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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1 춘추전국시대
중국 의학의 개조 편작
편작은 발해군 사람이다. 성은 진씨(秦氏), 이름은 월인(越人)이다. 젊었을 때 남의 객사의 장으로 있었는데 손님 가운데 장상군(長桑君)이라는 사람이 자주 객사에 들렀다. 편작은 그가 뛰어난 인물임을 알고 항상 그를 후대하였고 장상군 또한 편작이 보통 사람이 아님을 알고 있었다. 객사에 출입한 지 10여 년이 되었을 무렵 장상군은 편작을 불러 조용히 이야기하기를 “나는 비방을 가지고 있는데 내 나이 이미 늙어 공에게 비방을 전해줄까 합니다. 공께서는 이를 절대 누설하지 마십시오.”라고 하였다.
“천지신명에게 누설하지 않겠다는 맹세를 하겠습니다.”
이에 장상군은 품 속에서 약을 꺼내어 편작에게 주면서 “이것을 상지(上池)의 물각주1) 로 마시는데 계속 30일을 마시면 능히 사물을 보게 될 것입니다.”라고 말하고 그의 비방의 의서를 모두 꺼내어 편작에게 주고 홀연히 사라졌다.
편작은 그의 말대로 30일 동안 약을 마셨더니 담장 너머 저편에 있는 사람이 보이고 오장 속의 멍울이 모두 보였다. 그는 특히 진맥을 잘하여 이름을 날렸고 의원이 되어 제나라에도 있었고 조나라에도 있었다. 조나라에 있을 때 편작이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그 후 괵(虢)나라에 들렀을 때 괵나라의 태자가 갑자기 죽었다 하여 온 나라 사람들이 슬픔에 잠겨 있었다. 편작은 궁문 아래에 이르러 중서자(中庶子) 벼슬을 맡은 사람 가운데 방술을 좋아하는 사람을 통하여 “제가 태자의 병을 고쳐 보겠습니다.” 하고 말하였다.
왕과 그의 가족들은 모두 놀라며 의아해했다. 저 사람이 어떻게 죽은 사람을 치료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자 편작이 말했다.
“태자는 아직 죽지 않았을 것입니다. 가서 확인해 보십시오. 태자의 귀는 아직 울리고 있을 것이며 코도 움직일 것입니다. 그리고 허벅다리는 아직도 약간 따뜻한 기운이 있을 것입니다.”
왕이 의아해하면서 태자의 몸을 살펴보니 과연 그의 말과 같았다. 그 즉시 치료하도록 하였다.
태자의 몸에 몇 번 침을 놓자 태자는 곧바로 살아났다. 양쪽 갈비 밑에 찜질을 하자 태자는 이내 일어나 앉았고 그의 처방에 따라 약을 몇 첩 달여 먹이자 완전히 건강을 회복하였다.
진월인이 다 죽은 태자의 병을 고쳤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를 ‘기사회생(起死回生)’의 명의라고 추앙하였다.
이 같은 사실에 대해 진월인은 겸손하게 말했다. “만약 사람이 참으로 죽었다면 나로서도 살릴 수가 없습니다. 태자의 병세에 대해서 나는 사전에 세밀한 진찰을 해서 그의 병세가 일시적인 인사불성의 상태에 빠져 있다는 사실을 알았던 것입니다. 때문에 나는 살 길을 찾고 있던 태자의 생명에 손을 빌려드린 것뿐입니다.”
