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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1 전한시대
대풍가
大風歌고조 6년의 일이다. ‘초왕 한신이 역모를 꾀했다.’는 상서가 들어왔다. 고조는 진평의 계책을 채용하여 천자의 순행을 핑계삼아 한신을 유인하기로 하였다.
“진(陳)에 모이라. 내 운몽(雲夢)에서 노닐고자 하노라.”
고조는 제후들에게 사자를 보내어 이렇게 통고하였다. 한신은 자기를 유인하기 위한 계책인 줄 모르고 운몽에서 회합을 마친 후 고조가 초나라에 도착하면 그때 군대를 동원하여 배반하여도 늦지 않다고 생각했다. 자신은 아무 죄가 없다 생각하고 천자를 뵙고자 하였으나 마음 한구석엔 혹시 사로잡히지나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있었다. 이를 눈치챈 어떤 사람이 한신에게 말하기를 “종리매(鐘離昧)의 목을 베어 천자께 뵙는다면 반드시 기뻐할 것이며 아무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고 하였다. 한신은 생각 끝에 이 일을 종리매와 의논하기로 하였다.
종리매는 항왕의 장수였다. 본래 한신과 친한 사이였는데 항왕이 죽자 도망하여 한신에게 몸을 의탁하고 있었다. 한왕(유방)은 종리매가 초나라에 있다는 말을 듣고 조서를 내려 종리매를 체포하라고 하였으나 한신은 초나라에 온 지 얼마 안 되어 아직 체포하지 않고 있었다.
한신의 말을 들은 종리매는 꾸짖어 말하였다. “한나라가 초나라를 빼앗지 않는 것은 내가 공과 함께 있기 때문입니다. 이제 공이 나를 체포하여 스스로 잘 보이려고 한다면 내가 죽은 다음 공도 또한 망할 것입니다. 이제 보니 공은 장자가 아닙니다.” 그리고는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한신이 종리매의 머리를 가지고 진에 가서 고조를 뵈니 갑자기 힘센 무사 몇 사람이 뛰쳐나와 한신의 팔을 비틀어 뒤로 하고 손을 묶어버렸다. 그리고 한신을 고조의 뒷수레에 태우고 낙양으로 향했다.
한신은 수레 속에서 “역시 세상에서 하는 말이 옳구나. 날쌘 토끼가 잡히면 그것을 쫓던 개는 삶아 먹히고, 새가 없어지면 좋은 활은 치워버린다. … 또 적국이 망하면 지모 있는 신하도 죽는다 하더니 천하가 평정된 이제 내가 잡혀 죽게 되는 것은 당연한 일이로다!”
고조가 말하였다.
“어떤 사람이 공이 역모를 꾀했다고 고변하는 자가 있었기 때문에 체포했노라.”
고조는 한신을 심문했지만 혐의를 찾을 수 없어 석방하였다. 그러나 작위는 왕에서 회음후(淮陰侯)로 격하되었다.
그 후 한신은 고조가 자신의 유능함을 두려워하여 미워함을 알고 항상 병을 핑계삼아 조회에도 나가지 않고 천자의 거동에도 수행하지 않았다. 한신은 주발·관영 등과 동렬에 서는 것을 매우 창피하게 느꼈다.
고조는 일찍이 조용히 한신과 더불어 여러 장수들의 군사 통솔 능력에 대해 말한 적이 있었다. 고조가 한신에게 묻기를 “나같은 사람은 얼마나 되는 군대의 장수가 될 수 있겠는가?”하니 한신이 대답하였다.
“폐하께서는 10만 명의 장수에 불과합니다.”
그러자 고조가 말하였다.
“군은 어떠한가?”
“신은 많을수록 더욱 좋습니다.”
고조가 웃으며 말하였다.
“많을수록 좋다면 어찌 나에게 사로잡히는 바가 되었는가?”
“폐하께서는 군대의 장수가 될 수는 없어도 장수의 장수가 될 수는 있습니다. 이것이 신이 폐하에게 사로잡힌 까닭입니다. 또 폐하는 하늘이 준 것이지 사람의 힘은 아닌 것으로 압니다.”
한신이 대답하였다.
그 후 진희가 거록수(鉅鹿守)에 임명되어 한신에게 작별 인사를 갔을 때였다. 한신은 진희의 손을 잡고 좌우를 물리친 다음 탄식하며 말하였다.
“공의 임지는 천하의 정병이 있는 곳일 뿐더러 공은 폐하의 신임과 사랑을 받고 있지 않은가? 가령 남이 공이 배반하였다는 말을 해도 처음에는 믿지 않을 것이고, 두 번 말하면 의심할 것이고, 세 번 말하면 그때는 성내어 스스로 공을 치러 올 것일세. 그때 내가 공을 위하여 안에서 일어나면 가히 천하를 도모할 수 있을 것일세.”
진희는 원래 한신의 유능함을 알고 있었으므로 “삼가 가르침을 받들겠습니다.” 하고 임지로 떠났다.
고조 10년 진희가 과연 배반하였다. 고조는 친히 군대를 거느리고 진희의 토벌에 나섰으나 진희와의 내응을 약속한 한신은 병을 핑계삼아 따라가지 않고 은밀히 사람을 진희에게 보내어 “공은 다만 군사를 일으키라. 그러면 내가 여기서 공을 돕겠노라.”라고 전하고 그의 가신들과 의논하여 밤에 거짓 조서를 내려 여러 관가에 갇혀 있는 죄수들을 석방하여 보내고 여후와 태자를 습격하기로 하였다. 각 부서와 책임자를 모두 정하고 진희의 회보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의 사인(舍人)이 한신에게 득죄하여 한신이 그를 죽이려 하자 사인의 아우가 “고변이요. 한신이 배반하고자 합니다.” 하고 여후에게 보고하였다.
