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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1 전한시대
외척의 시대
창읍왕의 뒤를 이어 황제의 후보 물망에 오른 사람은 비운의 황태자 유거의 손자 병이(病已)이다. 황태자가 호현에서 억울한 최후를 마치자 옥중에서 여죄수의 젖을 먹고 자란 아이였다.
이렇듯 민가에서 자란 무관(無官)의 인물을 그대로 황제로 옹립하는 데는 문제점이 있어 일단 양무후(陽武侯)로 봉하는 절차를 거쳐 황제 위에 오르게 되었다. 이 이가 바로 현명한 황제로 칭송되는 선제(宣帝)이다. 18세에 즉위하여 43세에 죽기까지 25년간 재위하였는데, 이 25년은 한나라에 있어 태평을 구가하는 시대였다.
문제·경제의 시대가 무제의 비약을 위한 휴식과 축적의 시대였다면, 소제·선제 시대는 무제 55년의 ‘대약진’ 후의 휴식과 정리의 시대였다고 할 수 있다. 대장군 곽광은 새로 즉위한 선제에게 머리를 조아려 모든 정사를 봉환(奉還)할 것을 청원하였다. 이렇게 한 것은 자신이 아무런 야심도 엉뚱한 생각도 없다는 것을 보이기 위해서였다.
선제는 겸양하여 이를 받지 않고 “모든 일은 먼저 곽광에게 말한 다음에 과인에게 아뢰라.”라고 명하였다. 무슨 일이든 먼저 곽광에게 전한 다음에 황제에게 아뢰라는 것은 얼핏 생각하기에 황제가 정사를 포기하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모든 책임을 곽광에게 떠맡기는 것으로도 생각할 수 있다. 아무리 선제가 친정을 하려 해도 민간에서 자란 그에게는 정치를 담당할 만한 능력 있는 심복이 없었으니 어차피 곽광의 손에 넘길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었다. 이런 면에서 선제의 탁월한 판단력을 엿볼 수 있으며 또 한 가지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일은 민간으로 있을 때 아내로 삼았던 허씨(許氏) 부인을 황후로 세웠다는 점이다. 곽광에게 딸이 있어 그녀를 황후로 세우려는 기미를 미리 알아차리고 선수를 쳤던 것이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이 허황후는 본시 2년(기원전 71) 임신한 몸으로 여의사 순우연(淳于衍)이 바친 환약을 먹고 독살되었다. 곽광의 아내가 여의사를 시켜 황후를 독살했던 것이다.
얼마 후 곽광의 막내딸 성군(成君)이 황후로 세워졌다. 곽광의 외손녀는 황태후이고 딸은 황후이니 정략적 결혼의 복잡성을 여기에서 실감할 수 있다.
지절 2년(기원전 68) 곽광은 병사하였다. 그가 병석에 있을 때 선제는 병상에 친히 나아가 문병하였다. 곽광은 감격한 나머지 눈물을 흘리며 글을 올려 자신이 가지고 있는 고을 가운데서 3천 석지기의 땅을 그의 형 곽거병의 손자 곽산(霍山)에게 나누어주어 열후에 봉하고 곽거병을 제사지내게 해줄 것을 청원하였다. 얼마 후 곽산은 낙평후(樂平侯)에 봉해졌다.
곽광의 아들 곽우(霍禹)는 우장군이 되어 그의 아버지 곽광의 봉읍을 계승하고 곽거병의 손자 곽산은 열후가 되어 상서의 직에 임명되었다. 이것은 자못 공평한 조치인 듯 싶었으나 사실은 곽광 한 사람에게 집중되었던 실권을 분산시키기 위한 선제의 배려였다.
즉위한 지 6년이 지난 선제는 이미 친정의 준비를 완전히 갖추고 있었다. 곽씨 일족의 보좌 없이도 한제국을 충분히 경영할 수 있는 확신을 가지게 되었다.
곽광이 죽은 다음해인 지절 3년에 마침내 선제는 그 실력을 발휘하기 시작하였다. 독살당한 허황후 소생의 석(奭)을 황태자로 세운 것이다.
곽광의 미망인은 분통이 터진 나머지 피를 토하고 그의 딸인 황후에게 황태자 석을 독살하도록 권하였다. 그러나 황태자가 음식을 먹을 때는 반드시 독의 유무를 확인하기 위하여 시식하는 관원이 그림자처럼 황태자 곁에 붙어 있어 이를 실행하지 못하였다.
선제는 허황후의 죽음이 독살이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곽씨 일족에 대한 경계심을 게을리하지 않았고 특히 석을 황태자로 세운 것은 곽씨 일족에 대한 도전이기도 하였다.
이어서 제2차 도전이 실행되었다. 군신 가운데 황제에게 상주할 일이 있는 자는 상서를 거치지 않고 직접 상주할 수 있다는 조치를 내렸다. 이로 인하여 절대적인 권한을 갖고 있던 상서직은 사실상 무력화되고 말았다. 이것은 곽씨에게 불리한 상주문을 묵살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제3의 도전은 거기 장군과 우장군의 둔병(屯兵)각주1) 을 해산시킨 일이었다.
“오랫동안 백성을 수고롭게 하는 것은 천하를 편안히 하는 도리가 아니다.”라고 하여 백성을 휴식시켜야 한다는 것이 해산의 이유이었다. 당시 우장군은 곽우이고, 거기 장군은 장안세(張安世)였다. 장안세는 곧바로 위장군(衛將軍)에 임명되었으나 곽우는 대사마(大司馬)의 관직만 주어졌을 뿐 인수도 없고 지휘할 군대도 없었으니 곽우의 실권을 빼앗기 위한 조치에 지나지 않았다.
다음에는 군대의 지휘권을 가진 곽씨 친척들을 모두 전근시켜 촉군이나 무리군 등 변경 지방의 문관직에 임명하고 그들이 지휘하던 군대를 허황후의 일족과 사가(史家, 선제의 조모 친정)의 젊은 자를 골라 그들로 하여금 통솔토록 하였다. 막다른 궁지에 몰린 곽씨 일족은 쿠데타를 일으켜 정세를 만회하려 하였다. 그들은 먼저 황태후의 이름으로 승상과 허황후의 아버지를 연회장에 초대하여 그 자리에서 죽인 다음 선제를 폐하고 곽광의 아들 곽우를 황제로 세울 음모를 꾸몄다. 그러나 이 쿠데타 음모는 사전에 발각되어 곽씨 일족은 주살되고 곽광의 미망인까지 죽임을 당하였다. 이는 허황후를 독살한 데 대한 보복이었다.
외척에 강력한 인물이 나타나면 그 인물의 권력이 황제를 능가하는 것이 일반적인 경향이었다. 오래 전 일로는 여씨 일족이 그러했고 최근의 일로는 곽씨 일족이 그러했다. 그들은 모두 권력을 상실했을 때 비참한 최후를 마쳐야 했다. 전한은 마침내 외척의 세력에 의해 멸망하게 되었는데 한나라를 찬탈한 자는 외척 왕망(王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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