진월인의 의술은 아주 뛰어났기 때문에 사람들은 ‘편작(扁鵲)’이 다시 태어났다고 칭찬하였다. 편작이란 옛날 황제 때의 명의로 오래된 옛날의 비석에는 그 모습이 새의 모양으로 새겨져 있고 그의 업적에 대한 확실한 기록은 없다. 아마도 세월이 흐름에 따라 진월인이라는 본명 대신 편작이라는 대명사가 널리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전해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편작이 제나라의 수도 임치에 들러 국왕인 환후(桓侯)와 만난 일이 있었다. 편작은 환후의 혈색이 좋지 않음을 보고 그 자리에서 환후에게 “대왕께서는 지금 병에 걸려 있습니다. 그 병은 지금 피부를 범하고 있을 뿐이니 조기 치료를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환후는 가슴을 풀어 헤치고 팔뚝의 근육을 자랑하면서 “나는 병 따위에 걸리지 않았소.” 하고 편작과 작별하고 난 다음 좌우에 있는 신하들에게 “의사란 작자들은 돈을 벌기 위해 병이 없는 사람한테도 병을 고쳐주겠노라고 한다.”고 말하였다.
닷새 후 환후를 만난 편작은 “대왕의 병은 이미 혈맥을 범하고 있습니다. 치료하지 않으면 더욱 악화될 것입니다.”라고 주의를 환기시켰다.
환후는 이 말을 듣고 아주 기분이 불쾌했다. 그로부터 닷새 후 편작은 일부러 환후를 문안하였다. 그리고 “대왕의 병은 이미 위와 장을 범하고 있습니다. 지금 당장 치료하지 않으면 매우 위험한 상태에 이를 것입니다.”라고 말하였다. 이 말을 들은 환후는 매우 기분 나쁜 표정을 지었기 때문에 편작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편작은 닷새 후 또다시 환후를 문안하였다. 그러나 그때 편작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대로 물러나왔다. 환후는 그제서야 사람을 보내어 편작에게 치료를 요청했다. 그러자 편작은 “병이 피부를 범하고 있을 정도에서는 조금만 따뜻하게 해주면 바로 나을 수 있고, 혈맥을 범한 정도에서는 침구(針灸)로써 바로 치료할 수 있습니다. 병이 위와 장을 범했을 때는 약용(藥用) 술을 마시면 어느 정도 치료가 가능합니다. 그러나 지금 대왕의 병은 이미 골수에까지 침범하고 있으니 도저히 손을 쓸 수가 없습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렇게 꾸물꾸물하고 있는 사이에 닷새가 지나자 국왕은 마침내 병석에 눕게 되었다. 환후는 부랴부랴 사람을 보내어 편작을 부르려 하였으나 그때는 이미 편작이 자취를 감춘 뒤였다. 환후는 며칠 동안 병상에서 신음하다가 죽고 말았다.
편작은 의료 활동을 하면서 의료 기술의 개선과 경험의 총괄(總括)에도 크게 힘을 기울이고 점쟁이나 주술(呪術)에 의한 병의 치료를 강력히 반대하였다.
“의약을 믿지 않고 점쟁이나 주술을 믿다간 나을 병도 낫지 않는 법이다.”라고 주장하였다.
이 같은 그의 주장은 무당이나 주술사들로부터 맹렬한 반대와 공격을 받았으며 일부 재능 없는 의사들은 자기 자신의 의술은 연마하지 않고 편작을 질투하였다. 진나라에 온 편작은 그 명성이 더욱 높아져 국왕이 치료를 의뢰할 정도에 이르고 있었다.
당시 진나라에는 이혜(李醯)라는 시종의가 있었다. 그는 자기의 의술 수준이 편작에 비해 너무 뒤떨어지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편작의 명성이 높아지면 자신의 지위가 위협받을까 두려워 몰래 자객을 보내어 편작을 죽이고 말았다.
편작은 죽었지만 그의 의학 경험과 기술은 중국 의학의 귀중한 재산이 되어 후세 사람들에게 많은 혜택을 주었다. 그의 의학 이론은 후세 사람들에 의해 정리되어 《난경(難經)》이라는 책으로 만들어졌으며 중국 의학의 귀중한 문헌이 되고 있다.
사람들은 편작을 추모하여 약왕(藥王)이라 부르고 또 전통적 중국 의학의 개조로서 높이 숭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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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중국 의학의 개조 편작 – 이야기 중국사1, 김희영,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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