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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야기 중국
사1
춘추전국시대

오월의 패권 다툼

미병 회담이 열린 후 소강 상태가 계속되는 가운데 중원 남쪽에서는 오나라와 월나라가 등장하였다. 오·월의 등장은 중원에 커다란 변화를 가져왔으며 중원의 입장으로서는 한숨 돌리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중원의 강대국이었던 진(晋)나라는 춘추 시대 말기에 이르러 정치가 문란하여 유력한 가신(家臣)들이 권력 다툼을 벌이고 있었다. 진의 평공(平公) 16년(기원전 536) 제나라 안영(晏嬰)이 사신으로 갔을 때 진나라 대부 숙향이 말했다.

“진나라는 말세입니다. 평공(平公)이 정사는 돌보지 않고 세금을 무겁게 거두어 누각이나 정원을 가꾸는 데만 힘쓰고 정치는 가신들이 하고 있으니 어찌 오래 가겠습니까!”

이보다 앞서 5년 전에 오나라 계찰(季札)이 사신으로 진나라를 방문했을 때 조문자(趙文子)·한선자(韓宣子)·위헌자(魏獻子)의 세 대신을 만나보고 “진나라는 이 세 사람에게 돌아가게 될 것이다.”라고 말할 정도로 정치가 극도로 문란해 있었다.

오나라 수몽(壽夢) 2년(기원전 585)에 진(晋)에서 신공(申公) 무신(巫臣)이란 사람이 오나라에 파견되었다. 원래 무신은 초나라 대부였는데 초나라 장군 자반(子反)과 대립하다가 진(晋)나라에 망명한 사람이었다. 초나라와 진나라는 적대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무신의 망명은 진나라에 초나라의 비밀 정보를 알리는 결과가 되었다. 무신은 진나라에 오자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초나라 동쪽에 오(吳)라는 나라가 있사온데 그 형세 매우 강성하여 초나라로선 눈 위에 혹과 같은 존재입니다. 만약 진나라에서 오나라를 돕는다면 초나라는 북진을 포기할 것입니다.”

오나라 세력이 강성해지는 것은 진나라로선 매우 바람직한 일이었다. 초나라에 대한 오나라의 압력을 더욱 강화하기 위해서 무신이 파견된 것이다. 무신의 임무는 기술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병법이나 무기 개발 등은 확실히 중원의 나라들이 오나라보다는 훨씬 앞서 있었기 때문에 오나라에서는 열심히 병법은 물론 중원의 선진 문화를 흡수하기 위해 박차를 가하고 있던 시기였다.

오나라의 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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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몽과 그의 아들 제번(諸樊)의 시대에 오나라는 초나라와 가끔 전쟁을 하였으며 제번은 그의 13년(기원전 448)에 초나라와 싸우다가 화살에 맞아 전사하기도 하였다.

수몽에게는 아들이 넷 있었다. 제번(諸樊)·여제(餘祭)·여매(餘昧)·계찰(季札)의 순이었는데 그중에서 막내인 계찰이 특히 현명하였다. 수몽이 죽자 그 뒤를 이을 장자 제번은 곧바로 계찰에게 양위하려고 했을 정도로 계찰은 걸출한 인물이었다. 계찰을 후계자로 삼으려는 것은 그의 아버지 수몽의 유지였을 뿐만 아니라 오나라 백성들의 소망이기도 하였으나 계찰은 이를 끝까지 사양하였다.

제번은 죽기 직전 왕위를 그의 동생 여제에게 넘긴다고 유언하였다. 그의 아들에게 넘기지 않고 동생에게 넘긴 이유는 계찰이 왕위를 사양하는 이유는 순서를 존중한다는 뜻이었기 때문이다. 형제간에 상속하게 되면 언젠가는 왕위가 계찰에게 돌아가리라는 생각이었다.

왕위는 예정대로 여제에게서 여매에게로 이어지고 있었다. 이 사이 계찰은 사신으로 제후국에 파견되어 정치적 역량을 길러왔다.

여매가 즉위 4년에 죽고 드디어 계찰이 왕위에 오를 시기가 다가왔다. 그러나 계찰은 끝까지 즉위할 것을 거절하고 도망쳐버렸다. 백성들은 하는 수 없이 마지막 왕이었던 여매의 아들 요(僚)를 왕으로 세웠다.

문제는 여기에 있었다. 일찍이 제번이 죽을 때 왕위를 그의 아들 광(光)에게 물려주지 않은 이유는 막내동생 계찰에게 양위하기 위함이었다. 셋째 동생 여매까지는 제대로 형제 상속이 이루어지다가 계찰이 도망함으로 인하여 셋째 동생의 아들인 요에게로 왕위가 돌아가버린 것이다. 계찰이 도망갔을 때 왕위는 당연히 장형의 아들인 광(光)에게로 돌아올 줄 알았으나 사촌 동생인 요에게로 돌아가니 광은 굴욕의 나날을 보내야 했다. 장군으로서 이따금 초나라와 싸워 무공을 세우고 실력과 인격을 닦아 신망을 얻게 되자 오왕은 이 같은 광을 경계하게 되었다. 광이 이렇게 불안한 나날을 보내고 있을 때 초나라에서 오자서(伍子胥)가 망명해 와 광의 빈객으로서 그를 돕게 되었다. 광은 훌륭한 참모를 얻은 셈이다.