여후는 한신을 부르고자 하였으나 혹시 오지 않을 것을 염려하여 소하와 상의하고 사람을 시켜 거짓으로 진희를 토벌하기 위해 친정중인 천자가 보낸 것처럼 속여서 말하기를 “진희는 이미 죽였다.”라고 하였다.
열후와 군신들은 승상 소하가 꾸민 계책임을 알지 못하고 모두 와서 축하하였다. 승상 소하는 한신에게 사자를 보내어 “비록 병중일지라도 들어와서 축하하는 것이 도리가 아니겠습니까?” 하고 말하니 한신은 들어가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한신이 들어가자 미리 대기하고 있던 힘센 무사들이 재빨리 한신을 포박하여 장락궁의 종실(鐘室)에서 한신을 베어 죽였다.
죽음에 임하여 한신은 최후 진술에서 “내 괴철(蒯徹)각주1) 의 계책을 채용했었더라면 이 지경이 되지 않았을 것이다. 이제 아녀자의 속임수에 떨어졌으니 어찌 하늘이 시키는 일이 아니겠는가?”
여후는 한신의 삼족을 모두 멸하였다.
고조는 진희를 토벌하고 돌아와서 한신의 죽음을 들었다. 한편으로는 기뻐하고 한편으로는 슬퍼하면서 “한신이 죽을 때 무어라고 말하던가?” 하고 물었다.
“그는 괴철의 계책을 채용하지 않았음을 한탄하였습니다.”
“괴철을 잡아오도록 하라.”
괴철이 잡혀오자 고조가 물었다.
“네가 회음후에게 배반하라고 가르쳐 주었더냐?”
“그렇습니다. 신이 가르쳐 주었습니다. 그러나 그가 신의 계책을 채용하지 않더니 이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만일 그가 신의 계책을 채용했었더라면 폐하께서 어찌 그를 무찌를 수 있었겠습니까?”
고조가 성내어 말하였다.
“이 놈을 삶아 죽여라.”
괴철은 조금도 두려워하는 빛이 없이 태연히 말하였다.
“진나라가 그 사슴을 잃자 천하가 모두 그 사슴을 쫓았습니다. 결국은 재주가 높고 발이 빠른 자가 먼저 얻게 되었습니다. 도척의 개가 요임금을 짖은 것은 요임금이 어질지 않기 때문이 아니고 그 주인이 아니기 때문에 짖은 것입니다. 그때에 신은 다만 한신을 알았을 뿐 폐하는 알지 못하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천하에는 날카로운 칼을 갈면서 폐하처럼 그 자신이 천하를 차지해 보려고 한 사람이 많았으나 그들의 힘이 미치지 못했을 뿐입니다. 폐하께서는 그들을 모두 삶아 죽여야 하겠습니까?”
“이 자를 석방하라.”
고조는 괴철을 용서하였다.
한신의 모반 사건은 몇 가지 의문을 가지게 한다. 일찍이 유방도 한신의 작전 능력을 칭찬하며 “싸우면 반드시 이기고 공략하면 반드시 빼앗는다.”라고 하여 한신을 인걸로 인정한 사실이 있었다. 그런 한신이 진희와의 모반 사건을 그의 사인의 아우까지 알 수 있도록 모의했을 리가 없을 뿐더러 그저 사인의 아우라고만 기록되었을 뿐 그 성명이 밝혀지지 않고 있다. 소하와 여후가 한신 같은 군사적 천재를 일찍 숙청하지 않으면 한나라의 앞날이 위험하다고 생각하여 모반의 죄를 뒤집어씌워 고조가 없는 사이에 죽였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는 없다. 모반의 혐의는 희박하지만 살려두면 언제 그가 군사적 재능을 발휘할지 모르니 없애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진의였는지도 모른다.
숙청당한 공신들은 한신뿐이 아니었다. 한신보다 앞서 연왕 장도가 숙청되었다. 장도는 원래 연나라의 장군이었는데 항우를 따라 관중에 들어간 무장이었다.
진나라가 평정되자 그는 연왕이 되었고 유방은 한왕(유방)이 되었다. 그는 항우의 인맥에 속하는 인물이었다. 그 후 한신이 연나라를 평정하자 초나라를 배반하고 한나라에 항복한 자였다. 엄격히 말하여 한의 공신이라고는 할 수 없는 인물이었다.
항우가 죽은 후 곧바로 그가 모반하자 고조가 친히 군대를 이끌고 그를 격파하고 노관(盧綰)을 새 연왕으로 삼았다.
중국 창사시 마왕퇴한묘에서 출토된 묘주의 관을 덮고 있던 백화. 백화의 위쪽 반은 천상의 풍경으로 해(日)와 달(月), 촉룡(燭龍), 천국의 문신(門神이 그려져 있다. 아래쪽 반은 제후(諸候))의 도장(印)인 교룡(交龍) 그림이다. 교룡 사이는 상, 중, 하 3단으로 나뉘어진 그림이 있는데, 상단은 무덤 주인의 모습과 하인, 중단은 제사를 지내는 모습, 하단은 물 속의 모습이다. 이 백화는 고대 문헌에 보이는 명정(銘旌)이며, 혼을 승천시키기 위한 매체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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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조 7년(기원전 200)에는 한왕(유방) 신이 모반하였다. 한왕(유방) 신은 원래 한의 양왕의 서손으로 신장이 여덟 자 반이나 되는 거구였다. 초·한의 항쟁 때 처음 항우는 정창(鄭昌)이라는 사람을 한왕(유방)으로 삼았는데 한신이 한나라를 평정하자 이 나라 출신인 장량의 추천에 따라 한왕(유방)이 되었다.
고조 3년 한왕(유방) 신이 유수부대를 거느리고 형양성을 지키고 있었다. 항우의 공격을 받아 일단 항우에게 항복했다가 그 후 도망하여 한나라로 돌아왔다.
