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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1 전한시대
오초 칠국의 난
문제 시대 흉노가 이따금 변경을 침범하여 약탈을 감행한 일은 있었으나 대규모적인 침공은 없었다. 문제는 흉노에 대하여 화친 제일주의를 취하여 변경의 수비를 엄중히 한 정도에 그쳤다. 한때는 흉노를 원정할 구상도 했으나 흉노가 스스로 군사를 철수시켰기 때문에 사실상 원정은 한 번도 없었다.
혜제 이후 50여 년간 큰 전쟁이나 큰 공사가 없이 천하는 잘 다스려졌으나 그 가운데서도 사회의 불합리한 현상은 점점 돋아나고 있었다. 언제까지고 ‘청정무위(淸淨無爲)’의 정치에만 맡기고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이 제일이라고 방치할 수는 없었다.
태평을 구가하는 시대에도 예리한 관찰력을 가진 사람은 다른 사람이 전혀 느끼지 못하는 불합리한 현상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노장 사상에 젖어든 사람이라면 비록 그런 기미를 알아차려도 세상이 흘러가는 대로 내버려둘 수밖에 없다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유가나 법가의 사람들은 이미 ‘무위’만으로는 세상이 막다른 골목에 다다랐다고 위기감을 느끼게 된다. 문제·경제 시대에 걸쳐 이 같은 예리한 관찰력을 가진 사람은 유가인 가의(賈誼)와 법가인 조조(鼂錯)였다.
가의는 낙양 사람으로 그의 나이 18세 때 시를 외고 글을 짓는 데 능숙하다는 소문이 자자하였다. 얼마 후 가의는 박사가 되니 이때 그의 나이 겨우 20세로 최연소 박사였다. 가의는 제자백가의 글에 능통하여 여러 노선배들이 말하지 못하는 것을 다 대답하니 문제는 기뻐하여 1년 안에 태중대부로 승진시켰다.
가의는 예악을 일으켜야 한다고 정열적으로 문제를 설득하니 문제도 그의 열의에 감동되어 장차 가의를 중용하려 하였다.
가의의 이 같은 승진을 마땅치 않게 여긴 것은 승상 주발과 태위(大尉)각주1) 관영의 무리였다. 그들은 고조를 따라 진나라를 무찌르고 항우와 싸워 천하를 얻는 데 크게 공헌한 건국의 원훈이었다. 건국 20년에 스물 안팎의 새파란 젊은 놈이 무엇을 안다고 함부로 지껄이니 그들의 비위가 뒤틀리는 것도 당연했다. 가의는 지금까지 실시해 온 정책을 비판할 뿐 아니라 새로운 계획을 잇달아 진언하니 노신들은 가의가 눈엣가시처럼 여겨졌다. 그들은 가의를 헐뜯어 말하였다.
“낙양 사람은 나이가 적고 학문한 기간도 얕으면서 오로지 정권을 제 마음대로 처단하여 모든 일을 어지럽게 만들려고 합니다.”
문제는 가의의 재능을 인정하고 있었으나 중신들로부터 몹시 미움을 받는 인물의 등용은 가능한 피하기 위하여 가의를 장사왕(長沙王)의 태부로 삼았다.
왕의 태부라고 하면 이름은 거창하지만 장사국은 가난하기로 유명한 나라였으므로 좌천이나 다름없었다. 세상을 걱정하고 백성을 구하려는 젊은 가의의 이상은 황제 주변의 노신들에 의해 여지없이 좌절당하고 만 셈이었다. 가의는 귀양살이를 가는 심정과 같았다. 임지인 장사로 가기 위해서는 멱라강을 건너야 한다.
가의는 이곳에서 투신자살한 굴원의 일을 자신과 비유해보았다. 굴원은 참소를 입어 추방당했고 가의는 노신들의 미움을 받아 좌천당했다. 그는 부(賦)를 지어 굴원을 조상하였다.
장사에 있은 지 4년 만에 가의는 문제의 막내아들인 양왕 유읍(劉揖)의 태부가 되었다. 양왕의 태부가 된 가의는 자주 상서를 올려 정치를 논하였다. 그는 세상 사람들이 사치에 흘러 농민이 농사를 버리고 도시로 이주하여 상공업에 종사하는 것을 우려하였다. 그는 농업을 인간의 본업이라 하고 상공업은 말업(末業)이라 하여 농본주의 정책을 주장하였다.
