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이야기 중국
사1
은주시대

서주의 쇠퇴

주공 단이 죽은 후 성왕은 선왕들의 유업을 계승하여 오로지 정사에만 정진했고 그 뒤를 이은 강왕(康王) 역시 어진 정사를 펴 40여 년 동안 형벌이 없었다고 한다. 주공의 7년 동안의 섭정으로부터 강왕의 시대까지가 주나라의 황금 시기로 꼽히고 있다.

강왕 뒤에 소왕(昭王), 소왕 뒤에 목왕이 뒤를 이었다. 소왕은 남쪽으로 사냥 나간 후 돌아오지 않았다. 《사기》에는 이 소왕의 죽음에 대해 ‘소왕 남쪽으로 순수(巡狩) 나갔다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강 위에서 죽었는데 이 사실을 천하에 공포하지 않고 숨기다.’라고만 기록하고 있다.

북을 치며 앉아 있는 사람 인형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소왕이 강 위에서 죽었는데 이 사실을 천하 제후에게 알리지 않았다는 것은 아무래도 그의 죽음에 의문을 갖게 한다.

일설에 의하면 형초(荊楚, 호북과 호남) 사람이 백치(白雉, 흰꿩)를 바치려 하자 소왕이 친히 나가 백치를 받기 위해 남쪽으로 거동하였다. 소왕이 한수를 건널 때 어떤 자가 계획적으로 그 배의 밑바닥에 구멍을 뚫고 아교와 흙을 뭉쳐 구멍을 막았는데 배가 강 중류에 도달했을 무렵 막았던 아교흙이 녹아 구멍이 뚫리면서 배가 침몰했다고 한다. 이 이야기는 《죽서기년》에 실려 있다고 ‘천문’의 주에 인용하고 있는데 사실은 《죽서기년》에는 그러한 내용이 실려 있지 않고, 다만 초나라를 정벌했다는 기사에 ‘육사(六師, 6개 군단)를 한수에서 잃었다.’라는 패전을 암시하는 내용이 있을 뿐이다.

《여씨춘추》에는, ‘소왕이 친히 군사를 거느려 형(荊)을 정벌할 때 기골이 장대하고 힘이 장사인 신여미(辛余靡)라는 장수가 왕을 호위했다. 돌아오는 길에 한수를 건너는데 다리가 무너져 소왕과 채공(蔡公)이 한수에 빠지자 신여미가 급히 왕과 채공을 구하여 무사히 환궁하게 되었다. 소왕은 신여미의 공로를 치하하여 서책(西翟)의 제후로 삼았다.’고 기록되어 있다.

소왕은 어찌해서 백치를 궁에서 가만히 앉아서 받지 않고 그것을 친히 받기 위해 거동했다가 물에 빠져 죽었을까? 《죽서기년》이나 《여씨춘추》의 기록에 의해 추측한다면 소왕이 원정나갔다가 죽었을 가능성이 짙다. 만약 물에 익사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싸움에 패하여 달아나다가 죽었을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차마 제후들에게 알릴 수가 없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소왕이 죽자 태자 목왕(穆王)이 즉위했다. 목왕은 주나라의 전통적인 팽창 정책에 따라 자주 친정(親征)에 나섰는데 아버지 소왕이 남방 정벌에서 실패하고 목숨까지 빼앗긴 것을 거울삼아 주로 서북쪽을 정벌의 대상으로 삼아 번번이 승리함으로써 눈부신 발전을 보였다.