한에서는 다시 그를 한왕(유방)으로 삼았다. 항우를 격파하고 천하를 평정하자 고조는 한왕(유방) 신이 재능이 있고 무용도 있으니 북방의 흉노를 방어하라 하고 도읍을 진양에 정하게 하였다.
한왕(유방) 신은 상서를 올렸다. “나라가 변방에 있어서 흉노가 자주 침입하오니 변방의 관새(關塞)에서 가까운 마읍(馬邑, 산서성 삭현)을 도읍으로 하고자 합니다.”
고조가 이를 허락하자 신은 곧 마읍을 도읍으로 정하여 흉노의 방어 기지로 삼았다.
당시 흉노는 묵특(冒頓)이라는 영걸스런 수장이 나타나 바야흐로 세력을 확장하고 있었다. 묵특은 두만 선우(頭曼單于)의 아들이다. 두만 선우 시절에는 진나라 몽염 장군의 위세에 눌려 오르도스 지방을 빼앗기고 동호(東胡)나 월지(月氏)의 세력도 강성하였기 때문에 흉노는 태자 묵특을 인질로 삼아 월지에 보냈었다. 그 후 두만은 젊은 애첩에게서 아들을 낳자 묵특 대신 그를 후계자로 삼을 생각으로 월지를 급습하였다. 급습을 받은 월지에서는 인질로 잡고 있는 묵특을 죽이려 하였으나 용감한 묵특은 월지국의 명마를 훔쳐 도망하여 본국으로 돌아왔다. 얼마 후 그는 아버지 두만을 죽이고 스스로 흉노의 선우가 되었다. 선우는 흉노의 말로 왕을 뜻한다.
묵특은 스스로 선우가 되어 곧바로 동호를 격파하였다. 동호를 격파하는데는 적을 방심시키는 작전을 폈다. 동호에서는 아들이 아버지를 죽인 정변이 일어나 흉노가 매우 혼란해 있을 것으로 보고 흉노에게 명마를 달라고 요청하였다. 묵특은 눈을 딱 감고 그들의 요구대로 명마를 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미녀를 달라고 요구하였다. 묵특은 이 요구에도 응하였다. 그러자 이번에는 또 넓은 불모(不毛)의 땅을 요구하였다. 이 불모의 땅은 흉노에게 있어 그다지 아까운 땅이 아니었다. 명마나 미녀를 보냈으니 이번에도 순순히 응할 것으로 믿고 동호에서는 흉노에 대한 방비를 하지 않았다. 명마나 미녀를 요구했을 때는 방심하지 않고 방비를 튼튼히 하고 있었으나 거듭 흉노에서 순순히 응했기 때문에 이번에는 경계심을 풀고 방심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틈을 노린 묵특은 총력을 기울여 동호를 멸망시키고 서쪽으로 월지를 쳐서 대파하였다. 이어 남쪽으로 누번(樓煩)·백양(白羊)을 병합시키고 몽염에게 빼앗겼던 땅을 모두 회복하였다.
이렇게 흉노가 세력을 확장할 수 있었던 것은 그들에게 가장 위협이 되었던 몽염이 죽고 진나라 말기의 혼란과 유방과 항우의 싸움이 계속되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흉노는 아무런 저항도 받지 않고 서서히 그 힘을 길러 30만의 강병을 거느리는 막강한 강국으로 자랐던 것이다.
흉노는 강력한 군사력으로 마읍을 포위하였다. 한왕(유방) 신은 여러 차례 사자를 보내어 강화를 요청하였다. 한나라는 군대를 출동시켜 한왕(유방) 신을 구원하였으나 신이 자주 흉노에게 사자를 파견했다는 사실을 알았다. 그에게 혹시 모반할 뜻이 있지나 않을까 하여 마읍에 파견된 사자를 시켜 신을 꾸짖게 하였다.
한왕(유방) 신은 아무리 변명하여도 지금까지 흉노와 내통했다는 이유를 들어 죽이지나 않을까 두려웠다. 여러 가지 생각 끝에 마침내 흉노와 약속하고 한나라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그리고는 마읍을 가지고 흉노에게 항복하고 태원을 공격하였다.
고조는 친히 군사를 이끌고 출동하여 신의 군사를 동제(銅鞮)에서 격파하고 그 장수 왕희(王喜)를 베어 죽이니 신은 흉노에게로 달아났다.
백토(白土)라는 곳에 있던 한왕(유방) 신의 부장 만구신(曼丘臣)과 왕황(王黃) 등은 조나라의 후예인 조리(趙利)를 세워 왕으로 삼고 한왕(유방) 신 휘하의 패잔병을 모아 신과 묵특과 모의하여 한나라를 공격하기로 하였다.
흉노는 좌현왕(左賢王)·우현왕(右賢王)으로 하여금 만여 기를 거느리고 왕황 등과 공동 행동을 취하게 하였다.
이렇게 하여 한나라와 흉노와의 격돌이 시작되었다. 이때 한나라 군대는 진양에서 왕황 등의 군사를 격파하였다. 흉노의 선우 묵특이 대(代)의 상곡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진양에 있던 고조는 사람을 시켜 묵특의 상황을 살피게 하였다.
이때 묵특은 한나라의 염탐꾼이 올 것을 알고 장사와 살찐 말은 모두 숨겨 놓고 노약자와 비루먹은 말만을 보이게 하였다. 사자 십배(十輩)는 묵특의 계략을 알지 못하고 자신이 본 그대로 생각하여 “묵특을 치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보고하였다.
고조는 다시 유경(劉敬)을 보내어 살피도록 하였다. 유경이 돌아와 보고하기를 “두 나라가 서로 싸우는 마당에 자신의 강력한 점을 보이려고 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거늘 신이 가본바 노약자와 초라한 말들만 보이니 이것은 반드시 그들의 단점을 보임으로써 승리를 노리는 흉계임이 분명합니다. 치지 않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고조는 크게 성내어 유경을 꾸짖어 말하였다.