오자서는 광이 오왕 요를 죽이고 자신이 왕이 되고자 하는 속마음을 알아차리고 전저(專諸)를 추천하니 광은 전저를 빈객으로 잘 대우하였다.

오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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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왕 9년에 초나라의 평왕(平王)이 죽자 오왕 요가 초나라의 국상을 틈타 초나라를 공격하기 위하여 그의 두 동생 개여(蓋餘)·속용(屬庸)으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리고 초나라의 첨(灊)을 포위토록 하였다. 초나라에서는 군대를 출동시켜 오나라 장수 개여·속용의 돌아갈 길을 차단하니 오나라 군대는 돌아갈 수 없게 되었다. 기회를 노리고 있던 광은 전저에게 말하였다.

“이때를 놓쳐서는 안 됩니다. 나는 당연히 적장자로서 임금이 되어야 할 몸이니 비록 계찰이 온다 해도 나를 폐하지 못할 것입니다.”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오왕 요를 죽일 수 있는 기회는 바로 지금입니다. 어머니는 늙었고 아들은 어리며 두 동생은 군대를 거느리고 초나라로 갔는데 초나라는 그들의 퇴로를 끊고 있으니 그들은 돌아올 수가 없습니다. 이번 일은 저에게 맡겨 주십시오.”

광과 전저는 이심전심으로 의견이 일치되었다. 광은 무장한 심복을 지하실에 숨겨 두고 술과 안주를 갖추어 왕을 초청하였다. 왕은 군대로 하여금 궁궐로부터 광의 집까지 도열하고 문간과 섬돌의 좌우에는 모두 왕의 친척으로 하여금 둘러싸고 시립케 하였는데 모두가 긴 칼들을 갖고 있었다.

술잔이 돌고 돌아 흥이 무르익어 갈 무렵 광은 거짓으로 발에 병이 났다고 하고 지하실로 내려가 전저로 하여금 구운 고기의 뱃속에 비수를 넣어 왕에게 올리도록 하였다. 왕 앞에 이르자 전저는 물고기의 배를 째는 척 잽싸게 비수를 잡아 왕을 찔렀다. 왕이 비명을 지르며 그 자리에서 죽자, 좌우에 시립해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몰려들어 전저를 죽이고 소란을 피웠다. 광은 지하실에 잠복시켰던 군사들을 내보내어 왕의 무리를 모두 소탕하고 왕위에 오르니 이 사람이 오왕 합려(闔閭)이다.

오자서가 초나라로부터 오나라에 망명한 것은 그의 아버지 오사(伍奢)와 형 오상(伍尙)이 초나라 평왕에게 살해되었고 자신의 생명도 위협을 받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면 오사와 오상이 왜 죽임을 당했는지 그 경위를 알아보자.

오상사의 청당

오자서의 고향 임리현에는 오자서를 기리기 위해 오상사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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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찍이 평왕에게는 건(建)이라는 태자가 있었다. 오사는 태자 건의 태부(太傅)가 되고 비무기(費無忌)는 소부(少傅)로서 태자를 가르치고 있었다. 태자의 나이가 차자 평왕은 무기로 하여금 진(秦)나라에서 태자의 아내를 맞아오도록 하였다. 무기가 태자의 아내 될 여인을 만나보니 보기 드문 절세미인이었다. 무기는 슬그머니 딴 생각을 갖게 되었다. 평왕에게 달려와 보고하기를 “진나라 여인은 절세미인입니다. 왕께서 부인으로 삼으시고 태자의 아내는 다시 구해 보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였다.

평왕이 무기의 말을 듣고 그 여인을 만나보니 과연 절세미인인지라 이성을 잃고 그 여인을 차지하여 몹시 사랑하였으며 아들 진(軫)을 낳게 되었다. 그리고 태자의 아내는 다른 곳에서 맞게 하였다.

무기는 이 일로 인하여 평왕의 신임을 받았고 태자의 곁을 떠나 평왕을 섬기게 되었다. 무기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만일 하루 아침에 평왕이 죽고 태자 건이 임금이 된다면 나를 그대로 두지는 않을 것이다. 차라리 태자를 없애 버려야겠다.’

무기는 평왕에게 태자 건을 참소하였다. 평왕은 차츰 태자를 미워하더니 마침내 태자로 하여금 변방의 군대를 정비하라는 명을 내려 궁중에서 쫓아냈다. 일은 무기의 뜻대로 되어 가고 있었다. 얼마 후 무기는 태자의 단점을 낱낱이 들어 평왕에게 아뢰었다.