가의의 진언이 어느 정도 받아들여졌는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농본주의는 원래 한왕(유방)조의 건국 이념이었다. 농본주의 외에 가의가 문제에게 진언한 것은 제후들의 힘이 너무 비대하기 때문에 그들의 세력을 약화시켜야 한다는 것이었다. 가의는 그 대책으로서 제후의 나라를 가능한 분할할 것을 진언하였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어떤 제후왕에게 5인의 아들이 있으면 종전까지는 한 사람의 왕자만 왕위를 계승하기로 되어 있었던 것을 5인에게 평등하게 분할, 계승시키자는 내용이었다. 이렇게 하면 왕의 수는 늘어나지만 나라의 규모는 작아져서 제후들의 힘의 팽창을 예방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가의는 양왕 유읍이 낙마(落馬)하여 죽자 자기의 책임이라고 비관하면서 울음으로 세월을 보내다가 1년 후 33세로 죽었다. 가의가 진언한 제후왕에 대한 대책은 조조에 의해 추진되었다.
고조가 죽은 후 40년의 휴식 기간이 흐르는 동안 사회적 불합리 현상은 있었으나 국력은 크게 증강되었다. 제후왕과 열후의 나라도 이에 따라서 같이 부강하게 되었지만 중앙 정부의 힘이 더욱 비약적으로 부강해졌다.
정권의 생리도 생물과 비슷한 점이 있는 모양이었다. 강하면 강할수록 더욱 강력해지고 싶은 것처럼 한의 중앙 정부는 부강해질수록 더욱 강력한 중앙 집권을 꾀하려 하였다. 이러한 정책은 결과적으로 제후왕의 힘을 약화시키는 결과를 가져와 제후들이 반란을 일으키게 되었다.
황족의 원로격인 오왕 유비(劉濞)가 중앙 정부에 대하여 반동을 일으키는 주도 세력이 되어 반란을 일으켰다.
유비는 고조 유방의 형인 유중(劉仲)의 아들로 문제의 종형이다. 문제는 재위 23년에 죽고 그의 아들 유계(劉啓)가 즉위하여 경제가 되었다. 유비는 일찍이 숙부인 고조가 경포 토벌 작전에 친정할 때 종군한 공로로 약관 20세에 오왕이 되어 그의 부친의 불명예를 씻었다.
고조 유방은 젊었을 때 가사는 돌보지 않고 무뢰배 생활을 일삼아 아버지 태공의 마음을 몹시 상하게 하였다. 이에 비하여 유방의 형 유중은 가사에 충실하고 치산에도 힘써 인근에서는 칭송이 자자하였다. 태공은 형처럼 착실한 인간이 되라고 입버릇처럼 유방을 나무란 적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러나 무뢰배로 속을 썩이던 유방이 황제가 되었다. 황제가 된 유방이 부친인 태공에게 “아버지께서는 늘 저를 살림을 못하는 건달이라고 나무라시면서 형을 본받으라 하시더니 지금 제가 해낸 일과 형이 한 일 중 어느 쪽이 더 훌륭하다고 생각하십니까?”라고 말하자, 이를 지켜 보던 군신들은 모두 만세를 부르고 너털웃음을 웃어가면서 즐겼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이렇게 군신들이 웃은 데는 황제 유방의 형 유중이 그 전 해에 큰 실수를 저질렀기 때문이었다.
고조의 형 유중은 처음에 대의 왕으로 세워져 봉국인 대 땅으로 부임했다. 대 땅은 흉노와의 접경지대였다. 그곳의 왕으로서 임무 수행이 어렵게 되자 그곳을 버리고 낙양으로 도망쳐 돌아오자 그 벌로 왕에서 합양후(合陽侯)로 격하당했던 일이 있었던 것이다.
가업을 다스리는 일은 동생인 고조보다 앞섰으나 제후왕으로서 유중은 낙제감이었다. 고조가 경포 토벌 때 유중의 아들 유비(劉濞)를 종군하게 한 것은 아버지의 불명예를 만회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 위한 배려에서였다. 어떤 공로로 오왕이 되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일단 아버지가 잃었던 제후왕의 지위를 도로 찾은 셈이었다.
