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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1 춘추전국시대
전국시대 합종과 연횡
진나라가 상앙의 정치 개혁 이후 점차 세력을 확장하여 천하통일의 꿈을 착착 진행시키고 있을 무렵 제나라에서는 명재상 추기(鄒忌)를 등용하여 내정을 개혁함으로써 한때 주춤했던 세력을 만회하면서 점차 동쪽에서 번영하기 시작하였다.
전국 시대 초기 위나라가 패권을 잡은 데 이어 이번에는 진나라와 제나라가 패권을 다투는 양상이 벌어지게 되었다.
진나라와 제나라의 투쟁의 초점은 누가 먼저 초나라를 빼앗느냐 하는 데 있었다. 당시 초나라는 영토가 넓고 인구가 많아 천하의 대세를 좌우할 수 있는 막강한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었다.
이러한 정세 밑에서 진나라를 제외한 연·제·초·한·위·조 여섯 나라가 연합하여 강대국인 진나라에 대항해야 한다는 이른바 합종설(合從說)과 이에 대항해서 진나라가 이들 여섯 나라의 동맹을 분쇄하고 그들 나라와 각각 화친해야 한다는 이른바 연횡설(連衡說)이 중원의 정치 무대에 등장하였다.
합종설의 추진자는 소진(蘇秦)이고, 연횡설의 추진자는 장의(張儀)였다. 소진은 낙양 출신이고 장의는 위나라 사람인데 둘 다 귀곡(鬼谷) 선생에게 사사하였다.
귀곡 선생은 그 출신이 밝혀지지 않은 인물이다. 그가 전공한 것은 좋게 말하면 국제 외교라 할 수 있고 나쁘게 말하면 권모술수라고 하는 편이 타당하겠다.
소진은 학업을 끝내자 입신출세의 길을 찾아 여러 나라를 찾아다녔다. 수년 동안의 유세(遊說) 끝에 몹시 곤궁하여 집에 돌아오니 가족들의 냉대가 심하였다. 소진은 크게 분발하여 방문을 닫고 주대(周代)의 책인 《음부(陰符)》각주1) 를 찾아내어 엎드려 읽은 지 1년 만에 췌마(揣摩)각주2) 하는 법을 터득하고야 말았다.
“이 정도면 당세의 임금들은 충분히 설득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자신에 차 있었다. 먼저 제일 강대국으로 이름난 진나라를 찾아갔다. 그때 진나라는 효공이 죽고 상앙이 처형된 후 혜왕이 즉위한 지 얼마 안 되는 시기였다. 그래서 혜왕을 설득하였다.
“진나라는 사방이 요새로 둘러싸인 천혜(天惠)의 나라입니다. 동쪽에는 함곡관과 황하가 있고, 서쪽에는 한중(漢中)이 있으며 남쪽에는 파(巴)·촉(蜀)이 있고 북쪽에는 마읍(馬邑)이 있으니 이것은 하늘이 내려주신 요새의 땅입니다. 진나라의 선비와 백성들에게 병법을 가르친다면 천하를 통일하여 황제를 일컬을 수 있을 것입니다.”
진나라 혜왕은 그때 막 상앙을 처형한 직후였으므로 이론을 앞세우는 변사(辯士)를 미워하여 소진의 말을 달갑게 여기지 않았다.
소진은 동쪽으로 조나라를 찾아갔으나 정권을 잡고 있던 봉양군은 소진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에 소진은 연나라로 가서 문공(文公)를 설득하였다.
“연나라가 중원의 전쟁에 휘말리지 않고 타국 군대의 침공을 받지 않는 것은 조나라가 남쪽의 여러 나라를 덮어 막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대왕께서는 조나라와 종(從)으로 친교를 맺어 행동을 같이 한다면 연나라는 아무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
문후는 소진의 말을 옳게 여겼다.
“그대의 말이 옳소. 그대가 반드시 합종으로써 연나라를 편안하게 하고자 한다면 과인은 그대의 계책에 기꺼이 따르리다.”
이에 소진에게 거마(車馬)와 노자를 충분히 주어 조나라에 가게 하였다. 이때 조나라에서는 봉양군이 이미 죽었으므로 소진은 곧바로 조의 숙후를 설득하였다.
