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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야기 중국
사1
전한시대

한무제의 치적

기원전 141년 미앙궁에서 경제가 죽고 황태자 철(徹)이 그 뒤를 이어 제위에 올랐다. 그때 그의 나이 겨우 16세였으며 이 임금이 바로 전한 왕조의 황금 시대를 이룩한 한의 무제(武帝)이다. 무제는 중국 역사상 진의 시황제와 더불어 ‘진황한무(秦皇漢武)’로 일컬어질 정도로 과감하였고 많은 업적을 남겼다.

그는 한왕(유방)조 창업 이래 쌓아 올린 문화적·경제적 여력을 바탕으로 역대 이래 취해오던 무위(無爲)의 노장 사상에서 유위(有爲)의 정치 체제로 전환하였다. 또 수십 년 동안 북쪽의 흉노와 취해오던 화친정책을 굴욕적인 것이라 판단하여 공격 위주의 강경책으로 전환하였다. 무제는 자기 자신의 솜씨를 한번 휘둘러 유사 이래의 대업을 이룩해보겠다는 자신에 차 있었다.

무제가 첫 번째 시도한 것은 중앙 집권의 강화였다. 16세에 즉위한 무제가 22세 때 있었던 일이다. 이제 무제도 제위에 오른 지 6,7년이 지났으니 황제로서의 위엄과 정치적 역량이 어느 정도 틀이 잡힐 만한 연륜이 되었다. 그런데도 중요 관직의 임명은 승상 전분(田蚡)이 혼자서 처리하고 있는 형편이었다. 무제는 어떻게든 전분의 독주를 막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루는 전분이 어전에서 꽤 많은 중요 관직에 임명할 사람을 추천하였다. 무제는 침착하고 위엄 있는 태도로 “경이 지금 추천하는 인물들은 이미 다 임명한 게 아니겠소. 이미 임명해 놓고 추천하는 형식을 취하는 것은 온당치 않은 일이오. 실은 나도 몇 사람 임용하고 싶은 사람이 있어 생각 중이오.”라고 말하였다. 그 후로 무제는 중요 관직의 임명권을 자기 손아귀에 넣게 되었다.

이어서 그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제후들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조정의 대권을 강화하였다. 경제면에서는 화폐 제도를 통일하여 정부가 화폐를 주조하고 소금·철·술 등의 전매 제도를 채택하였다. 사상면에서는 제자백가의 학설을 인정하지 않고 유가인 동중서(董重舒)의 사상을 받아들여 중앙 집권제의 강화와 국가의 통일을 굳건히 다지는 여론을 환기시켰다.

내정을 굳건히 다지는 한편 대흉노 정책을 강화하여 무력에 의하여 침략과 소란을 저지시킨다는 강경책을 썼다.

소무

소무는 한무제 때 포로 교환차 사절로 갔다가 흉노에 억류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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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원(建元) 6년(기원전 135) 어전 회의에서 흉노에 대한 대책이 논의되었다. 이때 왕회(王恢)는 강경책을 내세워 흉노를 쳐야 한다고 주장하고, 한안국(韓安國)은 화친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어전회의에 참석한 중신들 대부분은 화친책을 찬성하였기 때문에 무제는 마음에 내키지 않는 화친을 당분간 계속하였다.

2년 후 왕회는 다시 흉노를 쳐야 한다고 진언하였다. 이때 한안국은 또 화친을 주장하였다. 한안국이 화친을 주장하는 이유는 “한나라가 흉노를 치기 위해서는 수천 리를 원정하여야 합니다. 흉노는 만전의 태세를 갖추고 있다가 피로에 지친 한군을 맞아 싸우게 되니 이렇게 되면 한나라가 불리할 것입니다.”라는 것이었다.

이에 대하여 왕회는 새로운 계책을 진언하였다.