“제나라 오랑캐놈이 말로써 벼슬을 얻더니 이제 망녕된 말로 내 군사의 사기를 꺾으려 하는구나.” 그리고는 유경을 포박하여 광무에 가두었다.
고조는 평성(平城)으로 군대를 출동시켰다. 군대가 아직 평성에 이르기 전에 묵특이 정예 기병 40만을 출동시켜 고조를 백등(白登, 평성의 동북쪽)에서 포위하였다. 묵특의 백등 포위 작전은 매우 집요하였다. 아무리 포위망을 뚫으려 해도 뚫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추운 겨울철이어서 한병은 10인 가운데 2,3명이 동상에 걸려 고통을 받고 있었다. 이에 비하여 흉노의 군사는 추위에 익숙하여 아무런 피해도 없었다.
진평은 계교로써 포위를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는 화공으로 하여금 미인도를 그리게 하고 사자로 하여금 그 미인도와 후한 선물을 연씨(閼氏, 선우의 정처. 황후)에게 보내어 말하기를,“지금 한나라 천자께서는 곤경에 처하여 이 미인을 묵특에게 바치고자 하십니다.”라고 하였다.
연씨는 그 미인을 묵특에게 바칠 경우 그 여인에게 자신의 사랑을 빼앗길까 두려웠다. 묵특을 달래어 말하기를 “지금 한나라의 땅을 얻는다 해도 거기서 살 수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두 임금이 서로 괴롭힘을 당할 것이 없지 않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묵특은 성을 포위한 지 7일 만에 포위를 풀고 물러갔다. 한병은 화살을 활시위에 잰 채 탈출하여 평성에서 후속 구원병과 합류하였다.
이로써 흉노와의 싸움은 끝났으나 한왕(유방) 신을 베어 죽이려던 애당초 목적은 달성하지 못하였다. 이 싸움은 무승부인 듯한 인상을 주지만 사실은 흉노 쪽의 판정승이었다.
고조는 광무에 도착하자 유경을 석방하고 맨 먼저 흉노의 상황을 살피러 갔던 사자 십배의 목을 베었다. 그리고 유경을 관내후(關內侯)로 승격시켜 건신후(建信侯)라 불렀다.
고조는 환궁하는 도중 조나라에 들렸다. 이때 조왕 장오(張敖)는 장이의 아들이며 또한 고조의 장녀 노원 공주의 남편이었다. 고조는 사위 앞에서 두 다리를 쭉 뻗고 욕설을 퍼부으며 조왕을 꾸짖었다. 세 살 버릇 여든까지 간다고 황제가 된 후에도 젊었을 적 나쁜 버릇은 고쳐지지 않았던 모양이다.
자신들이 섬기는 조왕이 고조에게 모욕당하는 것을 본 조나라 중신들은 크게 분개하였다.
“아무리 황제라고 하지만 신하들이 보는 앞에서 우리의 왕을 모욕하다니 참을 수 없는 일이다.”
관고(貫高)·조오(趙午)의 무리들은 이렇게 생각하고 고조를 죽일 계획을 세웠다. 아직도 전국 시대의 살벌한 풍조가 짙게 남아 있는 시기였다. 다행히 일은 사전에 발각되어 황제의 시해 계획은 중신들만의 모의이고 조왕과는 아무 관련이 없다는 사실이 밝혀져 조왕의 생명은 구했으나 왕을 폐하고 선평후(宣平侯)로 격하되었다.
다음 조왕에는 고조의 총애를 받던 척부인(戚夫人) 소생 여의(如意)가 되었다. 이때 여의의 나이 겨우 9세였으나 이미 대(代)의 왕이 되어 있었다. 대왕에는 박부인(薄夫人) 소생 항(恒)이 되었다. 이 항은 나중에 황제가 된 문제(文帝)이다. 애당초 대왕에는 고조의 형인 유중(劉仲)이 임명되었는데 나라를 버리고 낙양으로 돌아왔기 때문에 합양후(合陽侯)로 격하되었던 것이다.
한나라의 정책은 철저하게 황족에 한하여만 왕을 세우고 다른 성의 왕은 폐한다는 것이었다. 이 같은 사실은 그동안의 역사가 증명해주고 있다.
한신이 제왕의 자리에서 초왕으로 옮겨지자 제왕에는 고조의 장남 유비(劉肥)가, 한신이 초왕에서 회음후로 격하되자 고조의 동생 유교(劉交)가 초왕이 되었다.
한신이 처형된 고조 11년(기원전 196)의 시점에서 볼 때 왕족이 아닌 사람이 왕으로 있은 것은 회남왕 경포, 양왕 팽월, 연왕 노관 세 사람뿐이라고 할 수 있다. 실은 이 밖에도 장사왕 오신(吳臣, 오예의 아들), 민월왕 무저, 남월왕 조타 등이 있었으나 이들은 한나라의 영향력이 실질적으로 미치지 않는 번왕(藩王)에 지나지 않았다.
한신이 억울하게 죽은 해 양왕 팽월이 모반하였다. 팽월은 원래 창읍(昌邑, 산동성) 사람으로 무뢰배였다. 진나라 말기 천하가 크게 어지러워지자 무리를 모아 유방의 거병 초기에 도운 일이 있었다. 그 후 연나라의 흩어진 군졸을 모아 1만여 명에 달하는 병력으로 유방을 위하여 초나라 후방에서 게릴라전을 펼쳤다. 팽월의 초나라에 대한 게릴라전은 유방의 쟁패전에 크게 공헌하였다. 해하의 작전에도 팽월은 전군을 이끌고 참전하였다.
진희가 마읍에서 배반했을 때 고조가 친정에 나서자 팽월은 부하장수만을 보내고 자신은 병을 핑계삼아 출정하지 않았다. 문책의 사신이 오자 팽월은 정중히 사신을 맞아들여 사죄하려 하자 그의 부장 호첩(扈輒)이 진언하였다.