“지금 산동의 여러 나라들 가운데서 가장 강한 나라는 조나라입니다. 진나라의 입장에서 볼 때 천하에서 가장 방해가 되는 것은 조나라입니다. 그렇지만 진나라가 감히 조나라를 치지 못하는 것은 한나라와 위나라가 그들의 후방을 어지럽힐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진나라가 한나라와 위나라를 치는 데는 명산대천의 요새나 장애가 없기 때문에 누에가 뽕 먹듯 야금야금 먹어 들어가면 한나라와 위나라는 버틸 수가 없어 결국 진나라의 신하가 될 것입니다. 진나라에 한나라와 위나라가 그의 후방을 어지럽힐 염려가 없어지면 공격의 화살은 조나라에 집중될 것이니 이것이 신이 대왕을 위하여 염려하는 바입니다.
저 연횡론(連衡論)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모두 다 제후의 땅을 베어서 진나라에 주고자 합니다. 만약 이 일이 성공하면 그들은 크게 영달하여 자기 나라가 진나라에 화를 입을지라도 그 근심에 간여하지 않을 것입니다. 가만히 대왕을 위하여 생각하건대 한·위·제·초·연·조의 여섯 나라가 하나로 단결하여 종으로 친교를 맺어 진나라를 배척한다면 이보다 나은 계책은 없을 것입니다. 천하의 장수와 정승들을 원수(洹水)에 모이게 하여 서로 인질을 교환하고 다음과 같이 맹약하십시오.
‘만약 진나라가 어느 한 나라를 치거든 다섯 나라가 모두 정예부대를 보내어 어떤 부대는 진나라를 교란시키고 어떤 부대는 직접 구원해주기로 한다. 만약 맹약을 어기는 나라가 있을 때에는 다섯 나라가 연합하여 이를 친다.’
이렇게 합종(合從)하여 진나라를 배척하면 진나라의 군사는 감히 함곡관을 나와 산동을 침범하지 못할 것입니다. 이렇게 한다면 대왕께서는 패왕의 업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조나라 숙후는 크게 기뻐하여 소진에게 수레와 황금을 갖추어 주고 제후들과 맹약을 추진하는 책임을 맡겼다.
이때 진의 혜문왕은 서수(犀首)를 장수로 삼아 위나라를 쳐 장수 용가(龍賈)를 사로잡고 위나라 조음(雕陰)의 땅을 빼앗은 후 다시 군대를 동쪽으로 진군시키려 하였다. 소진은 만약 진나라의 군대가 조나라를 공격하게 되면 지금까지 추진한 합종의 맹약이 수포로 돌아갈 것을 걱정하여 계책으로 장의(張儀)를 격노케한 다음 장의로 하여금 진의 혜문왕을 설득하여 조나라를 치지 못하도록 조치하였다.
그리고 소진은 한나라의 선혜왕(宣惠王)을 설득하였다.
“한나라의 땅은 사방이 9백여 리나 되고 무장한 군대가 수십만 명이며, 천하의 강력한 활과 강한 쇠뇌는 다 한나라에서 나옵니다. 이제 대왕이 진나라를 섬기게 되면 진나라는 반드시 의양(宜陽)·성고의 땅을 요구할 것입니다. 그곳을 진나라에 바치고 나면 다음해에는 또다시 다른 땅을 요구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풀이되면 마침내는 줄 땅이 없을 것이고, 진나라의 요구는 그침이 없을 것입니다. 그들의 요구를 받아들인다는 것은 원한을 사고 화를 자초하는 일밖에 안 됩니다. 속담에 이르기를 ‘차라리 닭의 입이 될지언정 소의 궁둥이는 되지 않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대왕처럼 현명한 임금께서 강력한 한나라의 군대를 보유하고 있으면서 소의 궁둥이라는 이름이 있게 된다면 얼마나 부끄러운 일이겠습니까!”
이에 한왕(유방)이 발끈 성을 내며 팔을 걷어붙이고 칼을 어루만지면서 “과인이 비록 불초하나 결코 진나라는 섬기지 않을 것이요. 그대의 말이 백 번 옳으니 내 그 계책에 따르겠소.”
소진은 또 위왕을 설득하였다.