“그렇다면 흉노로 하여금 한나라를 치게 만들어 우리가 맞아 싸우는 방법을 쓰겠습니다.” 하고 몰래 마읍(馬邑) 안에 30만의 복병을 배치시킨 후 안문군(雁門郡) 마읍의 호족 섭일(聶壹)로 하여금 간첩이 되어 흉노로 도망하여 선우에게 다음과 같이 말하게 하였다.

“내가 마읍의 행정 책임자와 관리들을 모두 베어 죽이고 성으로써 항복하면 마읍의 재물을 다 얻을 수 있습니다.”

섭일은 마읍에서 신임이 두터운 호걸로 그의 말이라면 선우도 믿을 정도였다. 선우는 섭일에게 그렇게 하도록 허락하는 한편 밀정을 보내어 마읍의 상태를 탐지하도록 하였다.

불상을 참배하는 한무제

막고굴 벽화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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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흉노의 선우는 일찍이 흉노의 세력을 크게 떨쳤던 묵특의 손자 군신 선우였다. 섭일은 죄수의 목을 성벽에 높이 매달아 성내의 쿠데타가 성공한 것처럼 가장하였다. 밀정은 성벽에 매달은 목이 마읍의 현령과 관리들인 줄 알고 선우에게 연락하니 군신 선우는 10만의 기병을 거느리고 마읍 공격에 나섰다. 군신 선우는 장성을 넘어 약탈을 자행하면서 마읍을 향해 내려오는데 소·말·양떼들이 초원 가득히 방목되어 있는데도 사람의 그림자는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의아한 생각이 든 군신 선우는 장성 가까이 있는 봉화대를 급습하여 봉화대 책임자를 심문하였다.

봉화대의 책임자는 고급 간부는 아니었지만 제1선을 담당하는 지휘자여서 한나라의 복병 계획을 알고 있었다. 심문에 못이긴 봉화대 책임자는 “한나라의 군대 30만 명이 마읍 안에 숨어 있다.”고 말하였다.

“하마터면 한나라에 속을 뻔하였구나!”

군신 선우는 마읍 공격에 나섰던 10만의 기병을 모두 철수시킴으로써 한의 복병 계획은 완전히 실패로 돌아가고 30만 한군은 맥이 빠져 버렸다.

그런데 왕회는 사전에 별도로 3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흉노의 보급부대를 습격하기로 작전이 짜여져 있었다. 군량이나 무기를 수송하는 보급부대는 주력부대와 떨어 있는 것이 보통이었다. 그런데 왕회는 보급부대를 공격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흉노의 주력부대가 마읍 공격을 중지하였으므로 만약 한군이 보급부대를 습격할 경우 흉노는 전 주력부대를 이끌고 구출 작전을 펼 것이고 그렇게 되면 왕회의 3만 군대가 패전할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무제는 왕회가 마음대로 군사를 이끌어 싸움을 중지한 죄를 물었다. 왕회는 “신은 진실로 돌아와서 죽임을 당할 것을 알았습니다. 그러나 폐하의 군사 3만 명은 완전히 보전할 수 있었습니다.”라고 말하여 이해득실을 논하였으나 마침내 정위에게 넘겨져 참형에 처해야 한다는 구형이 있었다. 왕회는 생각 끝에 승상 전분에게 천 금의 뇌물을 주어 구명 운동을 벌였다.

전분은 감히 무제에게는 말하지 못하고 태후에게 말하여 왕회를 구하려 하였다.

태후가 무제에게 왕회의 일을 말하자 무제는 “왕회가 주가 되어 마읍의 작전을 짰습니다. 비록 사전에 계획이 누설되어 선우는 사로잡지 못했을망정 보급부대를 공격하였더라면 체면은 세울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제 왕회를 베지 않으면 천하에 사과할 길이 없습니다.”라며 단호히 거절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왕회는 체념하고 자살해버렸다. 이 마읍의 사건은 한나라에 있어 큰 치욕이었으며 흉노와의 관계를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 같은 치욕은 그로부터 4년 후 거기 장군(車騎將軍) 위청(衛靑)에 의해 씻을 수가 있었다.

