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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1 은주시대
주왕조의 발상지
주(周)의 시조는 요순 선양 시대 농업 담당 장관이었던 후직(后稷)으로 성은 희(姬), 이름은 기(棄)이다. 그의 어머니는 유태씨(有邰氏)의 딸로 이름은 강원(姜原)이고 오제의 한 사람인 제곡(帝嚳)의 정비였다고 한다. 후직의 어머니가 어느 날 들에 나갔다가 거인(巨人)의 발자국을 보고 공연히 마음이 이끌려 그 발자국을 밟자 그 후로 태기가 있었다고 한다.
달이 차서 후직을 낳았는데 임신 때의 이러한 일 때문에 상서롭지 못하다 하여 후직을 버렸다. 그런데 기적이 일어났다. 처음에는 좁은 길목에 버렸는데 말이나 소들이 그를 밟지 않고 피해 지나갔으며 다음엔 숲속에 버렸는데 인적이 드물었던 숲속에 갑자기 사람의 왕래가 빈번해졌다. 다시 얼어붙은 강물에 옮겨 놓았는데 갑자기 새들이 모여들더니 날개로 그 아이를 덮어 보호하는 것이었다.
후직의 어머니는 비로소 그 아이가 보통 아이가 아님을 알고 소중하게 키웠다. 그리고 버리려고 했던 아이라 하여 기(棄, 버린다는 뜻)라는 이름을 붙였다.
기는 과연 비범한 아이였다. 씨뿌리기를 좋아했고 이 아이가 뿌리고 심은 곡식이나 나무는 아주 잘 자랐다. 장성함에 따라 농사에 대한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하자 순임금은 그를 후직(지금의 농수산부장관)으로 삼아 만민에게 합리적인 농사법을 가르치게 하였다. 그때부터 후직이라 불리게 되었다.
후직의 아들은 부줄(不窋)이고, 부줄의 아들은 공유(公劉)이다. 공유의 9대째인 고공단보(古公亶父) 때에 이르러 수도를 기산(岐山)으로 옮기고 국명을 주(周)라 정하면서 비로소 제후국으로의 기틀을 갖추게 되었다.
이 고공단보가 태왕(太王)으로 불리는 사람으로 세 명의 아들을 두었는데 태백(太伯), 우중(虞仲), 계력(季歷)이었다. 막내인 계력은 어진 아내를 맞아 창(昌)을 낳았는데, 창이 태어날 때 붉은 새가 단서(丹書)를 물고 산실(産室) 문에 날아드는 상서로운 일이 있었다. 과연 창은 자라나는 품이 범인과 달라 장래를 기대할 만한 인물임을 알 수 있었다. 창의 이 같은 모습을 눈여겨 본 태왕은 장차 창에게 가계를 물려줘야겠다는 속마음을 굳히고 있었다. 그렇게 하자면 막내아들인 계력에게 자기의 지위를 물려줘야 했다. 그러나 당시의 주나라에서는 철저한 장자 상속제를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문제는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와 같은 아버지의 의중을 헤아린 태백과 우중은 서로 상의하여 멀리 남쪽에 있는 형만(荊蠻) 땅으로 갔다. 그들은 가계를 이을 자격을 스스로 포기하기 위하여 오랑캐의 풍습에 따라 온 몸에 문신(文身)을 하고 머리를 잘라버렸다. 이렇게 하면 제일 중요한 조상의 제사를 받들 수 없기 때문이었다. 주나라 영주로서의 자격을 잃게 되는 것이었다.
그 후 태백과 우중은 형만의 땅에서 수장(首長)으로 추대되어 나라를 세웠는데 그로부터 600년 후 월왕(越王) 구천(句踐)에게 멸망당했다는 오왕(吳王) 부차(夫差)는 바로 그들의 후손이라는 전설이 있다.
이 같은 두 형의 깊은 뜻에 힘입어 계력은 아버지 태왕의 뒤를 이었고 그가 죽자 대망하던 창이 그 자리를 이었다.