“대왕의 땅은 사방이 천 리입니다. 비록 땅은 작다고 하나 듣자옵건대 대왕의 군대는 무사가 20만, 창두(蒼頭)각주3) 가 20만, 분격(奮擊)각주4) 이 20만, 시도(廝徒)각주5) 가 10만, 병거(兵車)가 6백 승(乘), 기마가 5천 필이나 있다고 합니다. 그러나 군신들 중에는 진나라를 섬겨야 한다고 말하는 자가 있다고 하니 이들은 모두 간사한 사람들이고 충신은 아닙니다. 도대체 신하가 되어 어떻게 그 임금에게 남의 나라에 땅을 떼어주고 남의 나라를 섬기라고 할 수 있겠습니까? 대왕께서는 깊이 살피십시오.”
위왕이 말하였다.
“과인이 불초하여 아직까지 현명한 가르침을 듣지 못하였더니 이제 공의 말을 듣고 크게 깨달은 바가 있소. 온 나라를 걸고 그 계책에 따르기로 하겠소.”
다음은 동으로 가서 제나라의 선왕(宣王)을 설득할 차례였다. 이제 네 나라는 모두 설득에 성공하였고, 나머지는 제나라와 초나라 둘뿐이었다. 소진은 자신이 생겼다.
소진은 제나라 선왕을 설득하였다.
“제나라는 사방이 험고(險固)한 요새로 된 나라입니다. 사방이 2천여 리나 되고 무장한 군대는 수십만, 식량은 산처럼 쌓여 있습니다. 제나라 수도 임치(臨淄)는 가구수가 7만이나 되며 매우 부유합니다. 임치의 길에는 수레의 바퀴통이 서로 부딪고 사람의 어깨가 서로 맞닿을 만큼 복잡하고 옷자락이 서로 이어져서 휘장을 이루고 소매를 들면 장막을 이루며 땀을 뿌리면 비를 이룰 정도입니다. 저 한나라와 위나라가 진나라를 두려워하는 것은 진나라와 경계를 접하고 있기 때문이지만 이제 진나라가 제나라를 공격하는 일은 그와는 사정이 다릅니다. 진나라는 한나라·위나라를 그 배후에 두고 있기 때문에 진나라가 비록 깊숙이 침입하고자 해도 이리처럼 뒤를 돌아보며 한나라·위나라가 그 후방을 덮칠 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러니 진나라가 제나라를 침공할 수 없다는 것은 불을 보듯 명백한 일입니다.
그런데 진나라가 제나라를 어떻게도 할 수 없다는 것을 깊이 헤아리지 않고 서쪽으로 진나라를 섬기고자 하니 이것은 여러 신하들의 생각이 잘못된 것입니다.”
제왕이 말하였다.
“과인이 불민하고 또 멀리 바닷가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남의 가르침을 얻어 듣지 못하였더니 공의 말을 듣고 많은 것을 깨달았소이다. 내 그 계책에 찬성하겠소.”
이에 소진은 남쪽으로 가서 초의 위왕을 설득하였다.
“초나라는 천하의 강국이고 대왕은 천하의 현명한 군왕이십니다. 땅은 사방이 6천여 리나 되고 무장한 군대가 백만이며 병거(兵車)가 천 승, 기마가 만 필이고 식량은 능히 10년을 견딜 만하니 이것은 패왕이 될 수 있는 바탕입니다. 그러한 초나라의 강대함과 대왕의 현명함으로 떨치고 일어서면 천하에 능히 당해낼 나라가 없을 것입니다. 초나라가 강해지면 곧 진나라는 약해질 것이고 진나라가 강하게 되면 곧 초나라는 약해질 것이니 그 형세는 양립(兩立)할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대왕을 위한 계책으로는 6국이 종친하여 진나라를 고립시키는 것이 상책입니다. 대왕께서 종친을 하게 되면 제후들이 땅을 베어 초나라를 섬기게 될 것이고 연횡(連衡)하면 초나라는 땅을 베어 진나라를 섬겨야 합니다. 이 두 가지 계책은 그 차이가 매우 큽니다. 이 두 가지 중에서 어느 것을 택하시겠습니까?”
초나라 위왕은 소진의 계책을 옳게 여겼다.
“과인은 삼가 사직을 받들어 그 계책에 따르겠소.”
초왕이 말하였다.
이에 이르러 6국의 합종이 이루어져서 힘을 합하여 진나라에 대항하기로 하였다. 소진이 종약(從約)의 장이 되고 6국의 정승을 겸임하게 되었다.