원광(元光) 6년(기원전 129) 위청·공손오(公孫敖)·공손하(公孫賀)·이광(李廣)의 네 장군은 각각 1만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네 방향으로 흉노 땅에 쳐들어갔다. 이 가운데 공손하는 흉노군과 만나지 못하여 싸움을 하지 않았고, 공손오는 흉노에게 패하여 7천 기를 잃었다. 이광은 흉노에게 패했을 뿐만 아니라 한때 포로가 되었다가 겨우 탈출하여 돌아왔다. 공손오와 이광은 참형에 해당하였으나 돈을 바치고 서인으로 격하되었다. 한나라 때에는 거액의 돈을 바치고 사형을 면하는 제도가 있었다.

네 장수 가운데 오직 위청 한 사람만이 상곡으로부터 쳐들어가 흉노들이 하늘에 제사지내는 용성까지 공략하여 적을 참수하거나 포로로 잡은 것이 7백 명에 이르는 전과를 올렸다. 수적으로 볼 때는 그다지 큰 성과라고 할 수 없으나 용성까지 공략했다는 것은 큰 의의를 갖는 것이었다. 위청의 이 같은 승리로 한나라의 조야는 흥분을 감추지 못하였다. 건국 70년 이래 한군이 장성을 넘어 그 북쪽을 공략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기 때문이었다.

다음해 무제의 총애를 받고 있던 위자부(衛子夫)가 남자아이를 출산했다. 위자부는 위청의 누이이다. 위청은 황자(皇子)의 출산을 축하라도 하듯 3만의 기병을 거느리고 안문으로 나가 수천 명의 적을 참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다시 다음해인 원삭(元朔) 2년(기원전 127)에 위청은 운중에서 북으로 나가 장성 바깥 서쪽으로 돌아가 진나라 말기 흉노에게 빼앗겼던 오르도스 지방을 회복하였다. 3회에 걸친 전공에 의해 위청은 장평후가 되어 식읍(食邑)이 3천 8백 호에 이르게 되었다.

그 후 위청은 마침내 대장군이 되어 7차례에 걸쳐 원정군을 이끌고 흉노와 싸워 공을 세웠으나 후반은 그의 생질인 곽거병(霍去病)의 눈부신 전공 때문에 위청의 명성은 점점 빛을 잃어가고 있었다.

무제의 강력한 정책과 위청·곽거병의 전공에 의해 흉노와 화친정책으로 일관해오던 과거의 치욕을 씻을 수 있었던 것은 오로지 두 장군의 힘만으로 이룩된 것은 아니다. 그 배경에는 한나라의 국력이 그만큼 충실해졌기 때문이었다.

무제는 기질적으로 위청보다는 곽거병을 좋아했다. 평양 공주의 저택에서 아전 생활을 하여 노예적 기질이 몸에 배인 위청은 겸손이 지나쳐 오히려 아양 떠는 것처럼 보이는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에 반하여 곽거병은 귀족 출신이었기 때문에 무제에게는 솔직하고 신선한 느낌을 주었던 듯하다. 그래서 원정 때는 최정예부대를 으레 곽거병에게 맡겼다.

원수(元狩) 2년(기원전 121)은 마치 곽거병의 해라고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는 큰 공을 세웠다. 이 해에 곽거병은 3회에 걸쳐 원정을 하였는데 그때 그의 나이 겨우 약관 20세였다.

제1회 원정은 농서(隴西)로 진격하여 흉노의 절란왕(折蘭王)을 죽이고 노후왕(盧侯王)의 목을 베었으며 혼야왕(渾邪王)의 아들을 사로잡고, 참수하거나 포로로 한 자가 8천 1백 명에 이르는 전과를 올렸다.

제2회 원정은 그 해 여름에 거연(居延)을 넘어 소월지(小月氏)를 지나 기련산(祈連山)을 공격하였다. 이 원정에서 박망후(博望侯) 장건(張騫)·합기후 공손오(公孫敖)는 곽거병의 군단과 만나는 시간을 지체하였다는 이유로 참형에 처해야 한다는 구형을 받았으나 돈을 바치고 죽음을 면하여 서인이 되었다.