“태자는 아무래도 진나라 여인의 일로 원망이 없을 수 없습니다. 태자가 변방에 나가 군대의 책임자로 있으면서부터 밖으로 여러 제후들과 교섭하여 사귀고 있으니 장차 반란을 일으킬지도 모릅니다. 왕께서는 이 점을 생각하시어 스스로 방비하심이 좋을 듯합니다.”

평왕은 더럭 의심이 생겼다. 우선 태자의 태부 오사를 불러 고문하였다. 오사는 무기가 태자를 참소한 사실을 훤히 알고 있었다.

“왕은 어찌하여 간신의 참소하는 말만 믿고 부자간의 정을 그다지 소원하게 하십니까?”

옆에서 이 모양을 지켜보고 있던 무기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왕께서 지금 당장 제압하지 않으시면 장차 그 일이 성사된 후에는 후회해도 소용이 없습니다. 엄히 다스리옵소서.”

평왕은 무기의 말을 믿고 오사를 하옥시키고 분양(奮揚)을 보내어 태자를 죽이라는 명을 내렸다.

그러나 분양은 먼저 사람을 보내어 태자에게 알렸다.

“태자께서는 급히 몸을 피하십시오. 그렇지 않으면 죽임을 당할 것입니다.”

이 말을 전해 들은 태자 건은 송나라로 도망쳤다.

일이 간단히 끝날 줄 알았던 무기는 내심 초조하였다. 다시 평왕에게 “오사에게는 두 아들이 있는데 모두가 현명합니다. 그들을 죽이지 않으면 장차 초나라의 근심거리가 될 것이 분명합니다. 오사를 인질로 삼아 그들을 부르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아뢰었다.

왕은 사람으로 하여금 오사에게 말하기를 “당장 네 두 아들을 데려오도록 하라. 만약 그렇지 못하면 그대를 죽일 것이다.” 하였다.

이 말을 들은 오사는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큰 아이 상(尙)은 사람됨이 어질어서 내가 부르면 반드시 올 것이나, 원(員, 오자서의 자)은 모질고 패려하여 능히 큰 일을 할 것입니다. 그는 오면 모두가 사로잡힐 것을 뻔히 알고 오지 않을 것입니다.”

왕은 오사의 말을 듣지 않고 사람을 보내어 그의 두 아들에게 말하였다.

“내 명령대로 너희가 오면 네 아비를 살려줄 것이로되 그렇지 않으면 이제 아비를 죽일 것이다.”

오자서의 형 오상이 가고자 하니 오자서가 만류하였다.

“초나라가 우리 형제를 부르는 것은 우리 아버지를 살리기 위한 것이 아니고 뒷날의 근심을 없애기 위함입니다. 만약 우리 둘이 도착하면 부자가 모두 죽을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원수를 갚지 못할 뿐입니다. 차라리 다른 나라로 달아나서 힘을 빌어 아버지의 원수를 갚는 것이 자식의 도리라 생각합니다. 모두 함께 죽으면 그 일을 할 수가 없습니다.”

오상은 말하였다.

“만약 내가 가더라도 아버지의 목숨을 안전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안다. 그러나 아버지가 나를 불러서 살기를 구하는데 가지 않고 뒤에 아버지의 원수도 갚지 못한다면 마침내 천하의 웃음거리가 된 것을 한탄할 것이다.”

그리고 오자서에게 말하였다.

“나는 가는 것이 좋겠다. 너는 능히 아버지의 원수를 갚을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돌아가 죽을 것이다.”

오상이 나아가니 밖에서 대기하고 있던 사자들이 달려들어 오상을 붙들고 오자서 또한 체포하려 하였다. 오자서는 잽싸게 활시위에 오늬를 메워 사자를 겨누니 사자가 감히 달려들지 못하였다. 그 길로 오자서는 초나라에서 도망쳐 태자 건이 송나라에 있다는 소문을 듣고 그리로 갔다. 오사는 자서가 도망했다는 말을 듣고 “장차 초나라의 임금과 신하들이 전쟁에 시달림을 받겠구나.” 하고 한탄하였다.

오상이 초나라에 오자 그들의 예언대로 그의 아버지 오사와 함께 죽임을 당했다.

오자서 사당의 거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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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자서가 송나라에 가니 때마침 화씨(華氏)의 난이 있어 그곳에 머무를 수가 없었다. 태자 건과 함께 정나라로 달아났는데, 정나라에서는 이들을 우대하였다. 얼마 후 진(晋)나라로 가니 진나라 경공(頃公)이 다음과 같이 제의하였다.

“정나라와 태자를 신임하고 있습니다. 그러니 태자는 나를 위하여 내응(內應)할 수 있으며 내가 그 밖을 친다면 정나라를 기필코 멸망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 정나라를 멸망시키면 태자를 정나라의 임금에 봉하겠습니다.”