경제가 즉위했을 무렵 유비는 오왕에 재위한 지 40년에 가까웠다. 그런데도 그는 꽤 오랫동안 장안에 입조하지 않고 있었다. 그가 입조하지 않는 데는 나름대로의 이유가 있었다.
문제 때에 있었던 일이다. 오왕의 아들이 오태자의 신분으로 입조하여 황태자 시절의 경제와 바둑을 두다가 약간의 시비가 벌어져 경제가 던진 바둑판에 맞아 오태자가 죽은 사건이 있었다.
그 후로 오왕은 병을 일컫고 입조하지 않았다. 문제도 자기의 아들인 황태자의 잘못으로 일어난 사건이었으므로 오왕에게 궤장(几杖)각주2) 을 내리고 그의 결례를 문제삼지 않으려 했다.
문제가 죽자 아들의 원수인 경제가 즉위하였다. 그런데다 장안의 중앙 정부에서는 문제 시대의 정책을 이어받아 제후왕의 힘을 약화시키기 위해 이것저것 성가시게 트집을 잡고 있었다. 경제가 즉위하자 그 측근이었던 조조가 어사대부로 등용되었다. 이것은 부수상에 상당하는 지위였다. 조조는 가의의 제후왕 봉지 삭감론을 계승하여 이를 강력히 추진하려 하였다.
맨 먼저 공격의 대상이 된 것은 초왕 유무(劉戊)였다. 박태후의 상중에 여자를 가까이했다는 이유로 사형을 면하는 대신 동해군 38현을 몰수당했다. 그 다음은 교서왕(膠西王) 유앙(劉卬)이 매작(賣爵)사건과 관련해서 6현을 몰수당했다. 조왕인 유수(劉遂)도 죄가 있다 하여 상산군 18현을 바치기로 하였다.
이렇게 되면 바둑 사건으로 입조하지 않았던 오왕이 문제시되는 것은 뻔한 일이었다. 문제가 살아 있을 때는 관용을 베풀어 그의 사촌형이 늙고 병들었다 하여 궤장(几杖)을 내리기도 하였으나 경제는 그의 아버지처럼 관대하지 않을 뿐더러 조조는 냉철한 현실주의적 정치가였다.
오왕 유비는 40년 동안이나 오나라를 다스려 왔다. 구리나 소금의 국영으로 인하여 백성들에게서 세금을 거둘 필요가 없었으며 정치는 원만히 이루어지고 있었다. 이러한 오나라에 오왕은 무척 애착을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땅을 삭감당하는 일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되었다.
봉지를 빼앗기거나 빼앗기기 일보 직전에 몰려 있는 제후왕이 자꾸만 늘어갔다.
이런 판국에 황족의 원로격인 오왕 유비로부터 각 제후들에게 다음과 같은 호소의 편지가 날아들었다.
“이런 상태로 나가다간 우리들 제후왕들은 점점 가난해져 마침내는 멸망하여 한나라에 병탄되고 말 것이다. 앉아서 멸망을 기다리는 것보다는 일어나서 살 길을 찾는 것이 낫지 않겠는가?”
함께 궐기하여 살 길을 찾자는 권유였다.
반란을 일으키려면 명분이 있어야 한다. 한의 황제는 제후왕에 대하여 어디까지나 큰집이므로 정면으로 공격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런 때 모반의 이유로 등장하는 구실은 어느 시기에나 거의 비슷한 내용이다.
오왕 유비가 내세운 모반의 구실은 “황제 곁에서 정사를 그르치는 간사한 무리를 제거하지 않으면 안 되겠다.”는 것이었다.
오왕의 권유에 따라 처음 모반에 가담한 나라는 모두 9국이었으나 그 후 두 나라가 탈락하여 마침내 모반의 군사를 일으킨 제후국은 모두 7개국이었다. 이것을 ‘오초 칠국의 난’이라 부르는데 경제 3년(기원전 154)의 일이었다.
