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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1 은주시대
주왕조의 창업
주왕조의 건국을 축하하는 식전이 끝난 후 무왕은 망국의 백성이 된 은나라 사람들의 인심을 어떻게 수습할 것이며 이제 겨우 얻은 넓은 영토를 어떻게 통치해야 할 것인지, 그리고 새로운 주왕조를 어떻게 강화해야 할 것인지를 중신들과 의논하였다.
군사이며 일등 공신인 강태공은 “적을 모두 죽여 후환의 씨를 남기지 말아야 합니다.”라고 주장하였으며, 소공(召公)은 “죄가 있는 자는 죽이고 죄가 없는 자는 용서하여 각각 응분의 처분을 내려야 합니다.”라고 주장하였다.
이에 반하여 주공은 “주왕의 아들 녹보(祿父)를 제후로 삼아 ‘은으로써 은을 다스린다.’는 방법을 쓰는 것이 좋겠습니다.”라고 제언하였다.
무왕은 주공의 의견을 받아들여 주왕의 아들 녹보를 은의 수도였던 조가에 봉하여 그들 일족을 위안시키게 하고, 기자를 석방하고 비간의 묘를 마련하였다.
무왕은 풍읍으로 돌아와 도읍을 호(鎬)로 옮기니 이곳이 호경(鎬京)으로 13대 평왕이 낙양으로 도읍을 옮기기 이전인 서주(西周)의 수도가 되었다. 이어서 공신과 일족(一族)에 대한 논공행상이 행해졌다. 태공망 여상은 제(齊)나라에, 주공 단은 노(魯)에, 소공은 연(燕)에, 그 밖의 공신들에게도 서열에 따라 봉토를 나누어주는 봉건제를 실시하였다. 동생인 숙선(叔鮮)은 관(管)에, 숙도(叔度)를 채(蔡)에 봉하여 이들로 하여금 은의 녹보(祿父)를 감시하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여 희망에 찬 주왕조의 봉건 국가는 힘찬 걸음을 내디뎠고 주공은 예악과 법도를 제정하여 봉건 국가의 기틀을 다져갔다.
논공행상의 훈공 제1등은 말할 것도 없이 태공망 여상이었다. 그는 제(齊)에 봉함을 받아 제후가 되어 임지로 떠나게 되었다. 특히 고향으로 금의환향하는 제의 마음은 기쁨과 착잡함으로 엇갈리고 있었다. 지난날 가난한 집안 살림을 도맡아 자기를 극진히 돌보다가 결국 견디지 못하고 달아난 부인의 일 등은 잊혀지지 않는 서글픈 일이었다.
구종배들이 시위 소리를 지르며 지나가는데 길 닦는 일에 부역나온 사람들이 길을 비켜서고 있었다. 초라한 늙은 여인의 모습이 힐끗 눈에 띄었다. 낯이 익은 여인이었다. 바로 자기를 버리고 달아난 부인이었던 것이다. 태공망 여상은 시종을 시켜 그 여인을 수레 앞에 대령시켰다. 영문을 몰라 하는 그 여인에게 “고개를 들고 나를 쳐다 보시오.” 하였다.
고개를 들고 그를 쳐다본 여인은 옛정을 생각해서 다시 아내로 맞아달라고 애원했다. 여상은 물을 한 그릇 가져오도록 하여 그릇의 물을 땅바닥에 쏟게 한 다음 그 물을 다시 그릇에 주워 담아보라고 하였다. 한번 땅에 쏟은 물은 다시 담을 도리가 없었다.
“엎지른 물은 다시 그릇으로 돌아올 수 없듯이 한번 끊어진 인연은 다시 맺을 수가 없는 법이오.”
그 여인은 끝까지 견디지 못한 자신의 행동을 얼마나 뉘우쳤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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