소진이 조나라 숙후에게 6국 종약의 맹약이 성공했음을 고하니 숙후가 크게 기뻐하여 그를 무안군(武安君)으로 봉하였다.
드디어 6국이 종약에 서명한 문서를 진나라에 보내니 이로부터 15년 동안 진나라의 군대는 감히 함곡관 밖을 엿보지 못하였다.
그 뒤 진나라는 서수(犀首)로 하여금 제나라와 위나라를 속여 함께 조나라를 치게 하였다. 이것은 진나라의 입장으로서는 어떻게 하든 6국의 동맹을 깨뜨리기 위한 정책에서 나온 작전이었다.
제나라·위나라가 조나라를 치니 조왕은 소진을 불러 책망하였다.
“무안군, 이게 어떻게 된 일이오. 동맹의 나라끼리 합세하여 우리나라를 치니 6국의 종약은 어떻게 되는 거요?”
소진은 두려웠다. 그는 스스로 연나라에 사자로 가서 연왕을 설득하여 기어코 연나라와 함께 제나라를 쳐서 제나라의 배신에 보복하겠다고 조왕에게 말한 다음 조나라를 떠나니 15년간 지켜졌던 종약은 깨어지기 시작하였다.
소진이 연나라에 오니 이 해에 연나라의 문후가 죽고 태자가 임금이 되었다. 이 사람이 연나라의 역왕(易王)이다. 역왕은 일찍이 진나라 혜왕의 딸과 결혼한 사이였다. 역왕이 즉위하자 제나라 선왕이 연나라의 국상을 틈타 연나라를 공격하여 10개 성을 빼앗아 갔다. 역왕은 몹시 분개하여 소진을 책망하였다.
“지금 제나라가 먼저 조나라를 치고 그 다음으로 연나라를 치고 있으니 선생 때문에 연나라는 천하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소. 선생께서는 연나라를 위하여 제나라에 빼앗긴 땅을 도로 찾아주시오.”
소진은 부끄러운 표정을 지으며 대답하였다.
“왕을 위하여 빼앗긴 성을 찾아오겠습니다.”
소진이 제왕을 보고 두 번 절하고 엎드려 축하하고 또 우러러 불행을 조문하였다.
제왕이 괴이히 생각하며 “어째서 축하한다는 말과 불행을 조문한다는 말이 잇달아 나오는 거요?”라고 물었다.
“신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지금 연나라가 비록 약소하지만 곧 진나라 혜왕의 새 사위입니다. 대왕께선 그들의 10개 성을 빼앗았으나 강한 진나라와는 길이 원수를 맺은 것입니다. 지금 만약 진나라가 약한 연나라를 선봉으로 삼고 강한 진나라의 군대가 그 뒤를 엄호하여 온다면 천하의 강적을 스스로 불러들이는 일입니다.”
제왕이 듣고 근심하는 빛을 보이며 말하였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좋겠소.”
“대왕께서 진정 신의 말씀을 믿으신다면 즉시 10개의 성을 돌려주십시오. 그러면 연나라에서는 10성을 돌려받은 것을 기뻐할 것이며 진왕도 자기 때문에 연나라의 10성을 돌려주었다는 것을 알고 또한 기뻐할 것입니다. 이렇게 되면 원수를 풀고 금석과 같은 굳은 친교를 맺는 것과 다름이 없습니다. 그리하여 연나라와 진나라가 함께 제나라를 한편으로 한다면 대왕의 호령은 천하에 떨치게 될 것이며 10성으로 천하를 취하는 것이니 이것이야말로 패왕의 업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제왕은 소진의 말에 따랐다.
“좋소이다. 연나라의 10성을 돌려주겠소.”
이로써 연나라는 10성을 돌려받게 되었다.
역왕의 어머니는 문후의 부인으로 소진과 정을 통하였다. 역왕은 이 일을 알면서도 소진을 극진히 대우하니 소진은 언제 자신에게 화가 미칠지 두려웠다. 그는 연나라를 빠져나가야겠다고 생각하고 기회를 보아 연왕을 설득하였다.
“신이 연나라에 있으면 연나라를 강하게 만들 수 없습니다. 그러나 제나라에 가 있으면 연나라를 반드시 강하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
연왕은 소진의 속셈을 모를 리 없었으나 그저 모르는 척 “마음대로 하십시오.” 하였다.