장건

서역으로 떠나는 장건. 장건은 월지와 동맹을 맺고 흉노를 격파하기 위해 서역 월지로 파견되었다. 월지와의 동맹 체결은 무산되었으나, 그의 여행을 통해 동서양 문물의 교류가 시작되었다. 막고굴 벽화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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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회 원정은 그 해 가을로 원정이라기보다는 혼야왕의 항복을 받기 위해 하서(河西)로 파견된 일이었다. 계속되는 패전에 흉노의 이치 선우는 혼야왕·휴도왕에게 그 책임을 물으려 하자 이들 두 왕은 문책이 두려워 한나라에 항복하려 하였다. 도중에 휴도왕이 항복을 망설였기 때문에 혼야왕이 휴도왕을 죽이고 그 무리를 빼앗았다.

하서를 수복한 곽거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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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이 흉노는 내부가 동요되어 있었다. 항복한 혼야왕의 군중에도 항복에 반대하는 자가 있었다. 곽거병은 항복에 반대하는 흉노 8천 명을 베어 죽였다.

한나라는 국력의 충실·명장의 활약·흉노의 내부 동요 등 성공적으로 흉노를 제압할 수 있었다. 성공의 가장 큰 원인은 사전에 흉노의 사정을 정확히 파악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는데, 장건의 서역 여행이 큰 의의를 갖는다.

파미르 고원

‘세계의 지붕’이라고 일컬어지는 파미르 고원. 서역으로 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이 험준한 산을 넘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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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클라마칸

북변을 통과하면 실크로드 내륙 루트의 하나인 파미르 고원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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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제 즉위 전 20년경의 일이다. 당시 흉노에게 격파당한 월지(月氏)는 돈황에서 멀리 북쪽으로 도망하여 월지왕의 미망인을 왕으로 세우고 흉노를 원망하면서 절치부심 오랫동안 복수의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이러한 사정을 알고 있던 무제는 월지와 동맹을 맺어 흉노를 협공하려 하였다. 그래서 우선 월지에 보낼 사자를 구하고 있었는데 마침 장건이 자원하고 나섰던 것이다.

장건의 출발에 앞서 무제는 그의 고모부인 당읍후 진오(陳午)의 사저에서 노예로 있는 감보(甘父)를 장건의 종자로 삼아 따라 보내기로 하였다. 감보는 흉노 출신으로 변방 밖의 사정을 잘 알고 있는 자였다.

장건은 1백여 명의 종자를 거느리고 장안을 출발하여 황하 서쪽 변경 지방에 이르렀을 무렵 뜻밖에 흉노에게 사로잡혀 선우에게로 보내졌다. 이것이 건원 초년의 일로 당시 흉노의 선우는 군신이었다. 그는 장건 일행을 심문하여 월지에 가는 사자임을 알고 장건을 억류하였다. 흉노를 치기 위해 군사동맹을 맺으러 가는 사자를 흉노가 억류하는 것은 당연했다.

이로써 장건은 10년 동안 억류 생활을 해야 했다. 흉노의 여성을 아내로 맞이하여 자식을 낳고 완전히 흉노가 된 것처럼 행세하였다. 장건은 이렇게 하여 흉노의 경계심을 누그러뜨리고 그들의 감시가 소홀한 틈을 타서 탈출하였다. 장건 일행은 서쪽으로 수십 일 동안 여행을 계속하여 대완(大宛)각주1) 에 도착하였다.

무사 그림 벽걸이

실크로드를 통해 동서양 문물이 교류되었다. 그리스 병사로 추정되는 무사그림 벽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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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돈황에서 북쪽으로 쫓겨간 월지는 똑같이 흉노에게 쫓긴 오손(烏孫)에게 다시 쫓겨 망명지에서 서남쪽으로 쫓겨났다. 오손은 터키 계통의 부족으로 현재의 카자흐족의 선조라는 설이 있다.