태자는 이 제의를 받아들여 다시 정나라로 돌아왔다. 그러나 호사다마로 아직 기회가 오기 전에 그가 사사로운 일로 그의 종자(從者)를 죽이려고 하자 그 종자가 진나라 경공과 태자의 음모 사실을 정나라에 고발하고 말았다. 정나라 정공(定公)은 크게 노하여 태자 건을 주살하였다.

태자 건에게는 승(勝)이라는 아들이 있었다. 오자서는 승과 함께 오나라로 달아나기 위해 소관(昭關)에 이르니 소관을 지키는 병사들이 그들을 잡으려고 하였다. 오자서는 승과 더불어 홀몸으로 걸어서 도망가는데 뒤에서 쫓는 자가 아슬아슬하게 다가왔다. 강가에 이르자 한 어부가 배에 타고 있다가 오자서의 위급함을 보고 재빨리 그를 건네주었다. 오자서는 강을 건너자 자기가 차고 있던 칼을 풀어 그 어부에게 주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

“이 칼은 값이 족히 백금(百金)은 나갈 것입니다. 생명을 구해준 감사의 뜻으로 드리오니 받아주십시오.”

어부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다음과 같이 말하는 것이었다.

“초나라에서는 당신을 잡는 자에게 곡식 오만 석을 주고 그 위에 집규(執珪) 벼슬을 준다고 하였소. 내가 만일 이익을 탐한다면 어찌 백금의 칼 정도이겠습니까?”

어부는 칼을 받지 않았다.

오자서가 오나라에 이르렀을 때는 마침 오왕 요가 광을 장군으로 등용하고 있을 무렵이었다. 오자서가 오나라에 오기까지는 이러한 우여곡절이 있었던 것이다.

합려는 이미 왕이 되자 오자서에게 벼슬을 내리고 함께 국사를 의논하였다.

합려가 즉위한 지 3년 만에 오자서·백비(伯嚭)와 함께 군사를 일으켜 초나라를 공격하여 서(舒)를 함락하고 파죽지세로 초나라 수도인 영(郢)을 공략하려고 하자 장군 손무(孫武)가 간하였다.

“백성들이 몹시 피로해 있으며 아직은 그때가 아닙니다. 얼마 동안 기다리는 것이 좋겠습니다.”

오왕 합려는 이 말을 받아들여 회군하였다.

4년에는 초나라의 육(六)과 첨을 공략, 탈취하였고 5년에는 월(越)나라를 쳐 승리하였다.

6년에 초나라에서는 평왕이 이미 죽고 소왕(昭王)이 공자 낭와로 하여금 군대를 이끌고 오나라를 침범하게 하였다. 오나라에서는 오자서로 하여금 군사를 거느려 싸우게 하니 오자서는 예장(豫章)에서 초나라의 군사와 결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고 거소(居巢)를 빼앗았다.

9년에 오왕 합려는 오자서와 손무에게 말하였다.

“전에 초나라의 수도 영을 치려고 했을 때 그대가 말하기를 아직 때가 아니라고 말한 적이 있는데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두 사람은 대답하였다.

“초나라 장수 낭와는 탐욕이 많아 당(唐)·채(蔡)가 모두 그를 원망하고 있습니다. 왕께서 초나라를 크게 치고자 하신다면 먼저 당·채를 우리 편에 끌어들이십시오. 그러면 승산이 있을 것입니다.”

합려는 두 사람의 말을 들어 당·채와 합세하여 초나라를 공격하였다. 양군은 한수(漢水)를 사이에 두고 마주보며 진을 쳤다. 오나라 군대가 출정할 때 오왕의 아우 부개(夫槪)가 참전하기를 간청하였으나 왕이 이를 단호히 거절하였다. 그는 마침내 자기에게 소속된 5천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초나라 장수 자상(子常)의 진영을 공격하였다. 자상이 패하여 정나라로 달아나니 이에 오나라 군대는 승세를 몰아 총공격을 감행하여 5차에 걸친 접전 끝에 드디어 초나라 수도 영에 입성하였다.

초나라 소왕은 영에서 탈출하여 운몽 땅에 들어갔는데 도적의 무리들이 왕을 공격하였다. 소왕은 다시 운(鄖)으로 도망하였다. 운공(鄖公)의 아우 회(懷)는 평왕이 자기 아버지를 죽인 데 대해 불만을 품고 있던 자였다. 회가 운공에게 말하였다.

“초나라 평왕이 내 아버지를 죽였으니 내가 그의 아들을 죽이는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말을 들은 운공은 동생이 소왕을 죽일 것을 두려워하여 소왕과 함께 수(隨) 땅으로 달아났다. 오나라의 군사들이 수 땅을 포위하고 수 땅의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퍼뜨렸다.

“옛날 주나라의 자손으로서 한천(漢川)에 살던 사람을 초나라가 모두 멸망시켰다.”

그러자 수의 백성들이 일제히 소왕을 죽이고자 하였다. 왕의 아들 기(棊)가 왕을 숨기고 자신이 스스로 왕이라고 나서며 나를 잡아 오나라에 넘기라고 말하자 수의 사람들이 길흉을 점쳐 보니 오나라에 넘겨주는 것이 불길하다는 점괘가 나와 왕을 넘겨주지 않았다.

