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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1 진나라의 흥망
항우의 마지막 싸움
항우군은 군사적으로 우세했지만 동정서벌 왔다갔다 하느라 완전히 지쳐버렸다. 더구나 안정된 후방 기지가 없어 보급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이에 반하여 유방은 군사적으로는 뒤졌지만 군사들은 휴식을 취하였고 군량도 풍족하였다.
장기적인 소모전 끝에 항우군은 점점 피폐해지고 전쟁의 주도권은 점차 한군의 수중으로 넘어왔다. 항우도 이런 불리한 정세를 인정하고 있었다. 이런 때 제왕 한신이 군사를 진격시켜 초나라를 공격하니 항우는 크게 근심하고 있었다.
유리한 입장에 선 유방은 이런 기회에 인질로 잡혀 있는 태공과 여후를 찾아오려 하였다.
한왕(유방)은 육가(陸賈)를 보내어 태공을 돌려줄 것을 청하였으나 처음 항우는 듣지 않았다. 한왕(유방)은 다시 후공(侯公)을 사자로 보내어 강화교섭을 진행시켰다.
강화의 조건으로는 홍구(鴻溝)라는 강을 경계로 하여 그 서쪽은 한나라, 동쪽은 초나라로 정하고 양군은 각각 동서로 철수하기로 하며 인질로 잡고 있는 한왕(유방)의 가족들을 돌려보내라는 것이었다.
불리한 입장에 처해 있는 항우는 이 조건을 수락하였다. 기원전 203년 9월 양군은 홍구를 경계로 천하를 양분하고 인질을 돌려보냈다.
홍구는 전국 시대에 만들어진 인공 운하로 황하와 회하의 두 강을 연결한 강이다. 지금도 하남성 형양현에 폭 3백 미터의 흔적이 남아 있으며 홍구의 양쪽 산 위에는 한왕(유방)의 진지와 항왕의 진지 유적이 남아 있다.
강화의 조건에 따라 항우는 무장을 풀고 동쪽으로 향하였다. 유방이 서쪽으로 돌아가려 하자 장량과 진평이 한왕(유방)에게 진언하였다.
“지금 한나라는 천하의 태반을 차지하고 제후들이 다 복종하고 있습니다. 반면에 초나라는 군사가 피로하고 군량이 다 떨어졌습니다. 이것은 하늘이 초나라를 망하게 하는 때입니다. 이런 기회에 초를 치지 않는다면 호랑이를 길렀다가 잡혀먹히는 꼴이 됩니다. 지금 항우를 놓아보냈다간 나중에 우리가 대항할 수 없을 만큼 큰 세력으로 자랄 것입니다.”
한왕(유방)은 이들의 말을 들어 즉시 군사를 동쪽으로 돌려 양하 남쪽까지 항우군을 추격하다가 일단 멈추고 한신과 팽월에게 사자를 보내어 각각 그들의 군사를 이끌고 고릉(固陵)에서 합류하여 초나라를 치라고 하였다.
유방의 군사는 고릉까지 진격했으나 아무리 기다려도 한신과 팽월의 군사는 도착하지 않았다. 이 사이 초나라는 한군을 공격하여 크게 한군을 깨뜨리니 한왕(유방)은 고릉성으로 도망쳐 참호를 깊게 파고 굳게 지키는 태세를 취했다.
“한신·팽월의 군대가 오지 않으니 어떻게 된 일이오?”
한왕(유방)은 답답하여 장량에게 나무라듯 물었다.
“제나라를 쳐 깨뜨린 후 그들에게는 아직 어느 땅을 주겠다는 약속이 없으니 그들이 오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대왕께서는 이들에게 영지를 베어 주어 천하를 함께할 뜻을 밝힌 다음에야 그들이 군사를 거느리고 올 것입니다. 그러니 수양에서 북쪽으로 곡성에 이르는 땅은 팽월에게 주고, 진(陳, 하남성)에서 동쪽으로 바다에 이르는 땅을 한신에게 영지로 주시옵소서. 그렇게 하여 그들로 하여금 각각 책임을 지워 싸우게 하시면 쉽게 초나라를 깨뜨릴 수 있을 것입니다.”