“차라리 군사를 일으켜 모반하는 것이 낫지 않겠습니까?”
팽월은 망설이면서 여전히 병을 핑계삼아 움직이지 않고 사태를 관망하고 있었다. 이 사이에 “양왕 팽월이 모반했습니다.”라는 밀고가 있어 팽월은 어이없이 체포되고 말았다. 일단 죽음을 면하여 촉으로 유배되었으나 마침내는 처형되었다. 고조는 다섯째아들 유회(劉恢)를 양왕으로 세웠다.
고조가 해하의 싸움에서 항우를 무찌를 수 있었던 것은 한신·팽월·경포 세 장군이 대군을 이끌고 참전했기 때문이었다. 한나라로선 이들 세 사람이 최고의 공로자였다. 이들 가운데 한신·팽월이 이미 죽임을 당했으니 경포가 다음 차례는 자기일 것이라고 생각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한나라는 팽월을 죽여서 소금에 절이고 그 절인 고기를 그릇에 담아 각 제후들에게 돌렸다. 그것이 회남에 도착했을 때 회남왕 경포는 때마침 사냥을 나가려다가 그것을 보고 몹시 두려워하였다. 마치 “너도 모반하면 이렇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과 같았다.
‘모반을 하지 않더라도 모반의 죄를 뒤집어 씌우겠지.’
이것이 경포의 생각이었다. 경포는 몰래 군대의 부서를 정하여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는 임무를 정하여 두고, 이웃 고을의 동정을 살피면서 경계하고 있었다.
경포의 사랑하는 여인이 병이 들어 의사에게 치료를 받게 되었다. 중대부 비혁은 전에 경포의 시중이었으므로 이 여인에게 선물을 바치고 이 여인과 친숙해지자 의사의 집에 가서 술을 마시고 논 적도 있었다. 어느 때 이 여인이 경포를 모시다가 무슨 말 끝에 비혁의 사람됨을 칭찬하자 경포는 성을 내며 “너는 어디서 그를 알게 되었느냐?” 하며 그들의 사이를 의심하게 되었다. 비혁이 두려워 병들었다고 핑계하자 경포는 더욱 그를 의심하여 비혁을 체포하려 하였다. 비혁은 자신이 살기 위해서는 경포의 모반을 밀고하는 수밖에 없다고 생각하여 장안으로 말을 달렸다. 이 같은 사실을 안 경포는 급히 사람을 시켜 비혁을 뒤쫓아 잡아오게 하였으나 미치지 못하고 비혁은 마침내 장안에 이르러 고변하였다.
“경포가 모반을 꾀하는 증거가 있습니다. 일이 드러나기 전에 경포를 베어야 할 것입니다.”
고조는 비혁이 올린 글을 읽고 상국인 소하에게 말하니 소하가 말하였다.
“경포는 모반할 사람 같지 않습니다. 혹시 무고일지도 모르오니 우선 비혁을 가두고 사람을 보내어 경포의 태도를 살펴보는 것이 좋겠습니다.”
한편 회남왕 경포는 비혁이 고변했다는 사실을 알고 그가 자기 나라의 비밀을 모두 말했을 것이라고 의심하고 있었다. 한나라의 사자가 와서 경포를 심문하므로 마침내 비혁의 가족을 몰살시키고 군대를 동원하여 배반하였다.
고조는 여러 장수를 모아놓고 물었다.
“경포가 배반하였으니 어떻게 하면 좋은가?”
여러 장수들은 입을 모아 “군대를 동원하여 그 놈을 구덩이에 묻어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여음후(汝陰侯) 등공(藤公)이 “신의 객인에 본래 초나라의 지방 장관이었던 설공이라는 자가 있는데 계략을 세우는 데 뛰어난 재주가 있습니다. 한 번 물어보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하였다.
고조는 곧 설공을 불러 물으니 설공이 대답하였다.
“경포가 배반하는 것은 하나도 괴이하게 여길 것이 못됩니다. 경포가 만일 상계(上計)를 택한다면 산동은 한나라의 소유가 아닐 것이며, 중계를 택한다면 승패의 확률을 알 수 없으며, 만일 하계를 택한다면 폐하께서는 아무 걱정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면 경포는 어느 계책을 택할 것인지 말해 보라.”
설공은 자신 있는 태도로 답했다.
“하계를 택할 것이 분명합니다.”
“어째서 상계, 중계를 버리고 하계를 택할 것이라 하는가?”
“경포는 본래 도적의 무리에 불과합니다. 마침내 자력으로 왕의 자리에 오르기는 했으나 이것은 다 자기 자신이 살기 위해 한 일이고 장래를 염려하고 백성의 이익을 위하여 한 일이 아닙니다. 그런 까닭에 하계를 택할 것입니다.”
고조는 설공의 계책을 받아들이기로 하고 자신이 직접 장수가 되어 경포 공격에 나섰다.
경포는 과연 설공이 말한 것과 같이 하계를 택하였다. 동으로 형(荊)을 공격하니 형왕 유가는 달아나 부릉에서 죽었다. 경포는 그 군대를 인솔하여 초나라를 쳐 깨뜨리고 드디어 서쪽으로 가서 한나라 군대와 기현(蘄縣, 안휘성 숙현)에서 대치하였다. 이때 경포의 군사는 매우 정예부대였다.
고조는 용성에 성벽을 쌓고 경포의 군대를 바라보니 진을 설치한 것이 항우의 포진법과 같았다. 고조는 멀리서 경포를 바라보면서 “무엇이 괴로워서 배반했는가?”하니, 경포가 말하기를 “황제가 되고 싶을 뿐이오.”라고 하였다. 고조는 크게 성내어 경포를 꾸짖고 싸움을 벌였다. 이 싸움에서 경포의 군사는 대패하여 달아났다. 회수를 건너가서 추격해오는 한군과 자주 싸웠으나 패하여 경포는 백여 명의 군사와 함께 강남으로 달아났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 고조는 유시(流矢)각주2) 에 맞아 부상을 입었다. 다른 장수에게 명하여 경포를 추격하게 하였던바 경포가 번양(番陽)으로 달아나자 번양 사람이 경포를 자향(玆鄕)의 농가에서 잡아 죽였다.