일찍이 오자서가 초나라에 있을 때 신포서(申包胥)와는 친구 사이였다. 오자서가 도망갈 때 포서에게 “내 언젠가는 반드시 초나라를 뒤집어엎고야 말 것이다.”라고 말하자 신포서가 말하였다.

“나는 반드시 초나라를 존속시킬 것이다.”라고 응수한 일이 있었다.

오나라의 군대가 수도 영에 입성했을 때 오자서는 이리저리 소왕을 찾았으나 도저히 찾을 길이 없었다. 이에 초 평왕의 무덤을 파 그의 시체를 꺼내어 3백 번 채찍질을 하였다. 신포서는 산중으로 도망가서 사람을 오자서에게 보내어 말하기를 “그대의 원수 갚는 짓이 어찌 그다지도 가혹한가. 내 들으니 사람이 많으면 하늘도 이긴다고 하였다. 그러나 하늘이 정하면 또한 사람을 깨뜨릴 수도 있다고 하였다. 그런데 그대는 옛날 평왕의 신하로서 그를 섬겼는데 지금 죽은 사람에게 치욕을 가하였으니 이것이 어찌 천도의 극에 이른 것이 아니겠는가.”

이 말을 전해 들은 오자서는 “나를 위하여 신포서에게 사과의 말을 전해 달라. 내 날은 저물고 길은 멀다.각주1) 그때문에 천리에 따르지 않고 역으로 시행했을 뿐이다.”라고 말하였다.

신포서는 진(秦)나라로 달아나 위급한 사정을 말하고 구원을 요청했으나 진에서는 응해주지 않았다. 포서는 진나라 궁전의 뜰에 서서 밤낮으로 이레 동안을 통곡하니 그의 지극한 충성심은 만인의 동정을 사기에 충분하였다.

진나라 애공(哀公)이 이를 가엾게 여겨 “초나라의 무도함은 동정의 여지가 없으나 이와 같은 충신이 있으니 존속시키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고 마침내 병거(兵車) 5백 승(乘)을 보내어 초나라를 구원케 하니 6월에 초나라는 오나라 군대와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

오왕 합려는 오래도록 초나라에 머무르면서 소왕을 찾고 있었는데 그의 동생 부개가 은밀히 오나라에 돌아와서 스스로 왕이 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합려는 급히 오나라로 돌아와 부개를 공략하였다. 부개는 힘을 다하여 끝까지 항전하였으나 당해내지 못하고 초나라로 망명하였다. 초의 소왕은 오나라에 내란이 일어난 틈을 타 다시 수도로 돌아와 부개를 맞아들여 그를 후대하였다. 전열을 가다듬은 초나라가 오나라의 군사와 싸워 승기를 잡자 오왕은 마침내 전군을 철수시켰다.

이로부터 2년 후 오왕 합려는 태자 부차(夫差)로 하여금 초나라를 공격토록 하여 번(番) 땅을 빼앗으니 초나라는 오나라가 다시 대대적인 공격을 감행해올 것을 두려워하여 수도를 영에서 약(鄀)으로 옮겼다. 이때에 오나라는 오자서, 손무 등의 계책을 채용하여 서쪽으로는 패자로서 이름을 떨치던 초나라를 깨뜨리고 북쪽으로는 제나라와 진(晋)나라를 위압하였으며 남쪽으로 월나라를 복종시켰으니 춘추 오패 가운데 오왕 합려 또는 부차를 넣는 것도 무리가 아닌 듯싶다.

초나라 동쪽에서 오나라라는 강국이 갑자기 나타났듯이 이번에는 오나라의 동쪽에 제3의 강국이 나타나게 되었으니 구천(句踐)이 거느리는 월(越)나라이다.

월왕(越王) 구천의 조상은 우(禹)의 후손으로 하후제(夏后帝) 소강의 서자였다. 일찍이 회계(會稽, 절강성) 땅에 봉해져 20여 대를 거쳐 윤상(允常)의 대에 이르렀다. 윤상은 현명한 군주로 흩어져 있던 월나라 계통의 부족들을 규합하여 눈부신 성장을 이룬 끝에 나라로서의 체제를 갖출 만큼의 세력을 형성하였다.

윤상이 죽자 구천이 그 뒤를 이으니 이 사람이 오왕 부차와 패권을 다투던 월왕 구천이다.

오나라에서는 윤상이 죽자 그 기회를 틈타 월나라를 공격하였다. 오나라가 월나라를 공격했다는 것은 월나라의 세력이 이미 경계할 만큼의 강대한 세력으로 성장해 있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월왕 구천은 그의 아버지 윤상 못지않은 인물이었다. 오나라의 공격을 받자 그는 수수께끼 같은 작전을 펴 오나라의 군사를 대파하고 오왕 합려에게 부상을 입혔다.