소진은 거짓으로 연나라에서 죄를 지은 것처럼 꾸미고 제나라에 달려가니 제의 선왕은 그에게 객경(客卿)의 벼슬을 주었다.
얼마 후 제의 선왕이 죽고 민왕(湣王)이 즉위하였다. 소진은 민왕을 설득하여 장례를 후히 지내고 궁실을 높이 짓고 원유(苑囿)를 크게 넓히니 그것은 제나라를 피폐하게 만들어 연나라를 위하려는 속셈에서 나온 일이었다. 이윽고 연나라에서는 역왕이 죽고 쾌(噲)가 즉위하였다.
그 뒤 제나라 대부 가운데는 소진과 임금의 총애를 다투는 자가 많았다. 그중의 한 사람이 소진을 암살하려고 자객을 시켜 소진을 칼로 찌르게 하였으나 죽이지는 못하고 치명상을 입히고 달아났다. 제왕이 소진을 찌른 자를 전국에 수배하여 수색하였으나 잡지 못하였다. 소진은 임종(臨終)에 즈음하여 제왕에게 다음과 같이 부탁하였다.
“신이 죽거든(신이 큰 죄를 지은 것처럼) 시체를 차열(車裂)각주6) 하여 저잣거리에 돌려보이며 소진이 연나라를 위하여 제나라에서 반란을 일으켰다고 말하십시오. 그러면 신을 죽인 자를 반드시 찾아낼 수 있을 것입니다.”
제왕이 그 말과 같이 시행하였더니 과연 소진을 죽였다는 자가 스스로 나타났다. 제왕은 그를 사형에 처하였다.
연횡론의 추진자 장의는 위나라 사람으로 소진과 함께 귀곡 선생에게 사사하면서 학술을 배웠는데 소진보다 재능이 더 뛰어났다.
장의는 공부를 마치고 제후를 유세하였는데 일찍이 초나라의 정승과 함께 술을 마신 적이 있었다. 이때 초나라의 정승이 매우 아끼던 구슬(璧)을 잃어버리자 정승의 문하 사람들이 장의가 훔쳤을 것으로 생각하여 그에게 말하였다.
“장의는 가난하고 행실도 좋지 않으니 이 사람이 훔쳤을 것이 분명합니다.”
그리고는 장의를 잡아다가 수백 대의 매를 쳤으나 장의는 끝끝내 승복하지 않았다. 어쩔 수 없이 장의를 놓아주었는데, 이 모양을 본 그의 아내가 “얼마나 고통이 심하십니까? 이럴 줄 알았더라면 차라리 글을 읽지 말았을 것을!” 하고 탄식하였다. 장의는 녹록한 인물이 아니었다.
장의가 혀를 내밀면서 말하였다.
“내 혀를 보라. 아직 있는지 없는지.”
아내는 기가 막혀서 “혀가 있습니다.” 하였다.
장의는 “그러면 됐어!” 하고는 좌절하지 않았다.
그때 소진은 이미 조왕을 설득하여 종친(從親)할 것을 약속받은 때였다. 그러나 진나라가 만약 조나라를 치게 되면 애써 추진하는 그의 종약 계획이 난관에 부딪힐 것이 뻔했다. 어떻게든 진나라로 하여금 조나라를 치지 못하도록 사전 조치를 해야만 했다. 이 일을 감당할 만한 사람은 오직 장의라고 생각했다. 그는 몰래 사람을 보내어 장의를 달래었다.
“당신은 소진과 동문으로 친구 사이입니다. 지금 소진은 이미 조나라에서 등용되어 요직에 있습니다. 소진을 만나보고 당신의 소원을 이루도록 하십시오.”
그렇잖아도 장의는 소진을 만나보았으면 하고 생각하고 있던 참이었다.
장의는 이에 조나라로 가서 소진에게 만나보기를 청하였다. 소진은 수하 사람들에게 사전에 일러두었다. 장의가 오거든 그를 들여보내지도 말고 가지도 못하게 하라. 이렇게 며칠을 지낸 뒤에 겨우 그를 만나보게 하였다. 장의를 마루 아래에 앉히고 하인이나 첩에게 주는 음식을 주게 하였다. 그리고는 장의를 꾸짖었다.