곤륜산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그 밖에 목왕이 서방을 순력(巡歷)하는 가운데 곤륜산에 올라 서왕모를 만났다는 전설이 있다. 이 같은 전설은 당시 크게 번영했던 시대적 배경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 전설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재능과 용기가 뛰어난 목왕은 천하를 두루 노닐고자 하여 여덟 마리의 준마가 끄는 수레를 타고 일대의 인마를 따르게 했다. 수도를 떠나 위수를 지나 맹진을 거쳐 태행산 서쪽을 통과하여 음산 기슭에 도달하였다. 그곳에서 진로를 서로 바꾸어 긴 여정에 올랐다. 굽이굽이 굽이치는 황하를 따라 상류로 거슬러 올라가 높이 솟은 곤륜산에 올랐다. 다시 서쪽으로 수천 리를 지나 마침내 서왕모(西王母)가 산다는 신선의 나라에 도착하였다.
서왕모는 경치가 아름답기로 유명한 요지(瑤池)에서 성대한 잔치를 베풀어 목왕 일행을 대접하였다. 풍악이 울리고 환영 분위기가 넘쳐 흐르자 목왕은 서왕모에게 중원 특산품인 비단을 선물로 전하였고, 서왕모는 그 답례로 그 지방의 보물을 바쳤다. 다시 서왕모는 목왕을 그녀의 나라에서 가장 경치가 아름다운 곳으로 안내하자 목왕은 ‘서왕모의 산’이라고 쓴 친서를 내리고 기념 식수를 하였다.
작별의 순간이 다가오자 두 사람은 서로 이별을 아쉬워하였으며 서왕모는 재삼 목왕에게 술을 권하면서 “폐하 오래오래 사시옵고 다시 한 번 오시옵소서.”라는 작별의 노래를 불렀다. 이로써 목왕 일행은 왕복 3만 5천 리의 여행 끝에 중앙아시아와 광대한 서역 사람들에게 깊은 우정을 심고 귀국하였다.
서왕모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서기 281년에 현재의 하남성 급현(汲縣)의 고분에서 죽간에 새겨진 글이 대량으로 출토되었는데 이 가운데 목왕의 고사를 적은 글이 한 권 발견되었다. 이 책은 후에 《목천자전(穆天子傳)》이라고 불렸는데, 서주(西周)가 경제적·문화적으로 번영하여 서방과 경제·문화의 교류를 했다는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었다.

이 이야기는 역사적 사실로 인정하기는 어려우나 주의 목왕이 중국에서 가장 먼저 여러 나라를 돌아다닌 저명한 인물로 숭앙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후세 시인은 이 목왕과 서왕모의 고사를 시로 읊어 그들을 동경하였다.

요지(瑤池)의 서왕모가 비단 창문을 활짝 여니
피리 소리 구슬피 땅을 울리네
여덟 마리 준마는 하루에도 삼만 리를 달릴 수 있으련만
목왕은 무슨 일로 다시 올 줄을 모르는가

瑤池阿母綺窓開
黃竹歌聲動地哀
八駿日行三萬里
穆王何事不重來
목왕팔준도

목왕이 여덟 마리의 말이 끄는 수레를 타고 천하를 주유하는 그림. 《제왕도감(帝王圖鑑)》 삽화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목왕 다음에 그의 아들 공왕(共王)이 즉위하였다. 공왕은 매우 여행을 즐기는 인물이었다. 어느 날 사냥을 나갔다가 경수(涇水) 근처까지 가게 되었다. 경수는 위수(渭水)의 부근으로 그곳에는 밀국(密國)이라는 소국이 있었다. 밀국의 영주 강공(康公)은 공왕을 정중히 맞아들이고 잔치를 베풀었다. 강공의 곁에는 아름다운 세 미녀가 시중을 들고 있었는데 공왕은 이 미녀에게 눈독을 들였다. 강공의 어머니는 공왕의 속마음을 짐작하고 강공에게 그 미녀를 공왕에게 바치라고 눈짓했다. 그러나 강공은 듣지 않았다. 얼마 후 공왕이 강공에게 그 미녀를 달라고 하자 강공은 “안 될 말씀이오, 나도 놓치기에는 너무 아깝소이다.”라고 강력하게 거부하였다.

공왕은 노하여 무력으로 밀국을 토멸해버렸다. 사소한 여자 문제로 제후국을 함부로 공격했으니 이로 미루어 볼 때 주나라의 왕도가 무너지기 시작했음을 알 수 있다.

공왕으로부터 3대째에 여왕(厲王)이 즉위하였다. 그는 약해져가는 주왕실의 세력을 만회하기에 힘썼다. 목왕 이후의 선왕들은 너무 소극적이었기 때문에 그는 주공이 정치 이상으로 삼았던 ‘순리를 따라 무리하지 않는다.’는 원칙을 무시하고 적극적인 정책을 취했다.

그는 주왕실을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우선 수입을 증대시켜야 한다고 생각하고 이재(理財)에 밝은 이공(夷公)을 등용하였다. 이공은 원래 영국(榮國)의 공작(公爵)이었는데 그의 수입 증대 방안은 노골적인 착취 수단이었기 때문에 영국의 영민(領民)들로부터 불만을 많이 사고 있는 인물이었다. 현명한 대부 예양부(芮良夫)는 “만약 이공(夷公)이 영국에서 착취하던 방법으로 주왕실을 재건하려고 한다면 위험천만한 일이라 생각되옵니다.” 하고 간하였으나 여왕은 듣지 않았다.