한왕(유방)은 다시 한신·팽월에게 사자를 보내어 영지를 주겠다는 증서를 전하고 군대를 이끌고 고릉에 오도록 하였다. 이에 한신·팽월이 모두 군대를 이끌고 고릉을 향해 남하하고 있었다.
이즈음 초나라 대사마 주은이 초나라를 배반하여 육(六)이라는 성을 함락하고 구강의 군대를 이끌고 육가와 경포를 따라 수춘으로부터 진격하여 성보(城父)를 무찌르고 해하(垓下)에 이르렀다.
항우는 해하(垓下, 안휘성 영벽현)에 진을 치고 한군과 대치하였다. 이때 항우의 군사는 10만이었다.
천하를 놓고 마지막 승부를 가리는 건곤일척(乾坤一擲)의 순간은 서서히 다가오고 있었다.
한신은 자기가 가진 모든 병력과 제후들의 군사를 모두 합쳐 30만에 이르는 군대를 진두지휘하였다. 좌익은 그의 부하 공장군, 우익은 마찬가지로 비장군, 그리고 유방의 본진 후방에는 강후와 시장군이 따랐다.
한군은 여러 겹으로 해하의 항우 진지를 포위하였다. 성내의 군량은 거의 바닥이 나고 사기는 떨어져 탈주병이 속출하였다.
한신은 해하에 모여든 여러 군사 가운데서 초나라 출신 군사들을 골라 일반 군사들에게 초가(楚歌)를 가르치게 하였다.
사면초가(四面楚歌)란 여기서 유래한 말이다. 사면에서 자기 고향 노래만 들려온다는 말로 자기를 도와야 할 고향 군사들이 모두 한군에 가담하여 고립무원의 지경에 빠진 상태를 말한다.
한신은 겹겹으로 에워싼 전군에게 초가를 부르게 하였다. 역발산 기개세의 천하장사 항우도 사면에서 들려오는 고향의 노래를 듣자 점점 마음이 약해지기 시작하였다.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다는 절박감이 머리를 어지럽혔다. 야음을 타고 점점 크게 들려오는 초가에 귀를 기울이던 항우는 크게 놀랐다.
“아, 한나라는 초의 땅을 이미 다 차지하였는가? 웬 초나라 사람들이 이렇게도 많단 말인가!”
항우는 밤중에 일어나 장막 속에서 술잔을 손에 들었다. 우희가 그 잔에 술을 따랐다. 우희는 항우가 군사를 일으킨 이래 줄곧 항우를 따라다니며 시중들던 항우의 애첩이었다.
우희는 계속해서 술을 따랐다. 그녀도 이것이 이승에서의 마지막 순간임을 짐작하고 있었다. 술기운이 항우의 몸에 돌자 그는 치밀어 오르는 감회와 비분강개한 감정을 노래에 담아 읊었다.
힘은 능히 산을 뽑고도 남음이 있고
기백은 능히 천하를 덮었노라!
때가 이롭지 못하니 오추마야 너마저 달리지 않는구나!
오추마야 너마저 달리지 않으니 어쩔 수 없구나!
우희야 우희야, 이를 어쩐단 말이냐!
力拔山兮氣盖世 時不利兮騅不逝
騅不逝兮可奈何 虞兮虞兮奈若何
오추마는 항우가 타고 다니던 애마의 이름이다. 검푸른 털에 흰 털이 섞이고 하루에 천리를 달리는 준마였다.
항우는 이 노래를 푸념처럼 읊조리며 눈물을 흘리니 좌우에 있던 사람들이 모두 울었고 감히 쳐다보는 사람이 없었다. 그 뒤 우희가 어떻게 되었는지에 대해서 정사에는 아무 언급이 없고 다만 《초한춘추(楚漢春秋)》에 우희의 화답(和答)이라 하여 다음과 같이 소개하고 있다.
한병은 이미 초나라 땅을 차지했고
사면에 들리는 건 초나라 노래 소리뿐
대왕의 기개가 다하는 날
천첩 어찌 삶을 바라리요
漢兵已略地 四方楚歌聲
大王意氣盡 賤妾何聊生
우희의 최후의 장면에 대해서 후세 문인들은 여러 가지 각색을 가했다.