“그대는 그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도 스스로 이러한 모욕을 자초하였으니 내 어찌 그대를 왕에게 추천할 수 있겠는가. 그대는 거두어 쓸 만한 사람이 못되네.”
그리곤 그를 사절하여 보냈다.
장의는 한탄하였다. 처음 올 때는 그를 친구로 알고 찾아왔는데 이런 모욕을 당하다니. 화가 난 그는 ‘제후들 가운데 섬길 만한 사람은 없지만 오직 진나라만이 조나라를 괴롭힐 수 있을 것이다.’라고 생각하고 드디어 진나라로 떠났다.
장의가 진나라로 향했다는 사실을 확인한 소진은 조용히 그의 부하를 불러 말하였다.
“장의는 재능이 뛰어난 사람이다. 진왕을 설득하여 영향력을 행사할 사람은 그 사람뿐인데 가난하여 진나라에 나아갈 자금이 없을 것이다. 내가 일찍이 그가 찾아왔을 때 모욕을 준 것은 그 사람이 작은 이익을 탐내어 큰 뜻을 이루지 못할까 염려하여 치욕을 주고 그의 뜻을 격려하기 위함이었다. 자네는 나를 위하여 그를 돕되 내가 시켰다는 일은 비밀로 해두게.”
그리고는 거마와 자금을 두둑이 주어 장의를 수행하여 숙식을 같이하면서 모든 경비를 제공하고 장의가 필요하다고 하는 것은 무엇이든 넉넉히 공급하도록 하였다.
얼마 후 장의는 진나라 혜문왕을 만나게 되었으며 혜문왕은 그를 객경(客卿)으로 삼아 함께 국사를 의논하게 되었다. 이때에 이르러 소진의 부하가 하직하고 돌아가려고 하자 “그대의 도움으로 나는 출세하였다. 내 그대의 은공에 보답하려고 하는데 무슨 일로 가려고 하는가?” 하였다.
소진의 부하는 비로소 비밀을 털어놓았다.
“나는 당신을 알지 못합니다. 내가 이렇게 하게 된 것은 모두 소진이 시켜서 한 일입니다. 소진은 진나라가 조나라를 정벌하여 종약이 깨어질 것을 근심하였습니다. 그래서 당신의 힘을 빌려 진나라로 하여금 조나라를 공격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당신을 감격·분노하게 만들고 비밀리에 자금을 공급하게 하였습니다. 당신께서 이미 등용되었으니 나는 이제 돌아가야 합니다.”
장의는 비로소 소진의 깊은 뜻을 알았다.
“아아, 내가 소진의 사려 깊은 술책 속에 있으면서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구나!”
장의는 소진의 깊은 우정에 감탄하며 일단 조나라에 대한 공격을 제지시켰다. 장의는 진나라의 정승이 되었으며 그 후 4년 만에 혜문왕을 세웠다.
그는 먼저 위나라로 하여금 진나라를 섬기게 하여 제후들에게 그것을 본받게 하려고 하였다. 장의는 위나라 양왕을 설득하였다.
“위나라는 땅이 사방 천 리가 못 되며 사방이 평탄하여 이름난 높은 산이나 큰 하천의 장애가 없고 남으로는 초나라, 서로는 한나라, 북으로는 조나라, 동으로는 제나라와 접하고 있습니다. 사방을 수비하는 군사와 변방 요새의 관문을 지키는 자의 수는 십만에 지나지 않는데다가 수도인 양(梁)의 지세는 본래부터 싸움 마당입니다. 이제 종친하는 자가 천하를 하나로 단결하여 형제와 같이 되기를 약속하였으나 친형제로서 같은 부모의 혈육을 타고난 사람도 재물을 서로 다투는 일이 있습니다. 그런데 간사하고 시세에 따라 엎치락뒤치락하는 소진의 꾀를 믿으려 하니 성공할 수 없다는 것은 너무나 명백합니다.
대왕을 위한 계책으로는 진나라를 섬기는 것보다 더 나은 방법은 없습니다. 진나라를 섬기게 되면 초나라·한나라가 감히 움직이지 못할 것이니 초·한의 근심이 없다면 대왕께서는 베개를 높이하고 누워 있어도 위나라는 아무 근심이 없을 것입니다.”
위의 양왕은 드디어 종약을 배반하고 장의를 통하여 진나라에 평화를 청하였다. 장의는 돌아가 다시 진나라의 정승이 되었다.