이 싸움에서 구천은 오군의 진영에 3열(三列)의 자살 부대각주2) 를 먼저 투입했다. 이 자살부대가 오나라 진영 앞까지 이르자 전원이 갑자기 제 목을 찔러 자살하자 당황한 것은 오나라 진영이었다.

“저런! 저런!”

오나라 군사들은 예기치 못했던 사태에 어리둥절해하며 멍청히 서서 구경만 하고 있었다. 이때 갑자기 월나라 돌격부대가 오나라 진영 깊숙이 쳐들어 와 오군 진영을 유린한 것이다.

월나라는 꿈처럼 나타났다가 꿈처럼 사라진 수수께끼 같은 나라로 역사상 많은 일화를 남기고 있다. 이 일화의 주인공은 다름 아닌 범려로 그는 월왕 구천이 패업을 이룩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다.

오나라를 일으킨 주인공들이 오자서·손무·무신 등이라면 월나라를 일으킨 주인공은 범려임에 틀림없으나 범려의 출신에 대해서는 확실한 정설이 없다. 나중에 배를 타고 제(齊)나라로 망명했기 때문에 막연히 제나라 사람이었을 것이라고 전한다.

월나라와의 싸움에서 손가락에 부상을 입은 오왕 합려는 병이 악화되어 회생이 어렵게 되었다. 태자 부차를 불러놓고,

“너는 구천이 너의 아비를 죽인 일을 잊겠느냐.”
“감히 잊지 않겠습니다.”

부차는 이렇게 맹세하였다.

이날 저녁 합려가 죽으니 부차가 그 뒤를 이었다. 부차는 아버지의 한을 풀어야겠다고 다짐하였다. 그 맹세를 되새기기 위하여 밤마다 섶(薪) 위에서 자면서 고통을 느낄 때마다 아버지의 한을 상기시키고 또 한편으로는 사람에게 명하여 매일같이 “부차여, 너는 아버지의 원수를 잊었느냐.”를 외치게 하며 복수심을 되새겼다.

오나라가 이렇게 복수전을 준비하고 있다는 사실을 안 월왕 구천은 기선을 제압하기 위하여 오나라에 선제 공격을 하려 하자 범려가 극구 만류하였다. 그러나 월왕 구천은 듣지 않고 오나라를 공격하다가 대패하였다. 오나라는 승세를 몰아 월나라 수도 회계를 포위하니 월왕 구천의 목숨은 경각에 달려 있었다. 구천은 많은 뇌물을 오나라의 태재 백비에게 보내고 강화를 제의하여 나라를 송두리째 맡기고 자신은 오왕의 신하가 되고 아내는 오왕의 첩이 되겠다는 굴욕적인 항복을 요청하였다. 오왕이 장차 허락할 뜻을 보이자 오자서가 반대하고 나섰다.

“지금이야말로 하늘이 월나라를 오나라에 주는 때입니다. 줄 때 받지 않으면 나중에 화를 입습니다. 허락해서는 안 됩니다.”

오자서는 월나라를 아주 삼켜버리자고 진언했으나 월나라로부터 뇌물을 받은 백비 등의 말을 듣고 강화를 맺었다.

오왕 부차가 아버지의 원한을 씻기 위해 섶 위에서 고통을 느끼면서 그 결의를 다졌다. 이번에는 월왕 구천이 회계에서 있었던 굴욕을 씻기 위해 맛이 쓴 쓸개를 그의 곁에 놓아두고 음식을 먹을 때마다 쓸개를 맛보면서 “너는 회계의 치욕을 잊었느냐.” 하며 자신을 격려하였다.

와신상담(臥薪嘗膽)이라는 말은 바로 치욕을 씻기 위해 고통을 견뎌내며 노력한다는 뜻으로 오왕 부차와 월왕 구천의 이 같은 고사에서 유래한 말이다.

오왕 부차는 월나라와 화평을 맺은 지 5년에 군대를 동원하여 북으로 제나라를 공격하려고 하였다. 오자서는 이를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구천은 밥을 먹을 때마다 쓸개를 맛보며 보복할 기회를 노리고 있으며 죽은 자를 조상하고 병든 자를 위문하는 등 국력을 다지고 있으니 이 사람이 살아 있는 한 오나라는 마음을 놓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오나라에 월나라가 있는 것은 사람의 배와 가슴에 병이 있는 것과 같습니다. 그런데 왕께서는 어찌하여 월나라는 그냥 두고 제나라를 치려 하십니까. 깊이 살피시옵소서.”

그러나 오왕은 듣지 않고 제나라를 쳐서 크게 이기고 추(鄒)·노(魯)의 임금을 멸망시키고 돌아왔다. 그리고는 더욱 오자서의 계책을 믿지 않게 되었다.