우희는 항우에 대한 정절을 지키기 위해 항우의 검을 청해 받아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고도 한다. 또 항우가 자기로 인하여 번뇌할까 두려워 자결했다고도 한다. 혹은 항우가 우희에 대한 번뇌를 끊기 위해 우희의 목을 쳤다는 이야기도 전하고 있다.
그 후 우희의 무덤이라는 곳에서 가냘픈 풀이 싹터서 자라니 후세 사람들은 이 풀을 ‘우미인초(虞美人草)’라고 불렀다는 설이 있다.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항우는 큰 소리로 “자아, 포위망을 뚫고 남쪽으로 가자.”고 외치며 오추마에 올라탔다.
휘하에는 선발된 장사 8백 기가 그를 따랐다. 때는 아직 깊은 밤이었다.
항우는 포위망을 뚫고 남쪽으로 달렸다. 날이 샐 무렵에야 항우가 탈출한 것을 안 한군은 기장(騎將) 관영(灌嬰)에게 5천의 기병을 거느리고 항우를 추격하게 하였다.
남으로 달아나던 항우가 회수를 건널 무렵에는 8백 기 가운데 겨우 백여 기가 따를 뿐이었다. 도중에서 모두 탈락해버린 것이다.
항우는 한병이 급히 추격해오므로 잠시도 쉴 새 없이 말을 달려 음릉(陰陵)에 이르렀을 때 길을 잃고 말았다.
항우의 기병은 어떤 농부에게 길을 물었다. 그 농부는 손으로 길을 가리키면서 “왼쪽으로 가십시오.”라고 속여서 말하였다. 항우는 이 농부가 길을 속여서 가르쳐 준 사실을 얼마 후에야 알았지만 그때는 당장 믿을 수밖에 없었다. 농부가 일러준 대로 왼쪽으로 달리다가 늪지대로 빠져버렸다. 더 갈 수가 없어 다시 돌아와 동쪽으로 달렸다. 이렇게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 한나라의 기병대는 더욱 가까운 거리까지 추격해왔다.
항우가 동성(東城)에 이르러 따르는 자를 헤아려보니 겨우 28기에 지나지 않았다. 항우는 말을 멈추고 생각했다.
“5천의 기병이 바짝 쫓아오고 있는데 우리는 겨우 28기에 지나지 않는다. 아무리 생각해도 빠져나갈 구멍이 없구나.” 이렇게 생각한 항우는 28기의 장정을 향해 말하였다.
“내가 군사를 일으킨 이후 오늘에 이르기까지 8년이 되었다. 그동안 70여 회의 싸움에서 한 번도 패한 일이 없었는데 지금 이 같은 곤경에 처했으니 이것은 하늘이 나를 망치게 하려는 것이지 결코 싸움을 잘못한 죄가 아니다. 나는 이제 죽음을 각오했다. 마지막으로 한의 포위를 무너뜨리고 장수를 베고 기를 쓰러뜨려 3승을 거두어 그대들로 하여금 싸움을 잘못한 죄가 아님을 보여주리라.”
그리고는 한나라 장수 한 사람과 도위 한 사람을 베어 죽이고 수백 명의 한군을 죽이니 그의 부하들은 모두 감탄하며 땅에 엎드렸다.
이에 항왕은 동쪽으로 오강(烏江)을 건너려고 하였다. 오강의 정장(亭長)은 배를 대고 항우 일행을 기다리고 있다가 항우에게 말하였다.
“강동이 비록 땅이 좁다고는 하지만 사방이 천 리나 되고 인구는 수십 만입니다. 족히 왕업을 이룰 만한 곳이오니 어서 배에 오르십시오.”
항우는 웃고 나서 말하였다.
“하늘이 나를 망치려 하는데 강을 건너 무엇하랴. 나는 8년 전 강동의 젊은이 8천을 이끌고 이 강을 건너 서쪽으로 갔었다. 그러나 지금은 한 사람도 살아 돌아오지 못했으니 비록 강동의 부형들이 나를 불쌍히 여겨 왕으로 추대한들 내 무슨 면목으로 그들을 대하겠는가? 설사 그들이 아무 말을 않더라도 내 어찌 부끄러운 마음이 없겠는가? 그렇게 할 순 없지!”