진나라가 제나라를 치려고 하자 제나라와 초나라가 종친하였다. 이에 장의는 초왕을 설득하기로 하였다. 당시의 정세로 보아 그가 추진하는 연횡론의 핵심은 초나라를 굴복시키는 데 있었다.
초나라 회왕(懷王)은 장의가 온다는 말을 듣고 국빈으로 대우하여 자신이 직접 장의를 인도하여 숙소에 들게 한 후 말하였다.
“이곳은 중원과 멀리 떨어진 누추한 나라요. 선생께서는 무엇을 가르쳐 주시겠소?”
장의는 예를 다하여 인사를 마친 후 초왕을 설득하였다.
“대왕께서 진정 신의 말을 옳게 들으시어 관(關)을 닫고 제나라와의 종약을 깨뜨린다면 신은 상어(商於)의 땅 6백 리를 초나라에 바치고 진나라의 여자로서 대왕의 시첩(侍妾)을 삼게 할 것이며 서로 혼인하여 길이 형제의 나라가 되게 하겠습니다.”
초왕은 눈앞의 이익만 생각하고 크게 기뻐하며 그렇게 하겠다고 허락하였다. 여러 신하들도 다 축하하는데 홀로 진진(陳軫)이 탄식하며 슬퍼하였다.
초왕이 매우 불쾌하게 생각하여 “전쟁 없이 6백 리의 땅을 얻게 되었는데 슬퍼하는 것은 무슨 까닭인가?” 하고 물었다.
“신의 생각으로는 땅을 얻을 수 없을 뿐만이 아니옵고 제나라와 진나라는 힘을 합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화는 초나라에 미칠 것입니다.”
“어째서 그런가?”
“저 진나라가 초나라를 만만치 않게 여기는 이유는 제나라와 친교를 맺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관문을 닫고 제나라와의 종약을 어긴다면 초나라는 고립됩니다. 이렇게 되면 진나라가 어찌 고립된 나라에 6백 리의 땅을 주겠습니까? 대왕을 위한 최선의 계책은 몰래 제나라와 합작하면서 겉으로 친교를 끊는 체하고 사람을 시켜 장의에게 수행(隨行)시키는 것이 좋겠습니다.”
초왕은 진진의 말을 듣지 않았다. 오히려 장의에게 초나라 정승의 인수를 주고 후한 뇌물까지 주었다. 그리고 관문을 닫아 제나라와의 맹약을 끊고 한 사람의 장군을 시켜서 장의를 따라가 6백 리의 땅을 받아오도록 하였다.
장의는 진나라에 도착하자 술에 취한 척 수레 위에서 잡은 줄을 놓친 채 거짓으로 수레에서 떨어져 병을 일컫고 3개월이나 조정에 나타나지 않았다. 이 때문에 토지의 인도는 지연되고 있었다. 이쯤 되면 초왕은 장의의 책략을 한번 의심해 볼 수도 있었으나 전혀 의심하지 않았다.
“장의가 제나라에 대한 절교가 그다지 신통치 못하다고 여겨 그러고 있는 것인가?” 하고 드디어 제왕을 모욕하는 편지를 보냈다. 《사기》 〈초세가(楚世家)〉에는 용사를 보내어 제왕을 크게 꾸짖었다고 되어 있으나, 다른 역사서에는 편지를 보낸 것으로 되어 있다. 아무리 용사라 해도 외국의 궁궐에까지 가서 왕을 모욕준다는 것은 사실상 어려운 일이니 편지를 보냈음이 확실한 것 같다.
제왕은 크게 노하여 몸을 굽혀 진나라와 친교를 맺었다. 진나라와 제나라의 친교가 맺어지자 비로소 장의가 모습을 나타냈다.
장의는 초나라의 사자에게 말하였다.
“신이 봉읍(俸邑)으로 받은 고을 6리가 있으니 그것을 대왕에게 바치고자 합니다.”
초나라의 사자는 기가 막혔다.
“신이 초왕으로부터 명령을 받은 것은 상어의 땅 6백 리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6리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오?”
사자는 할 수 없이 빈 손으로 초나라에 돌아가 이를 초왕에게 보고하니 초왕은 크게 노하여 군대를 동원하여 진나라를 치고자 하였다. 그러자 진진이 말하였다.