쫓기고 쫓긴 월지는 사마르칸트 부근에 정착하였다. 그곳은 토지가 비옥하고 부근에 강력한 부족이 없었으며 단지 그 남쪽에 대하(大夏)가 있었다. 대하는 상업을 주로 하는 무력이 없는 나라였기 때문에 월지는 힘들이지 않고 대하를 속국으로 삼았다. 넓고 비옥한 토지에다 속국까지 생겼으니 월지의 입장에서 보면 전화위복이 된 셈이었다.

장건은 대완에서 강거국(康居國)을 지나 월지에 도착하여 월지를 설득하였으나 월지는 한나라와의 군사동맹을 끝까지 거부하였다. 월지의 평화주의·비동맹 정책으로 장건의 군사동맹 체결의 목적은 무산되고 말았다.

귀국길에 오른 장건 일행은 곤륜산 남쪽 기슭을 따라 서역 남로를 택했다. 이때 천산 남로는 흉노의 세력권에서 벗어나 있었다. 카슈가르(喀什)·야르칸트(莎車)·우전(于田)·누란(樓蘭)에서 차이담 분지(柴達木盆地)를 지나 농서(隴西)에 이르는 길을 택했다. 누란에서 돈황으로 가는 것이 정상 코스였으나 돈황은 흉노의 지배하에 있었다. 차이담 분지의 야강족은 장건이 월지에서 입수한 정보에 의하면 자립국(自立國)이었으나 막상 들어가 보니 이미 흉노에게 복속되어 있었다. 결국 장건은 이곳에서도 또 억류당하였다.

돈황석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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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여의 억류 끝에 장건은 흉노의 군신 선우가 죽고 그의 태자와 동생이 선우의 자리를 놓고 벌이는 내분을 틈타 탈출에 성공하였다.

원삭 3년(기원전 126) 장건은 무려 13년 만에 장안으로 돌아왔다. 월지와의 군사동맹 체결은 실패하였으나 그의 보고에 의해 한나라는 서역의 정세를 보다 상세히 알 수가 있었다.

긴 억류 생활을 하는 동안 그는 흉노의 세력권 안에 있는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며 초원·사막·산악·호수·도로 등을 그의 발군의 기억력으로 머릿속에 지도를 그려넣었던 것이다. 장건의 지리적 지식 덕분에 그 후 한군은 물이나 군량 부족으로 고통을 받은 일이 없었다. 귀국한 후 장건은 열후의 자리에 올랐다.

원수 2년의 곽거병의 원정 때 장건이 기일을 지체했다는 이유로 참형의 구형이 내려지자 속전(贖錢)을 물고 서인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 후 무제는 자주 장건을 불러 서역의 정세를 물었고 얼마 후 장건의 관직과 명예는 회복되었다.

장건은 귀국 후 1년 남짓해서 죽었다. 그는 죽었지만 그의 노력은 열매를 맺기 시작하여 한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지 않았던 오손·야랑(夜郞)·대완 등이 자진해서 한나라와 외교 관계를 맺는 등 한나라의 위엄은 널리 서역까지 떨쳤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실크로드는 바로 한무제 때 장건이 처음 개척한 것으로 그 의의는 매우 크다 하겠다.

그 후 무제는 남월을 평정하여 9군을 두고, 또 서남이(西南夷)를 평정하여 5군을 설치하였으며 동으로 위만조선(衛滿朝鮮)을 평정하여 낙랑(樂浪)·임둔(臨屯)·현도(玄寃)·진번(眞蕃)의 4군을 설치하였다.

무릉

한무제의 릉. 무제가 즉위하면서 공사를 시작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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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영 집필자 소개

서울에서 태어나 한문사숙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충남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저서로 《이야기 일본사》, 《이야기 중국사》가 있다.

출처

이야기 중국사1
이야기 중국사1 | 저자김희영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중국 고대부터 전한 시대까지의 역사를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함께 이야기 식으로 풀어 썼다. 엄청난 인구와 광대한 국토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이야말로 진정한 중국의 힘이며,..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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