그 뒤 4년에 오왕이 다시 제나라를 치려고 하자 월왕 구천은 자공(子貢)의 진언을 들어 자기의 무리들을 이끌고 오나라를 돕는 한편 귀중한 보물을 백비에게 뇌물로 바쳤다. 또한 월나라의 미녀 서시(西施)를 오왕에게 바쳐 그의 환심을 사고 구천이 친히 오왕을 알현하여 몸을 굽히는 등 적극적인 선심 공작을 펴 오왕의 경계심을 늦추도록 하니 오왕은 점점 그들의 계략에 빠져들어가고 있었다. 오자서는 또 간하였다.

“만약 제나라를 쳐서 깨뜨린다 해도 그것은 마치 돌밭과 같은 것이어서 쓸모가 없는 것입니다. 제나라를 치는 일을 중지하고 먼저 월나라를 쳐 없애십시오. 만약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나중에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오왕은 듣지 않고 오자서를 사자(使者)로 삼아 제나라에 가도록 명하였다. 오자서는 제나라를 떠날 때가 되어 그의 아들에게 “내가 여러 번 간하였으나 왕은 듣지 않는다. 이제 오나라가 망하는 것은 뻔한 일인데 네가 오나라와 함께 죽는 것은 무익한 일이다.” 하고 그의 아들을 제나라의 포씨(鮑氏)에게 맡기고 돌아왔다.

오나라의 태재 백비는 오래전부터 오자서와 사이가 나빴다. 이 기회를 이용하여 오왕에게 오자서를 참소하니 오왕은 백비의 말만 믿고 “그대의 말이 아니더라도 나도 역시 의심하고 있었소.” 하고 사자를 시켜 오자서에게 촉루지검(屬鏤之劍, 유명한 칼의 이름)을 주며 자결을 명하였다. 오자서는 하늘을 우러러 탄식하며 집안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유언하였다.

“반드시 나의 무덤 위에 가래나무(梓)를 심어서 왕(오왕 부차)의 관을 만들 수 있게 하라. 그리고 나의 눈을 빼내어 오나라의 동쪽 문 위에 걸어 놓아 월나라 도적들이 오나라를 멸망시키는 것을 보게 하라.”

오왕 부차는 이 말을 듣고 크게 노하여 오자서의 시체를 가져다가 말가죽으로 만든 주머니에 넣어 강물에 띄워버리니 오나라 사람들이 가엾게 여겨 강가에 사당을 세우고 서산(胥山)이라고 이름지었다.

오자서가 죽은 것은 오왕 부차가 즉위한 지 11년(기원전 485)의 일이다. 부차는 자주 북벌군을 일으켜 노나라를 복속시키고 제나라를 공격하였다. 그는 북벌을 위하여 장강(長江)과 회하(淮河)를 연결시키고 기수(沂水)와 제수(濟水)를 연결시켰다. 오나라의 수도 소주(蘇州)에서 배만 타면 곧장 제나라에 닿을 수 있도록 운하를 굴착하는 대공사를 벌였던 것이다. 이 같은 공사는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것으로서 놀라울 정도의 민폐가 뒤따랐을 것이 분명하다. 오자서가 오왕 부차에게 자주 간한 것은 단순히 북벌 반대뿐이 아니고 민폐가 극심한 대공사에 대한 반대도 포함되어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오자서가 죽은 다음해 오왕은 드디어 제나라를 공격하였다. 이때 제나라에서는 포씨(鮑氏)가 그의 임금 도공(悼公)을 죽이고 나이 어린 간공(簡公)을 왕으로 세웠을 때였다. 상대국의 국상을 틈타 공격하는 것이 오나라의 상투적인 전법이었다. 그러나 이 싸움에서는 승리하지 못하였다.

그 뒤 2년에 오왕은 노나라와 위나라의 임금을 탁고에 불러 모으고 그 다음해에는 계속하여 북으로 올라가 제후들을 황지(黃池)에 모아 회맹하였다. 황지는 하남성에 있으며 원래 송나라 땅이었다. 일개 오랑캐의 추장에 지나지 않았던 오왕이 마침내 중원의 제후와 맹주의 자리를 놓고 다투게 된 것이다. 이때 오왕의 으스대던 장면을 우리는 상상할 수 있다. 맹주의 자리를 다투게 된 상대는 중원의 강대국인 진(晋)의 정공(定公)이었다. 이때 진나라는 강대국으로 불리고 있긴 했으나 사실상 여섯 사람의 귀족이 실권을 쥐고 있었다.

오나라와 진나라의 패권 다툼의 결과에 대해 《사기》의 기록이 엇갈리고 있다.