달아난 경포의 추격을 다른 장수에게 맡긴 고조는 장안으로 개선하는 도중에 고향인 패에 들렀다. 오랜만의 금의환향이었다.
젊은 시절에 그는 이곳에서 건달 생활을 하여 많은 비난도 받았지만 이제 황제가 되어 돌아온 것이다. 그는 고향의 옛 친구와 부로들을 모두 불러 모아 큰 잔치를 베풀었다. 잔치가 무르익고 술기운이 돌자 깊은 감회에 젖어 축(筑, 현악기의 일종)을 치며 문제의 〈대풍가(大風歌)〉를 지어 부르며 춤을 추었다. 그뿐 아니라 고향의 소년들 120명에게 이 노래를 가르쳐 합창하게 하였다.
큰 바람 불어닥쳐 구름은 흩날리고
위엄 해내(海內)에 떨쳐 고향에 돌아오다
이제 어떻게 맹사(猛士)를 얻어 천하를 지킬거나
大風起兮雲飛揚
威加海內兮歸故鄕
安得猛士兮守四方
여기서 큰 바람은 난세를 뜻하는 말이고 구름은 자기 자신을 포함한 영웅호걸들을 가리킨다. 세상이 어지러워지자 영웅호걸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나 다투다가 이제 자신의 위엄을 천하에 떨치고 금의환향하였다. 그 천하를 길이 보전하기 위해서는 용맹한 사나이들을 얻어서 사방을 지키게 해야겠다는 내용이다.
이 ‘대풍가’는 항우의 ‘해하의 노래’와 자주 비교된다. 항우가 해하에서 한군에 포위되어 사면초가의 비운에 처했을 때 읊은 노래는 위에서 말한 바 있거니와 항우는 그 패배의 책임을 그 자신에게 돌리지 않고 시운이 불리하여 하늘이 자신을 망치게 하려고 한다는 등의 말로 다른 곳에 책임을 전가시키고 있다.
이에 비하여 유방의 〈대풍가〉는 난세의 큰 바람이 불어닥치자 구름이 되어 하늘을 날고 다른 구름의 도움을 받아가며 천하를 평정하고 금의환향하였다고 술회하고 있다. 그리고 앞으로도 용맹한 사나이들을 얻어 길이 천하를 지키고 싶다고 말하고 있다.
혹자는 〈대풍가〉 첫 구의 큰 바람은 유방을 가리키고, 구름은 항우를 위시하여 그에게 적대 관계에 있던 군웅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해석하기도 한다. 즉 자신이 큰 바람이 되어 항우 등을 불어서 날려버렸다는 뜻이라고도 한다. 마지막 구는 일단 차지한 천하는 자기 혼자의 힘으로는 지킬 수 없으므로 용맹한 사람을 바란다는 원망을 나타내고 있어 결코 항우와 같이 자기 힘만을 찬미하지는 않고 있다.
소년들이 부르는 〈대풍가〉의 합창이 점점 흥을 돋우자 고조는 자리에서 일어나 손발을 흔들며 춤을 추었고 춤이 끝나자 두 눈에서는 두 줄기 눈물이 흘렀다.
고조가 〈대풍가〉에 맞추어 춤을 춘 것은 고조 12년 10월이고 그로부터 7개월 후에 세상을 떠났다. 고조가 눈물을 흘린 것은 나이를 먹어서 마음이 약해진 탓도 있었겠지만 경포와의 토벌 작전에서 부상당한 상처 등으로 건강 상태도 좋지 않았던 탓인 듯하다.
사실 고조는 경포의 토벌 작전에 나서기 전부터 건강 상태가 좋지 않았다. 그래서 태자인 영(盈)을 총사령관으로 임명하여 경포를 토벌하게 할 예정이었으나 여후가 반대하고 나섰다.
“경포는 천하의 맹장으로 용병에 능한 사람입니다. 이러한 만만치 않은 적과 상대하여 제장을 독려하여 그를 무찌를 수 있는 것은 폐하밖에 없습니다. 비록 몸이 불편하시더라도 저희들을 위해 이번만은 친히 출정하여 주옵소서.”
여후가 울면서 호소하자 고조는 할 수 없이 친히 경포 토벌에 나섰던 것이다. 그러나 여후의 호소는 다른 속셈이 있었다. 당시 고조는 바야흐로 조강지처인 여후를 멀리하고 척부인이라는 여자를 총애하고 있었는데 척부인이 자기가 낳은 아들 여의를 태자로 책립해달라고 울면서 조르고 있었다. 게다가 고조는 현재 태자로 책립된 영이 너무 유약하다는 점에 불만을 품고 망설이고 있었다.
상황이 이러했으니 여후로서는 신경을 곤두세울 수밖에 없었다. 남편과 함께 고생해서 얻은 천하를 남의 아들에게 넘겨줄 수 없다고 생각하여 오빠인 건성후(建成侯)와 의논했다. 건성후는 장량에게 이 일을 의논한 결과 장량은 난색을 표명하면서 한 가지 방법을 넌지시 알려주었다.
“천하를 평정하자 폐하께서는 천하의 현자를 널리 초빙하셨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초빙해도 응하지 않은 네 사람의 인물이 있습니다. 네 사람은 모두 노인이온데 이 네 사람만 태자의 신변에 모시게 할 수 있으면 태자의 자리도 안전할 것입니다.” 그리고는 그 초빙 방법도 가르쳐 주었다.
이런 때 태자 영을 총사령관으로 하여 경포를 토벌하라는 것이었으니 만약 태자가 이 토벌 작전에 공을 세운다면 몰라도 실패하거나 지지부진한 성과를 가져온다면 태자를 폐하는 좋은 구실이 될 것이 확실했다.