오왕 유비가 모반을 결심하게 된 결정적 계기는 이 해 정월에 오나라에 돈을 벌어주는 소금의 생산지 회계군과 구리의 생산지인 예장군(豫章郡)을 중앙 정부에 바치라는 통보가 오왕 유비에게 전해졌던 것이다.
소금의 제조와 구리 광산의 개발은 어디까지나 모두 오왕 유비에 의해 추진된 것으로 오나라 소유임에 틀림없었다. 그것을 중앙 정부에서 송두리째 가로채려고 하니 오왕의 입장에서 보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경제로 말하면 자신의 아들을 바둑판으로 때려 죽인 장본인이 아니었던가? 마침내 오왕 유비는 반란을 결심하였다.
탈락한 두 제후는 제왕 유장려(劉將閭)와 제북왕 유지(劉志)였고, 오왕의 권유에 동의하여 반란에 가담한 여섯 제후왕은, 초왕 유무(劉戊), 조왕 유수(劉遂), 교서왕 유앙(劉卬), 교동왕 유응거(劉雄渠), 치천왕 유현(劉賢), 제남왕 유벽광(劉辟光)이었다.
맹주격인 오왕은 오나라에 동원령을 내렸다. 그는 당시 62세의 고령이었고, 겨우 14살이었던 막내아들까지도 종군하였다. 오나라에서는 14세 이상 62세까지의 남자 전원을 군대로 편성하니 모두 20만 명에 이르렀다. 이 수를 기준으로 환산해볼 때 오나라는 3군 53현의 큰 나라였으나 그 인구는 예상 외로 적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인구의 증가는 장안을 중심으로 한 관내 지방이나 낙양을 중심으로 한 중원 지방에서 급격한 증가 현상을 보였을 뿐이고 오나라처럼 남쪽에 치우친 지방 등에서는 그다지 뚜렷한 증가 현상은 없었다.
오왕의 권유에 호응한 여섯 나라는 경제적으로는 구리·소금으로 부강해진 오나라에 의존하고 있었으나 병력이 문제였다. 오나라는 한나라의 외번(外藩)인 민월(閩越)과 동월(東越)에게도 구원병을 요청하였다. 동월은 현재의 절강성, 민월은 복건성에 있는 나라였다. 동월은 구원병을 보내왔으나 민월은 거부하였다. 조나라도 북쪽의 흉노와 연락하여 원병을 얻기로 하였으니 내전에 외세까지 개입된 셈이었다.
한왕(유방)조는 건국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아 조정은 술렁거리기 시작하였다.
경제는 즉위한 지 얼마 안 되어 조정에서의 정치적 세력 관계도 아직 안정되지 못한 상태에 있었다. 문제 시대의 중신과 경제가 즉위한 후 기용한 대신과의 협조 관계가 잘 이루어지지 않는 상태였다. 경제가 발탁한 인물 가운데 두각을 나타낸 인물은 조조였는데 당시 조조는 태자가령(太子家令)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이 직책은 비서실장과 같은 것으로 경제의 제일 측근자였다.
경제가 즉위했을 당초의 승상은 신도가(申屠嘉)였고, 어사대부는 도청(陶靑)이었다. 경제는 조조를 등용하여 내사(內史)를 삼았는데 내사는 도지사(都知事)에 상당하는 요직으로 조조의 권세는 승상을 능가하고 있었다. 경제는 조조의 말만 듣고 승상의 의견은 별로 받아들이지 않는 상태였으므로 구신과 새로 기용된 대신 간의 마찰이 있었던 것은 당연하였다.
내사가 된 조조는 출입의 편리를 위하여 관청의 남쪽에 조그마한 문을 뚫었는데 그 문이 태상황(고조 유방의 아버지)의 사당 담장과 맞닿아 있었다. 이를 안 승상 신도가는 “조조가 무례하게도 태상황의 사당 담장을 뚫었으니 마땅히 불경죄로 다스려 그를 참형에 처해야 합니다.”라고 경제에게 진언하였으나 경제는 도리어 “사당의 담장이라 하지만 그것은 바깥 담장에 지나지 않으며 또 그 일은 내가 시킨 일이니 내사에게는 아무 잘못이 없소.”라고 하여 조조를 비호하였다.
승상은 분해 견딜 수가 없었다.
