 무정을 알현하였다.

“틀림없는 이 사람이로다! 바로 그 인물이다!”

무정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어 보니 과연 현자(賢者)임에 틀림없었다. 무정은 부열과 만사를 의논하면서 정사에 힘을 기울이고 덕을 쌓으니 천하는 다시 태평을 되찾았다.

은왕조의 성군으로는 무정이 마지막이었다. 무정으로부터 8대째에 이르러 신(辛)이라는 이름의 천자가 즉위하였는데 이 사람이 은왕조 최후의 천자로서 하왕조의 걸과 함께 폭군의 대명사로 불리는 주(紂)이다.

주의 아버지는 제을(帝乙)이었는데 그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다. 장자인 미자계(微子啓)와 둘째인 중연(仲衍)은 그의 어머니의 출신 성분 때문에 제위를 이을 수가 없었고 정비(正妃) 소생인 막내아들 신이 제위를 잇게 되었다. 일설에는 미자계와 신의 어머니는 같은 사람이었는데 장자와 중연은 정비가 되기 전에 낳았고 신은 정비가 된 후에 낳았기 때문에 신이 제위를 잇게 되었다고도 한다.

제을과 왕후는 처음에는 장자인 미자계를 태자로 세우려 하였으나 태사가 당시 법도를 따져 정비 소생인 신을 태자로 세운 것이다.

주의 어머니는 황후이며 정비였다. 황후는 자신이 낳은 아들을 태자로 세우려 하지 않고 천한 신분인 첩의 소생이지만 현명하고 유능한 미자계를 태자로 세우려 하였으니 성모라 불러 마땅하다. 또 황제와 황후의 의견이지만 그들의 의견에 굽히지 않고 법도를 들어 반대한 태사 또한 훌륭한 대신이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러나 일설과 같이 미자계와 주가 동모형제(同母兄弟)였다면 주의 어머니를 반드시 ‘성모’라고 부를 수는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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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영 집필자 소개

서울에서 태어나 한문사숙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충남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저서로 《이야기 일본사》, 《이야기 중국사》가 있다.

출처

이야기 중국사1
이야기 중국사1 | 저자김희영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중국 고대부터 전한 시대까지의 역사를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함께 이야기 식으로 풀어 썼다. 엄청난 인구와 광대한 국토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이야말로 진정한 중국의 힘이며,..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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