고조가 〈대풍가〉를 부르고 눈물을 흘린 것은 고향에 돌아온 감상에 젖어서만이 아니라 죽음을 예감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위험 인물을 숙청하고 난 고조는 ‘용맹한 사나이’가 없음을 실감했음인지 ‘용맹한 사나이’를 그리워하는 염원이 나타나 있다. 축을 치며 대풍가를 부를 때 그의 눈앞에는 일찍이 용맹을 떨치던 한신·팽월·경포 등의 얼굴이 어른거렸을 것이다.
경포가 멸망되자 왕족이 아닌 왕으로는 오직 연왕 노관 한 사람뿐이었다. 이성의 왕을 숙청한다는 원칙에서 보면 노관의 지위도 안전할 수만은 없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설마 연왕 노관만이야’ 하고 예외 취급하였다. 사람들이 예외라고 생각한 까닭은 연왕 노관은 고조와 죽마지우였기 때문에 심복 부하보다도 더 가까운 사이였다. 그뿐만 아니라 이들 두 사람의 부친끼리도 친구 사이였으며 고조와 노관의 생일까지도 한날이었다. 친구끼리 같은 날에 남자 아기를 낳자 당시 동네의 화젯거리가 되어 동리 사람들은 양고기와 술을 가지고 양가에 몰려와 축복하였다는 것이다.
항우를 멸망시킨 후 연왕 장도가 배반하여 이를 토벌하여 항복받자 고조는 조서를 내려 연왕으로 세울 공로자를 상신하라 명하였다.
물론 고조의 의중 인물은 노관이었다. 고조의 입장에서 보면 소하와 조참이 일한 공로로는 노관보다 앞섰으나 친분으로 따지면 누구도 노관을 따를 자가 없었다. 심지어 침실까지도 출입할 정도로 친밀한 사이였다.
군신들은 모두 이런 점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노관은 항상 폐하를 따라서 천하를 평정하였으며 공도 가장 많습니다. 그를 연왕으로 세우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하였다.
고조는 조서를 내려 이를 윤허하였다. 다른 왕을 세우는 일은 고조도 마음에 내키지 않는 임명이었으나 노관만은 자신이 바라던 바였기 때문에 누구든지 노관만은 예외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내 예외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났다.
고조 11년 가을에 진희가 대(代) 땅에서 배반하니 고조가 친정에 나서 한단에서 진희의 군사를 토벌하자 연왕 노관도 토벌 작전에 참전하여 동북쪽을 공격하였다. 노관은 진희를 바로 멸망시키고 나면 자신이 한나라에서 불필요한 인물이 되어 연왕의 자리를 오래 유지할 수 없을 것을 두려워하였다. 진희를 멸망시키고 나면 다음은 연나라를 멸망시킬지도 모르니 가능한 진희와의 싸움을 오래 끌어야겠다고 생각하고 몰래 범제(范齊)를 진희에게 보내어 될 수 있는 대로 오래도록 전쟁을 계속하여 승패를 결정하는 일이 없게 하도록 하였다.
고조 12년(기원전 195) 한나라에서는 번쾌를 시켜 진희를 공격하여 그를 베어 죽이자 항복한 진희의 부장이 말하기를 “연왕 노관이 그의 부하 범제를 진희에게 보내어 모의한 사실이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고조는 진상을 규명하기 위하여 사자를 보내어 노관을 불렀으나 노관은 두려워 병을 핑계삼아 나오지 아니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고조는 노관을 더욱 의심하게 되었다.
고조는 또 벽양후와 어사대부를 보내어 연왕을 맞아오게 하고 이어 연왕의 좌우 사람들을 심문하게 하니 노관은 더욱 두려워하여 문을 닫고 들어앉아 숨어 살면서 그의 측근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유씨가 아니면서 왕으로 있는 사람은 나 혼자뿐이다. 지난 해 봄에 한나라는 한신의 삼족을 멸하고 여름에는 팽월을 베어 죽였다. 이것은 모두 여후의 계략이다. 지금 황상께서는 병이 들어 나라 일을 여후가 처리하고 있는데 여후는 부인이기 때문에 유씨 성이 아닌 왕과 큰 공이 있는 신하를 죽이는 것을 일삼고 있다.”
세상에는 비밀이 없다는 말이 있듯이 이 말이 누설되고 말았다. 벽양후가 이 이야기를 임금에게 보고하자 고조는 더욱 노하게 되었다. 이럴 즈음 흉노에서 항복해온 자가 말하기를 “장승(張勝)이라는 자가 도망하여 흉노에 와 있는데 연왕 노관이 보냈다 합니다.”라고 하였다.
장승은 애당초 노관이 흉노에게 보낸 간첩이었다. 그러나 보기에 따라서는 그가 흉노와 모의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노관이 과연 배반했구나!”
고조는 번쾌로 하여금 연나라를 토벌하게 하였다. 연왕 노관은 그의 궁인·가족들과 수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장성 아래에 있으면서 상황을 보고 있다가 임금의 병이 나으면 자신이 직접 들어가 사죄하려 하였으나 4월에 고조가 죽자 그의 한 가닥 희망은 무산되고 말았다. 노관은 할 수 없이 그의 무리를 거느리고 흉노 땅에 들어가 항상 한나라에 돌아가기를 생각하다가 1년 후 그곳에서 죽었다.
새로운 연왕에는 고조의 막내아들 유건(劉建)이 임명되었다.
노관의 사건은 고조가 고향인 패에서 〈대풍가〉를 노래한 후 장안에 돌아온 뒤에 일어났다.
“고조가 백마를 잡아 군신들과 피를 마시며 맹약하기를 ‘유씨 성이 아닌 사람을 왕으로 세우면 천하가 함께 쳐 없앨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 말은 우승상 왕릉이 한 말이라고 하여 《사기》 〈여후본기〉에 실려 있다.