“먼저 조조의 목을 벤 다음 불경죄를 논했더라면 좋았을 것을!” 하고 한탄하다가 피를 토하고 죽었다.
그러자 도청이 승상으로 승진하고 공석이 된 어사대부에는 내사 조조가 임명되었다. 그의 권세는 하늘을 찌를 듯 강성하였으며 그는 의욕적인 인물이었기 때문에 정적을 타도하는 데도 매우 적극적이었다. 이 때문에 문제 시대의 고참 중신인 신도가 두영(竇嬰)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있었다.
조조를 미워한 사람은 또 있었다. 원앙(袁盎)이라는 인물이 었는데, 그는 의협심이 강한 사람으로 중랑장의 관직으로부터 제나라·오나라의 승상을 역임한 바 있었다. 말하고 싶은 일은 단도 직입적으로 서슴없이 말하고 싫은 것은 싫다고 솔직하게 말하는 이론과 실천이 일치하는 인물이었다.
문제 시대 제일 먼저 제후왕의 세력을 약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사람이 원앙이었다. 같은 정견을 갖고 있고 성격도 비슷했기 때문인지 모르지만 이들 두 사람은 견원지간이었다. 조조가 있는 곳에는 원앙이 가지 않았고 마찬가지로 원앙이 있는 곳에는 조조도 가지 않았다. 얼마 후 조조는 “원앙이 오왕으로부터 뇌물을 받았다.”는 혐의를 뒤집어씌워 삭탈관직하여 서인으로 삼았다. 이것은 어사대부의 막강한 권력에 의한 처분이었다.
오초 칠국의 난이 일어나자 이번에는 원앙이 복수할 차례였다. 서인의 자격으로는 황제를 알현할 수 없었으나 황제의 측근에 있는 사람을 통하면 알현이 가능했다.
원앙은 두영을 통하여 “오초 칠국의 난을 피흘리지 않고 평정할 계책이 있습니다.”라고 하여 황제의 알현을 청하였다.
두영은 두태후의 조카로서 조조를 미워하는 구세력의 핵심 인물이었다. 원앙은 두영의 소개로 쉽게 황제를 알현할 수 있었다. 원앙의 계책은 간단하였다.
“칠국이 연합하여 반란을 일으킨 목적은 황제 곁에 있는 간사한 무리를 제거하는 데 있다 하였습니다. 간사한 무리로 지목된 조조를 베면 난은 평정될 것입니다.”
경제는 천하의 주인이었다. 조조는 그의 심복이며 가장 신뢰하는 신하임에는 틀림없었으나 천하를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다고 생각하였다.
10여 일 후 황제의 부름을 받은 조조는 관복을 입고 집을 나섰으나 그의 수레는 궁전으로 향하지 않고 형장인 동쪽 저잣거리로 향하여 마침내 그곳에서 참수당했다.
조조가 처형되었다고 해서 오초 칠국이 군사를 물리지는 않았다. 반란이라는 중대사를 결행하게 된 그들로선 상당한 각오가 있었던 것이다. 황제의 곁에 있는 간사한 무리를 제거한다는 것은 한낱 구실에 지나지 않았다.
원앙은 봉상(奉常)각주3) 에 등용되어 조조를 죽였다는 사실을 통고하기 위하여 오나라에 파견되었다. 그는 일찍이 오나라의 승상으로서 이곳에 부임한 적도 있어 오왕과는 잘 아는 사이였다.
오나라에 온 원앙을 오왕 유비는 만나려 하지 않았다.
“내가 이미 동제(東帝)가 되었거늘 누구에게 무릎을 꿇을 것인가?”라고 오왕은 말했다.
장안에서 황제의 사자가 오면 황제의 신하된 자는 모두 그의 칙사에게 배례를 드려야 했다. 오왕이 제후로서 원앙을 만나면 무릎을 꿇고 절을 할 의무가 있는 것이다. 만나지 않는다는 것은 절을 하지 않겠다는 뜻으로, 오왕이 장안의 황제를 서제(西帝)로 인정하여 동제인 자신과 대등하다고 생각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한나라가 진의 군현 제도를 그대로 답습하지 않고 제후의 나라를 두는 군국제를 채택한 것은 만약의 사태가 발생했을 때 황실의 번병(藩屛)각주4) 이 되어 반란군을 막아줄 것을 기대했기 때문이었다. 번병이 없는 진나라가 간단히 망해버린 사실에서 얻은 교훈을 살려보자는 의도에서였다.