이공의 착취는 극도에 달하고 있었다. 착취의 대상은 귀족·제후·일반인을 가리지 않았다. 일반 서민의 불만은 말할 것도 없고 왕실과 제후와의 관계도 점점 험악한 상태에 이르고 있었다. 건국의 으뜸 공신이며 주왕실에 대한 충성도가 가장 높은 가계(家系)를 자랑하는 소공(召公)은 가만히 보고만 있을 수 없어 “이러한 정치를 하다간 멀지 않아 백성들은 어떠한 명령도 따르지 않을 것이며 제후들도 주왕실을 종주국으로 받들지 않을 것입니다.” 하고 간하였다. 이에 여왕은 크게 노했다.

“주나라를 부흥시킬 사람은 나밖에 없소. 이 나라를 부강케 하려면 비상 수단을 쓰는 것도 부득이한 일이요.”

그는 자기를 비방하는 자가 많음을 알고 이를 막기 위해 공포 정치를 구상해냈다.

여왕은 위(衛)나라에서 무당을 불러오게 하였다. 위나라는 옛 은나라의 도읍지로 그곳의 무당은 은나라 건국 이래 신령시되어 오던 존재였다. 그 무당은 모든 일을 신령처럼 꿰뚫어보는 것으로 여겨 왔던 것이다. 그 무당은 이른바 절대자격인 특무장관으로서 그가 고발하는 사람은 그것으로 끝장이었다.

이로써 비방하는 사람은 줄어들었으나 제후들은 입조하기를 꺼렸고 백성들은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친한 사람을 만나도 말을 못하고 눈짓으로 한없는 원망을 주고받는 형편이었다. 여왕은 만족해했다.

“어떻소? 내 정치하는 솜씨가. 나를 비방하는 자가 사라졌으니.”

소공은 기가 막혔다.

“백성의 입을 막는다는 것은 둑으로 물을 막는 것보다 더 어렵습니다.”

둑을 쌓아 아무리 물을 막으려 해도 일단 둑이 무너지면 겉잡을 수 없는 것처럼 평소에 물을 방류(放流)하여 둑이 무너지지 않도록 적당히 조절해야 한다. 만약 위험 수위 이상으로 올라가면 둑이 무너져버린다는 뜻이다.

전형적인 서주 후기의 모공정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이런 상태가 3년 계속되었다. 마침내 백성들의 불만은 폭발하고 말았다. 그들은 일제히 일어나 여왕을 습격했다. 여왕은 체(彘)로 도망가고 ‘공화(共和)’ 시대가 시작되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이 해부터 연표를 만들고 있다. 즉 공화 원년은 기원전 841년 경신년(庚申年)으로 그 후부터는 한 해 한 해가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사마천이 어째서 이 해부터 연표를 만들었는지 자세히 알 수는 없으나 아마도 그 이전의 연대는 확실성이 없었기 때문으로 해석된다. 사마천이 수집한 자료에는 그 이전의 역사에 관한 확실한 기록이 없었던 것으로도 생각된다. 추측컨대 여왕 말년의 민중 봉기는 그야말로 천하의 대란으로서 모든 역사적 기록이 불타버린 것인지도 모른다. 이 공화 원년을 경계로 하여 역사의 명암(明暗)이 칼로 그은 듯이 확실했다.

편종

주나라 귀족들이 제사나 향연 때 사용한 중요한 악기였다.

ⓒ 청아출판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여왕은 공화 14년, 망명지에서 죽고 태자 정(靜)이 즉위했다. 여왕이 망명한 후의 공화 14년의 내용에 대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먼저 《사기》에 실린 내용을 소개하면, 망명한 여왕의 아들(후의 宣王)이 아직 어렸기 때문에 주왕실의 동량격인 구공과 소공이 ‘서로 의논하여’ 정치를 했다는 것이다.

반란군은 여왕의 아들을 죽이려 하였으나 소공이 자기의 아들과 바꿔 왕자를 살렸다고 《사기》에 기록하고 있다.

군주가 아닌 두 사람의 재상이 서로 의논하여 정치를 했기 때문에 공화라고 한다는 것이 《사기》의 내용이고, 《죽서기년(竹書紀年)》에는 ‘공백화(共伯和) 왕위를 간(干)함’이라고 기록하고 《사기색은(史記索隱)》에 간(干)은 찬(簒, 찬탈)의 뜻이라고 풀이하고 있다.