은왕조의 주왕이 제위에 오른 것은 서방의 주나라가 제후국으로서 명성을 높이고 명군(名君)으로서 인망을 모으고 있던 창(昌, 나중의 文王)의 시대였다. 창은 그의 할아버지 태왕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어진 정사를 펴 나날이 국력이 신장되어 갔으므로 은 왕조로서도 이 강력한 제후국의 영주인 창에게 서백(西伯)각주1) 이라는 작위(爵位)를 수여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이 서백이 바로 동료 대신이었던 구후와 악후의 참혹한 죽음을 듣고 탄식했다가 유리(羑里)의 옥에 갇혔던 창이다.
《죽서기년》에는 창의 아버지 계력이 은의 문정(文丁)에게 살해되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나 사마천은 이 기록을 싣지 않고 있다. 《제왕세기(帝王世紀)》에는 주왕이 인질로 잡고 있던 창의 아들을 자살(煮殺)각주2) 하고 수프를 만들어 창에게 먹였다는 이야기가 실려 있는데 여러 가지 사료에 실려 전하는 주왕의 포악무도는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려운 실정이다. 은왕조의 멸망은 주왕의 포학보다는 잦은 정벌(征伐)에 있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갖게 한다.
창이 아버지의 뒤를 이어 주나라의 영주가 되자 그는 주왕의 포학한 정치와는 대조적으로 노인을 공경하고 약한 자를 자애하며 인덕(仁德)을 쌓아가는 한편 주나라의 판도를 넓히기 위해 견융(犬戎)을 토벌하고, 다시 서쪽에 있는 밀수국(密須國)과 기국(耆國)을 정벌하였다. 다시 동쪽의 한(邗)을 정벌하였고 그가 죽기 1년 전에는 숭후호(崇侯虎)를 정벌하였는데 숭후호는 전에 서백을 주왕에게 밀고하여 옥에 갇히게 했던 제후국으로 그 영토는 섬서성(陝西省) 서안시(西安市) 부근에 있는 풍읍(豊邑)이었다.
숭후호를 토멸한 창은 기산(岐山)에서 풍읍으로 도읍을 옮겨 날로 세력이 신장되었다.
하지만 주왕은 이와 같은 주나라의 동태를 별로 중요시하지 않았으며 주나라의 세력을 경계해야 한다는 간언에도,
“천 명이 나에게 있으니 서백이 무슨 일을 하겠는가.” 하고 동방의 정벌에만 급급하였다.
풍읍으로 도읍을 옮긴 서백은 더욱 인덕을 쌓는 한편 인재를 널리 구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유리에 갇혔을 때 자신을 구해준 적 있는 굉요(閎夭), 산의생(散宜生) 등이 그의 곁으로 돌아왔고 주나라의 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도 이 무렵에 위수(渭水)가에서 맞아들인 인물이다.
여상은 동해가에서 태어났다. 젊어서는 공부에만 힘쓰고 집안일에는 도무지 신경을 쓰지 않았다. 멍석이 떠내려가도 모른다는 속담이 있듯이 그는 자나깨나 공부밖에 몰랐다. 10년, 20년이 지나도 과거 한 번 보지 않고 늘 그런 상태이니 집안 형편은 말이 아니었다. 이제나 저제나 바라고 있던 그의 아내는 지쳐 마침내 달아나버리고 말았다.
궁팔십달팔십(窮八十達八十)이라는 태공망에 대한 이야기가 있다. 여든 살은 궁하게 살고, 여든 살은 영달하였다는 말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그의 아내는 검은 머리 파뿌리 되도록 남편을 섬기며 견디다 못해 달아난 셈이니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태공망 여상은 매일 위수에 나가 낚시질을 하고 있었다. 그는 고기를 낚기 위해서가 아니라 세월을 낚기 위해 낚시질을 하고 있었다. 그의 낚시질에도 여러 가지 설화가 전한다.
여상이 위수가에서 3주야를 꼬박 새우며 낚시질을 하였으나 웬일인지 입질조차 없었다. 여상이 의관을 벗어던지며 화를 내자 밭을 갈던 노인이 여상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그렇게 화만 내지 말고 잠자코 더 계속하시오.” 하였다.
이에 여상이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낚시를 던지자 처음에는 붕어가 나오고 다음에는 잉어가 나왔다. 잉어의 배를 갈라보니 “여상이 장차 제나라의 제후가 될 것이다.”라는 글발이 나왔다.