번병으로서 황실을 지켜야 할 황족의 제후왕이 지금 반란군으로 둔갑한 것이다. 그것도 칠국이 연합하였으니 전 제후 왕국의 반 정도가 중앙 정부에 배반한 셈이다. 지도를 보아 알 수 있듯이 한의 판도 동남부를 차지한 제후왕의 반란이었다. 오왕이 ‘동제’를 자칭한 의도는 만약의 경우 장안의 중앙 정부를 무너뜨리지 못할 망정 적어도 천하를 양분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졌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군국제가 전혀 아무런 효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번병의 구실을 훌륭히 해낸 제후왕도 있었다.
양왕 유무(劉武)는 경제의 동생으로 같은 두태후의 소생이었으므로 경제와 가장 가까운 사이였다. 막내아들이었기 때문에 두태후는 양왕을 몹시 사랑하고 있었다.
황제의 동모제였으므로 반란군의 맹주인 오왕도 당초부터 양왕을 포섭 대상에서 제외시켰다. 모반 계획을 누설할 것이 확실했기 때문이었다.
반란군이 장안을 노리기 위해서는 먼저 양나라를 격파해야 한다. 양나라를 함락하지 않으면 배후를 역습당할 염려가 있기 때문이었다. 오·초의 연합군은 회수를 건너 극벽(棘壁)에서 양군을 일단 무찔렀으나 양나라 수도 수양(雎陽)은 끝내 함락시킬 수가 없었다. 양왕 유무는 오·초 연합군의 서진을 막는 데 훌륭한 번병 구실을 하여 끝까지 버티었다.
수도 장안에서는 주발의 아들 주아부(周亞夫)가 군사 최고 책임자인 태위로서 토벌군을 이끌고 창읍으로 진군하여 이곳을 기지로 삼아 오·초 연합군과 그들 본국과의 연락로를 차단하였다. 오왕 유비는 당황하여 창읍을 공격하였으나 주아부는 성문을 굳게 닫고 싸우려 하지 않았다. 보급로를 끊었으니 시간이 지나면 반란군은 식량이 떨어져 장병이 굶주리게 되리라는 것을 뻔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오·초 연합군에는 굶주려 죽는 자가 속출하였다. 굵주림에 견디지 못해 도망하는 장병이 잇달아 늘어났다. 오·초 연합군은 하는 수 없이 철수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주아부가 정병을 이끌고 그 뒤를 맹추격하니 오왕은 주력부대를 버리고 친위병만을 거느린 채 밤중에 도망치고 초왕 유무는 자살해버렸다.
교서·교동·치천왕 등은 제나라 수도 임치를 포위하였다. 제나라는 모반 동맹에 가담하라는 권유를 받고 처음에는 참가할 뜻을 보였다가 중도 탈락하였기 때문에 반란군들이 포위하였으나 제나라도 굳게 지켜 한 치도 양보하지 않았다.
조나라로부터 원병의 요청을 받았던 흉노도 반란군의 형세가 불리함을 보고 계속 대세를 관망하고 있었다.
단숨에 천하를 뒤집어 엎으려던 오왕 유비의 계획은 크게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주아부에 의해 오·초 양군이 격파되었다는 소문은 모반 동맹을 붕괴시키고야 말았다. 제나라 수도를 포위했던 제후의 군대는 후퇴하다가 한군의 추격을 받고 왕들은 모두 자살하고 말았다.
홀로 남은 조왕 유수는 조나라 수도 한단에서 저항했으나 한나라 장수 역기(酈寄)의 공격을 받고 마침내 자살하고 말았다.
도망친 오왕 유비는 장강을 건너 강남으로 가 구원군으로 참전해온 동월군의 영접을 받았으나 형세를 관망하던 동월군은 이미 한나라와 내통하고 있었다. 동월은 패전한 오왕을 죽여 그 수급을 한나라에 보냈다. 오의 태자 유구(劉駒)는 민월로 도망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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