이런 맹약이 언제 이루어졌는지는 확실히 알 수 없으나 장사왕(長沙王) 등 몇몇 사람의 예외를 제외하고는 고조가 죽기 몇 개월 전에 유씨 성이 아닌 왕은 한 사람도 남지 않고 모두 숙청되었다. 한신이 초왕에서 회음후로 강등되어 주발 등과 같은 서열에 서게 된 것을 매우 부끄럽게 여겼다. 그러면 왕과 후와는 어떤 차가 있는지 한번 알아보기로 하자.
역사적으로 볼 때 주나라 봉건제의 후유증은 춘추·전국의 난세를 가져왔고, 진의 군현 제도의 후유증은 진왕조의 급속한 붕괴를 가져왔다. 한나라는 이들 두 제도의 장점을 따고 단점을 버리는 제도를 채택하여 번병(藩屛)각주3) 을 두기로 하였다. 이들 번병들은 왕조가 멸망하면 자신들도 따라 멸망할 것이기 때문에 목숨을 바쳐 그 영지를 지키려 할 것이다. 그러나 그 나라의 규모가 너무 비대해서는 안 되고 요소요소에 적당한 크기의 나라를 세우고 그곳에 황족을 왕으로 세운다는 것이 한나라의 기본 정책이었다.
한신이 격하된 후 초나라는 두 나라로 나뉘어 회동의 3군 53현은 형왕 유가에게, 설·동해·팽성의 3군 39현은 초왕 유교에게 주었으니 그 규모는 훨씬 적어진 셈이다.
이들 왕의 나라에는 각각 정승을 비롯하여 관료 기구를 중앙 정부와 똑같이 두어 중앙 정부의 축소판이라 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제도는 독립성이 비교적 강하여 그 후 한제국은 이 때문에 고통을 겪어야 했다. 그리고 왕들은 당연히 자기 나라에서 독립된 정치를 하고 이따금 황제에게 입조하기로 되어 있었다.
황실의 번병이기 때문에 나라마다 당연히 군대를 둘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 군대의 동원권은 황제에게 있었으며 정승도 중앙 정부에서 임명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따라서 제도상으로는 완전한 독립 왕국이 될 수 없었고 중앙 정부에서도 이탈할 수 없도록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 있었다.
왕에 대하여 후는 진나라 제도를 답습한 것으로써 20등작(等爵)의 최고 지위이다. 이 최고의 작칭(爵稱)을 ‘철후(徹侯)’라고도 불렀다. 이 철은 ‘통(通)’과 같은 뜻으로 ‘통한다’는 뜻이다. 위로 천자와 직통한다는 뜻이다. 20작의 사람은 신하로서는 그 이상 높은 자가 없으므로 직접 위로 천자와 연결된다는 데서 그렇게 불리었다.
고조의 증손에 해당하는 무제(武帝)의 이름이 철(徹)이었기 때문에 천자의 이름을 피하기 위하여 ‘철후’를 통후(通侯) 혹은 열후(列侯)로 바꿔 부르기도 한다.
한신은 초왕에서 회음후로 강등되었는데 회음은 현의 이름이다. 현에 봉해지면 그 현을 후국(侯國)이라 불렀는데 똑같이 나라라 불러도 왕의 나라와 후의 나라와는 하늘과 땅의 차이가 있었다. 초왕 시절의 한신은 6군 89현의 주인이었는데 회음후 시절의 한신은 1개현의 주인에 불과하였으니 그 차이를 실감할 수 있다.
열후의 명칭은 그 봉해진 고을의 이름을 맨 앞에 붙여 부르는 것이 원칙이었다. 소하는 찬현(酇縣)에 봉해졌기 때문에 찬후(酇侯), 조참은 평양현(平陽縣)에 봉해졌기 때문에 평양후라 불렸다.
같은 열후이면서도 그 봉호(封戶)각주4) 의 수에는 차이가 있었다. 유후(留侯) 장량은 1만 호, 조참은 1만 6백 호, 소하는 8천 호, 번쾌는 5천 호, 항우를 끝까지 추격하여 공을 세운 여마동은 1천 5백 호, 연왕 장도의 모반군을 토벌한 부장 선호(宣虎)는 9백 호였으니 많은 차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봉호로부터 징수하는 세금이 열후의 수입이 되기 때문에 호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수입이 많아진다. 그러나 열후는 반드시 봉해진 고을에 가서 그 고을을 다스리지 않아도 되었다. 소하·조참·장량과 같은 중요 인물들은 계속해서 고조의 곁에 있으면서 정치를 보좌하였다.
20등작의 최고 관직인 열후 다음인 19등작의 작명은 관내후(關內侯)이다. 열후가 봉해진 고을 이름을 붙여 부른 데 반하여 관내후는 그냥 관내후라고만 불렸다. 이들 관내후에게는 일정한 봉지(封地)가 없이 다만 관내에 거주하면서 자기가 봉해 받은 호수에서 징수한 세금에 해당하는 조세를 받을 뿐이었다. 개중에는 수천 호를 받는 관내후도 있어 수백 호의 열후보다 경제적으로는 윤택한 사람도 있었으나 열후와 관내후와의 지위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보통 제후(諸侯)라고 말하면 제국의 왕과 열후만을 지칭하는 것이고 관내후는 포함되지 않는다.
고조 일대에 열후에 봉해진 공신은 《사기》에는 백여 명, ‘고조 공신 후자 연표’에는 공신 137명, 기타 외척과 왕자를 합쳐 143명으로 되어 있다. 왕자 가운데 한 사람은 왕위를 계승하게 되지만 다른 왕자는 열후로 봉해진다. 천하를 평정한 후 고조 6년부터 봉작을 주기 시작하였으니 고조가 죽기까지 7년 동안에 143명이 봉작을 받은 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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