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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야기 중국
사1
진나라의 흥망

분서갱유

焚書坑儒

시황제 34년(기원전 213) 때마침 함양궁에서는 천하통일을 경축하는 잔치가 푸짐하게 열리고 있었다. 그러나 이 잔치에서 오랫동안 곪아온 정치 투쟁이 폭발하고 말았다.

시황제의 측근인 박사와 복야(僕射)의 주청신(周靑臣)을 비롯한 여러 신하들이 시황의 공덕을 칭송하며 축배를 올렸다. 이때 순우월(淳于越)이 앞에 나아가 경전을 인용하여 옛것을 찬미하고 현재를 풍자하는 발언을 하였다.

승상 이사는 순우월의 발언에 반론을 제기하여 옛것을 빙자하여 현세를 비판하고 인심을 교란시키는 행위는 용서할 수 없다고 비난하였다. 사실 순우월의 발언은 국가의 통일과 진왕조의 통치를 강화하기 위한 주장이었으나 이사는 이에 반대하여 더욱 극단적인 탄압책을 써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그 주장의 내용은, 진나라 역사 이외의 다른 서적은 모두 불살라 없앨 것, 다시 옛 시서(詩書)에 대하여 의논하는 자는 사형에 처하고, 옛 것을 옳게 여기고 현재를 비판하는 자는 그 일족을 멸할 것 등이었다.

시황제는 이사의 의견을 채용하여 많은 서적을 불살라버리고 다만 의약·복서(卜筮)와 농사에 관한 서적만 남기도록 하였다.

분서갱유

분서갱유의 상상도. 《제감도설(帝鑑圖說)》 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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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벽(魯壁)

진시황의 분서갱유 때, 공자의 제자들이 공자의 벽에 책을 숨겨 놓았다. 후에 공자 집 벽이 허물어지면서 숨겨 놓은 책들이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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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분서 정책에 대하여 유생들은 크게 불만을 품고 시황제를 비판하는 자가 속출하였다. 시황제는 이들 비판 세력을 누르기 위하여 보다 강경한 탄압 정책을 취했고, 마침내 유생들을 생매장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이 갱유(坑儒) 사건을 간추려 보면 만년의 시황제는 미신을 좋아하여 오직 자신의 불로장생(不老長生)만을 생각하게 되었다. 천하를 통일한 시황제로서도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는 마음대로 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이 오래 살기 위하여 여러 차례 해외에 사람을 보내어 불사(不死)의 영약(靈藥)을 구해오도록 하였으나 그런 약이 있을 턱이 없었다.

약초를 캐는 사람

진시황은 사람들을 보내 어 불사약을 캐오도록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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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시황제는 방술을 좋아하는 서복(徐福)각주1) 에게 동남동녀(童男童女) 3천 명과 많은 보물을 실은 선단(船團)을 거느리게 하여 동해에 있다는 신선이 사는 섬에 가서 불사약을 구해오도록 하였으나 그는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일설에 의하면 서복은 불사약은 구할 수가 없고 그대로 돌아가면 죽임을 당할 것이 확실하였기 때문에 그 길로 동남동녀와 함께 일본으로 도망가서 살았다는 이야기도 있다. 또 일설에는 서복이 시황제의 곁에서 떠나기 위하여 동해에 가서 불사약을 구해오겠다고 속여 많은 젊은 남녀와 재물을 싣고 일본으로 갔다는 설도 있다. 지금 일본 각지에는 서복의 묘가 있다고 한다.

서복과지

서복이 불사약을 구하러 동쪽으로 와서 한라산 정방폭포에 들러 ‘서복이 이곳에 왔다가다’라는 글귀를 바위에 새기고 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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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사의 영약을 구하는 일에 골몰했던 시황제는 이번에는 후생(候生)·노생(盧生)이라는 방사에게 영약을 구해 오도록 하였으나 결국은 그들로부터 우롱만 당하고 말았다. 아무리 방사라도 효험이 없으면 가차 없이 사형에 처하는 것이 시황의 성품이었다. 후환을 두려워한 후생·노생도 결국은 도망치고 말았다. 이들의 행방을 찾고 있던 중에 후생·노생이 도망하면서 황제인 자기를 비방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시황제는 크게 노하여 자기를 비방했을 것으로 생각되는 함양의 학자들을 철저히 조사토록 하였다. 조사 결과 자기를 비방한 자는 주로 유생들이고 그들이 비방한 내용은 ‘시황제는 유생을 우습게 알고 법에만 의존하고 있다. 권세욕의 권화(權化), 잔학한 폭군…’이라는 것이었다. 이에 비방에 관련된 유생 460명을 체포하여 구덩이를 파고 생매장하였다. 이것이 시황제 35년(기원전 212)의 일로 역사상 유명한 분서갱유 사건이다.

진나라가 천하를 통일한 후 이 같은 정치적 투쟁이 일어난 것은 필연적인 결과였다. 그러나 시황제가 이 정치 사상의 투쟁에 대하여 잔학한 조치를 취한 것은 역사적 교훈으로써 명기(銘記)할 만한 일이다. 사상적인 의견의 대립을 폭력으로 누르려 하는 것은 현자의 정치가 아니다. 분서의 결과는 사상적인 통일을 못했을 뿐만 아니라 고대 문화의 전적을 파괴, 소멸하는 문화 말살 정책에 불과하였으며, 갱유 사건 또한 정견이 다른 유생들을 육체적으로는 말살하였으나 정신적으로는 도리어 많은 반발을 불러 일으켜 진왕조의 강화는커녕 통치의 기반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그 후 시황제는 유아독존적인 자기도취에 빠져 결국 진왕조를 멸망하게 만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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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영 집필자 소개

서울에서 태어나 한문사숙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충남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저서로 《이야기 일본사》, 《이야기 중국사》가 있다.

출처

이야기 중국사1
이야기 중국사1 | 저자김희영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중국 고대부터 전한 시대까지의 역사를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함께 이야기 식으로 풀어 썼다. 엄청난 인구와 광대한 국토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이야말로 진정한 중국의 힘이며,..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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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분서갱유이야기 중국사1, 김희영,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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