이윽고 항우는 오강의 정장을 향하여 “나는 당신이 장자(長者)임을 알겠소. 이 말은 내가 5년 동안이나 탄 말인데 하루에 천 리를 달리는 천하에 둘도 없는 준마요. 차마 죽일 수가 없으니 그대는 이 말을 받아주시오.”라고 말하고 말을 그에게 넘겨 주었다.
항우는 부하를 돌아보며 “그대들도 모두 말에서 내리라. 칼 싸움으로 결전을 벌이리라.” 하였다.
항우와 그의 부하들은 칼을 가지고 추격해오는 한병들과 접전을 벌였다. 항우는 스스로 칼을 잡고 혼자서 한군 수백 명을 죽이고 자신도 10여 군데에 상처를 입었으나 굽히지 않고 혼전을 벌이던 중 낯익은 얼굴을 보았다.
“너는 내 친구 여마동(呂馬童)이 아닌가?”
항우가 소리쳤다. 여마동은 항우의 친구였는데 지금은 한의 기병 장교로 있었다. 여마동은 난처하였다. 자기를 부르는 소리에 얼굴을 돌리면서 뒤에 있던 왕예(王翳)에게 손가락으로 항우를 가리켰다.
“이 사람이 항왕입니다.”
“내 목에 천 금의 상과 1만 호의 봉후가 걸려 있다고 들었네. 내 옛정을 생각해서 그대에게 공덕이나 베풀고 죽겠노라.”
항우는 이렇게 말하고 마침내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
여마동으로부터 항우임을 확인한 왕예가 먼저 항우의 목을 낚아채자 나머지 기병들도 서로 달려와 항우의 시체를 차지하려고 서로 다투어 짓밟혀 죽은 자가 수십 명에 이르렀다.
결국 항우의 몸은 다섯 동강이로 나누어졌다. 목을 차지한 왕예는 두연후에 봉해지고, 여마동은 중소후, 양희(楊喜)는 적천후, 양무(楊武)는 오방후, 여승(呂勝)은 영양후로 봉해졌다.
항우가 죽음으로써 4년 여에 걸친 한·초전은 그 막을 내렸다. 진승·오광이 봉기한 이래 진나라 타도의 수훈갑은 항우였으나 마지막 승리의 열매를 거둔 것은 한왕(유방) 유방이었다.
진승·오광이 봉기한 것은 진의 2세 원년(기원전 209)의 일이고, 항우가 오강에서 최후를 마친 것은 한 5년(기원전 202)의 일이다. 항우의 죽음으로 초나라 땅은 거의 다 평정되었으나 아직 노나라가 항복하지 않았다.
한왕(유방)은 노나라를 치기 위해 대군을 이끌고 성 가까이 이르러 보니 은은한 풍악 소리와 글 읽는 소리가 들려 왔다.
“노나라는 예의를 지키고 절의에 죽는 기풍이 있다 하더니 과연 그런 모양이다. 무력으로 항복시키는 것보다 사세로써 설득하여 항복시키는 것이 좋겠다.” 하고 사자에게 항우의 목을 가져가 노나라 부로들에게 돌려 보이고 항복을 설득하였다.
이렇게 해서 노나라는 피를 흘리지 않고 항복하였다.
한왕(유방)은 항우를 노공(魯公)의 예로서 곡성(穀城)에 장사지냈다. 이때 한왕(유방)은 눈물을 흘려 슬퍼하였고 항우의 일족을 모두 사면하는 한편 홍문의 위기에서 자신을 구해준 항백을 사양후(射陽侯)에 봉하고 유씨 성을 주었다. 한왕(유방) 유방은 그 길로 정도에 이르러 제왕 한신의 진영에 달려들어가 그 군사를 모두 빼앗았다.
1월에 제후와 군신들은 모두 한왕(유방) 유방에게 황제의 자리에 오를 것을 간청하였다. 유방은 형식상 세 번 사양한 후 황제 자리에 오르기로 하였다.
2월 갑오(甲午)에 범수(氾水, 정도 서북쪽) 남쪽에서 황제의 즉위식이 거행되니 이로써 한왕(유방)조가 정식으로 출범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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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항우의 마지막 싸움 – 이야기 중국사1, 김희영,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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