왕위를 간(干)했다는 문장의 내용을 왕이 없었기 때문에 누군가가 행정의 책임자로서 왕을 대신하여 섭정을 한 것으로 생각할 수 있다. 또 왕국유(王國維, 1877~1927)의 《금본 죽서기년소주(今本竹書紀年疏註)》에는, ‘공백화(共伯和) 천자의 일을 섭행(攝行)하다.’로 기록하고 있다.

위에서 말한 ‘서로 의논하여’란 공화(共和)의 뜻은 어딘가 어색한 감이 없지 않다. 차라리 공백(共伯)의 화(和)라는 대신이 왕위를 찬탈했거나 섭정했다고 해석하는 것이 더 온당할 것 같다.

《여씨춘추》와 《장자》에서는 공백화설을 지지하고 있다. 중국 역사학계에서도 《사기》의 설을 주장하는 파와 《죽서기년》의 설을 주장하는 두 파로 갈라져 있다.

선왕(宣王)은 천성이 영매하였다. 어진 신하를 등용하여 주나라의 부흥에 힘쓴 결과 그의 초기에는 많은 발전상을 보였으나 후기에는 다시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선왕 39년 서쪽 오랑캐 강융(羌戎)이 배반하자 선왕이 친정에 나섰으나 대패하였다. 선왕은 이 패배를 설욕하기 위하여 태원(太原, 산서성) 지방에 호구조사를 실시하여 군대와 인부를 징용하고 세금을 징수하였다. 대신들이 싸움의 불리함을 간했으나 듣지 않았다.

43년에는 왕명을 거역했다는 이유로 충신 두백(杜伯)을 참수했다. 두백의 친구 좌유(左儒)는 “임금의 잘못을 밝히고 두백의 무죄함을 밝히겠다.” 하고 두백의 뒤를 이어 자결하고 말았다. 좌유의 자살 소식을 들은 선왕은 두백을 죽인 일을 후회하였다. 일찍이 두백이 참수당할 때 다음과 같은 말을 했다.

“임금은 나를 죽여도 죄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죽은 자에게 영혼이 없으면 몰라도 만약 영혼이 있다면 나는 3년 후에 기필코 임금에게 영혼이 있음을 보여주리라.”

그로부터 3년 후 선왕이 제후들을 거느리고 포전(圃田)으로 사냥을 나갔다가 두백의 망령과 마주친 것이다.

선왕이 옥연을 타고 가다가 언뜻 멀리 바라보니 조그마한 수레가 차츰 이쪽으로 달려오는데 끄는 말과 수레가 모두 흰색이었다. 그 안에 새빨간 옷에 새빨간 관을 쓰고 새빨간 활과 화살을 가진 두 사나이가 나란히 앉아 가까이 다가오며 “대왕은 그 후 별일 없으시오.” 하고 인사를 하는 것이다.

선왕이 깜짝 놀라 그들을 자세히 보니 두백과 좌유가 분명했다. 선왕이 눈을 비비고 다시 바라보려는 순간 수레는 보이지 않았다. 좌우의 시종들에게 물었으나 아무도 그것을 보았다는 사람은 없었다. 어쩌다 바라보니 두백과 좌유는 또다시 수레를 타고 연의 좌우를 맴도는 것이었다. 선왕이 노하여 보검을 빼어 그들을 치려 하자, “무도한 혼군(昏君)아! 임금의 덕은 닦지 않고 함부로 충신을 죽이는가. 혼군의 운수는 이미 다 되었다. 우리는 이제 잃었던 목숨을 찾으리라.” 하며 붉은 활에 붉은 살을 메겨 선왕의 심장을 향해 쏘았다. 선왕은 큰 소리로 비명을 지르며 옥련 위에서 기절해버렸다. 시종들이 응급조치를 취하여 어느 정도 회복되었으나 3일 후 선왕은 노신 윤길보(尹吉甫)와 소호(召虎)가 지켜보는 가운데 죽고 유왕(幽王)이 그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김희영 집필자 소개

서울에서 태어나 한문사숙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충남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저서로 《이야기 일본사》, 《이야기 중국사》가 있다.

출처

이야기 중국사1
이야기 중국사1 | 저자김희영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중국 고대부터 전한 시대까지의 역사를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함께 이야기 식으로 풀어 썼다. 엄청난 인구와 광대한 국토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이야말로 진정한 중국의 힘이며,..펼쳐보기

전체목차
전체목차
TOP으로 이동


[Daum백과] 서주의 쇠퇴이야기 중국사1, 김희영, 청아출판사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