‘오태백세가(吳太伯世家)’에는 오왕 부차가 “우리 먼 조상인 태백(太伯)은 문왕의 형이다. 주의 왕실은 문왕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오나라는 그 형의 가계(家系)에 해당하기 때문에 맹주는 당연히 내가 되어야 한다.”라고 주장한 반면, 진의 정공은 “같은 희성(姬姓) 가운데서도 오나라는 자작(子爵)의 나라에 불과하고 우리 진나라는 백작(伯爵)의 나라이니 당연히 내가 맹주가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전쟁도 불사한다는 강경한 자세를 보이자 오나라가 양보하여 진나라가 맹주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고,‘진세가(晋世家)’에는 정공이 오왕 부차와 황지에서 맹주의 자리를 놓고 다투다가 마침내 오왕이 맹주가 되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오왕 합려를 오패의 한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은 남쪽의 강국인 초나라의 수도를 유린한 실적에 근거를 두고 있으며 오왕 부차를 오패의 한 사람으로 인정하는 것은 황지의 회맹 때 맹주가 되었다는 사실에 근거한다.

오왕 부차가 황지에 모인 제후들 앞에서 한창 그의 위엄을 떨치고 있을 때 월나라 군사가 오나라에 침입했다는 급보가 날아들었다.

오왕 부차는 설마 하고 믿었던 도끼에 발등을 찍히고 만 것이다. 회계를 포위했을 때 오자서의 간언을 무시하고 월왕 구천을 용서한 것은 월나라에 큰 힘이 없을 것으로 믿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월왕 구천은 회계의 치욕을 씻기 위해 겉으로 순종하는 척 위장 전술을 펴면서 내정을 정비하고 산업을 일으키며 군비를 증강시켰다. 이를 오나라에서 눈치채지 못하게 하기 위해 구천은 입술을 깨물면서 친히 오왕을 알현하여 순종하는 태도를 보였던 것이다.

월나라에서는 몇 해를 두고 벼르고 벼르던 설욕전이었다. 월왕 구천은 이 설욕전에 전력을 투입했다. 동원된 병력은 습류(習流)각주3) 2천 명, 교사(敎士)각주4) 4만 명, 군자(君子)각주5) 6천 명, 제어(諸御)각주6) 천 명 도합 5만의 군사를 동원하였다. 이에 반해 오나라의 정예 부대는 모두 북벌에 참가하여 장정은 거의 없고 노약자뿐이었다. 월나라 군대는 쉽게 유수(留守)부대를 격파하고 태자를 잡아 죽였다.

제후들과 회맹하는 자리에서 급보를 전해 들은 오왕은 모든 사항을 극비에 붙이고 누설하는 자는 참형에 처한다는 엄명을 내렸다. 유수부대가 격파당하고 태자가 잡혀 죽었다는 일을 제후들이 알게 되면 맹주로서의 체면이 서지 않기 때문이었다.

오왕 부차는 회맹을 끝내고 즉시 월나라에 사자를 보내어 강화를 요청했다. 월왕 구천과 범려는 의논 끝에 강화를 수락하기로 하였다. 그 이유는 오나라 북벌군의 정예부대가 돌아와 일전을 벌일 경우 승패를 예측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강화를 맺은 후 월나라는 계속 군비를 확장하였으나 오나라는 잦은 북벌로 군대가 피로하였기 때문에 당분간 휴식이 불가피하였고 많은 전쟁을 겪었기 때문에 병력의 손실도 많았다.

서시

오왕 부차가 서시의 미색에 빠져 멸망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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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로부터 4년 후 월나라는 다시 군대를 일으켜 오나라를 공격하였다. 월나라 군대는 도처에서 오군을 격파하고 3년에 걸쳐 오나라의 수도를 포위하였다.

마침내 한때 제후의 맹주로서 천하에 위엄을 떨쳤던 오왕 부차도 월나라에 항복하였다. 월왕 구천은 오왕을 가엾게 여겨 항복을 받아들이려 하였으나 범려가 반대하고 나섰다.

“회계의 일은 하늘이 오나라에 월나라를 주었음인데 오나라가 받지 않았고, 지금은 오나라를 월나라에 주는 것이니 하늘의 뜻을 거역해서는 안 됩니다.”

그래도 구천은 오왕을 용서하려 하였으나 오왕 부차는 스스로 목숨을 끊어 풍운의 일생을 마쳤다. 죽을 때 얼굴을 가리면서 “내 오자서를 볼 면목이 없구나!”라는 한마디를 남겼다.

오왕이 암살되는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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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나라는 오나라를 평정하자 그 여세를 몰아 북진하여 회하(淮河)를 건너 서주(徐州)에서 제후들과 회맹하였다. 오나라를 대신하여 월나라가 춘추 시대 최후의 패자가 된 것이다.

범려는 월나라가 오나라를 멸망시키고 패자가 된 후 자기 가산을 모두 챙겨가지고 그의 일족과 함께 배를 타고 바다로 떠난 후 영영 돌아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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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영 집필자 소개

서울에서 태어나 한문사숙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충남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저서로 《이야기 일본사》, 《이야기 중국사》가 있다.

출처

이야기 중국사1
이야기 중국사1 | 저자김희영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중국 고대부터 전한 시대까지의 역사를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함께 이야기 식으로 풀어 썼다. 엄청난 인구와 광대한 국토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이야말로 진정한 중국의 힘이며,..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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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오월의 패권 다툼이야기 중국사1, 김희영,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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