한편 인재를 구하기에 여념이 없던 서백이 어느 날 사냥을 나가기 위해 점을 쳐보았다. 점괘는 대길이었다.
“얻는 것은 용도, 곰도, 교룡(蛟龍)도, 범도 아니다. 얻는 것은 패왕(覇王)을 보좌할 인물이다.” 서백은 내심 기뻐하면서 이리저리 달리며 사냥을 하였다. 그러나 이날 따라 잡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는 사이에 수레는 이미 위수 기슭에 당도해 있었다. 멀리 바라보니 한 노인이 홀로 앉아서 낚시줄을 던지고 있었다. 그 모습을 바라보는 순간 서백은 예사 사람이 아님을 육감으로 느꼈다. 곁으로 다가가 정중히 인사를 나눈 후 몇 마디 말을 주고 받는 사이에 서백은 감탄하고 말았다.
“저의 태공(太公, 조부인 고공단보)께서 일찍이 말씀하시기를 언젠가 성인(聖人)이 나타나 주나라에 올 것이다. 주나라는 이 성인을 얻어 번창할 것이다 하셨습니다. 당신이야말로 그 사람입니다. 삼가 가르침을 받고자 합니다.”
서백은 여상을 스승으로 받들었으며 여상은 주나라에 봉사함으로써 주나라가 천하를 제패하게 되었다. 태공이 무척 기다렸다 하여 ‘태공망(太公望)’이라는 호가 붙여졌으며 후세에 이르러 태공망(태공)은 낚시꾼의 대명사로 사용되고 있다.
여상에 대해 《사기》에는 위의 이야기와는 좀 다른 설을 소개하고 있다.
여상은 매우 박식(博識)한 사람으로 일찍이 은의 주왕을 섬겼으나 그의 포학무도함을 보고 그의 곁을 떠나 여러 나라 제후들을 설득하였으나 아무도 그의 재능을 제대로 평가해주는 제후가 없었다. 그는 방랑 끝에 서쪽으로 가 주나라의 서백으로부터 인정을 받아 등용되었다고 한다.
혹은 여상은 본래 처사로서 해변가에서 은거 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주나라 서백이 유리의 옥에 갇혔을 때 서백의 측근인 산의생, 굉요가 여상에게 자문을 청하자 그는 “주왕은 미인을 좋아하니 천하의 미인을 골라 바치라.”는 계책을 가르쳐 줌으로써 주나라와 관계를 맺는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서백은 한층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을 편안케 하니 이러한 소문은 차차 먼 나라까지 퍼져 제후의 마음은 모두 서백에게 쏠렸다.
제후국인 우국(虞國)과 예국(芮國)은 서로 인접한 나라인데 그 경계선을 에워싸고 분쟁이 일어나 몇 해가 되어도 해결될 실마리가 보이지 않았다. 두 나라 제후들은 궁리 끝에 당시 어질고 덕망이 높은 서백에게 호소하기 위해 주나라로 들어섰다. 주나라 영내에 이르자 그들은 놀라운 사실을 발견했다.
밭을 가는 농부는 서로 밭두둑을 양보하고, 길가는 사람은 서로 길을 양보하고, 짐을 진 노인은 하나도 없고, 있다면 모두 젊은이들뿐이었는데 그 행동이 자연스럽고 몸에 배인 흔적이 역력히 보였다. 만나는 사람마다 모두 온화한 말로 인사를 주고받으며 활기가 넘쳐 있었다. 그들은 자신들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었다. 주나라 백성들의 행동에 감화된 것이다.
“우리들이 지금까지 싸운 일은 매우 창피한 일이오. 서백을 만나 이야기할 문제가 되지 못하오.”
두 사람은 이후 돌아가서 다시는 다투지 않았다고 한다. 이처럼 서백의 덕화는 이처럼 가까이는 주나라 백성과 멀리는 제후들에게 미치니 제후의 마음은 점점 서백에게 기울어졌고 장차 천명을 받아 천자가 될 여건이 무르익어가고 있었다. 그러나 서백은 의연히 인덕을 쌓고 선정을 베풀기에 힘을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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