“진나라를 치는 것은 땅을 베어 진나라에 주는 것만 못합니다. 진나라에 뇌물을 주고 그들과 합세하여 제나라를 친다면 우리가 땅을 진나라에 내주고 제나라에서 보상을 받는 것이니 초나라는 오래 존속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번에도 초왕은 진진의 말을 듣지 않았다. 마침내 군대를 동원하여 장군 굴개(屈匃)로 하여금 진나라를 공격토록 하였다. 승패는 애당초부터 결정되어 있었다. 초왕이 크게 노하여 이성을 잃고 감정적으로 군대를 동원할 것을 계산해 놓고 있던 장의는 미리 초나라의 공격에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었다. 만반의 태세를 갖춘 진나라 군대와 갑자기 동원된 초나라 군대와는 그 질에서나 작전에서 많은 차이가 있었다.
초군은 진·제의 군대와 단양(丹陽)에서 싸워 크게 패하였다. 초나라 군사 8만 명이 진나라 군사의 칼 아래 쓰러지고 장군 굴개는 포로가 되었다.
진나라 군사는 승세를 몰아 초나라 영토인 한중(漢中)을 점령하니 초나라 회왕은 더욱 흥분하여 군대에 총동원령을 내렸다. 초나라의 군대는 진나라 영토 깊숙이 남전(藍田)까지 침공하여 대대적인 전투를 벌였으나 냉정하게 대응하는 진나라 군대에게 대패하였다.
이때 초나라의 수도에는 급보가 날아들었다. 초나라 군대가 진나라 영토에서 고전하고 있다는 사실을 탐지한 한나라·위나라가 연합하여 초나라 영토인 등(鄧)까지 침공하였다는 것이었다.
초의 회왕은 크게 놀랐다. 급선무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남하하는 한·위의 군사를 막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렇게 하자면 부득이 진나라와 싸우고 있는 주력부대를 철수시켜야만 했다. 철수할 경우 진나라 군대가 가만히 놓아보내지 않을 것이 뻔했다. 회왕은 하는 수 없이 초나라의 두 성을 베어주고 진나라와 강화를 맺고 군대를 철수시켰다.
다음해 진나라는 초나라에 사자를 보내어 이미 빼앗은 한중의 땅 일부를 돌려주고 계속 화친을 하자고 요청하였다. 진나라의 이 같은 화친 교섭은 6국 동맹을 깨뜨리기 위해서는 조그마한 희생을 치르더라도 초나라와의 화친이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회왕의 대답은 엉뚱하게도 “나는 한중의 땅을 원하지 않습니다. 원하는 건 장의뿐입니다.”라고 하였다.
매우 감정적이고 냉정을 잃은 회왕다운 말이었다. 회왕의 생각은 오직 장의를 죽여 없애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지금까지 초나라가 곤욕을 치른 것은 모두 장의 때문이니 그를 죽이지 않으면 직성이 풀리지 않을 정도로 회왕은 흥분해 있었다.
진왕은 장의를 보내고 싶었으나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였다. 장의는 이 같은 진왕의 뜻을 충분히 헤아리고 있었다. 그는 혜문왕에게 자진하여 초나라에 가겠다고 청하니 혜문왕이 만류하였다.
“저 회왕이 그대를 원하는 것은 그대에게 품은 원한을 속시원히 풀어보겠다는 뜻이니 가지 않는 것이 좋겠소.”
장의가 말하였다.
“진나라는 강하고 초나라는 약합니다. 신은 일찍이 초나라의 궁중에 친진(親秦) 세력을 길러 놓았습니다. 그들의 말이라면 초왕은 다 듣습니다. 또 신이 진나라의 사자로서 가는데 초나라가 어찌 감히 죽일 수 있겠습니까? 설사 신이 죽임을 당한다 해도 초나라와의 화친이 이루어진다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장의는 드디어 초나라에 사신으로 갔다. 초의 회왕은 장의가 오자 곧바로 옥에 가두고 죽이려고 하였다.
초나라 친진 세력의 우두머리 격인 상관대부 근상(靳尙)은 장의의 구명 운동에 앞장섰다. 그는 회왕의 총희 정수(鄭袖)에게 말하였다.
“부인께서 앞으로 초왕의 천대를 받게 되는 일을 알고 계십니까?”
정수는 뜻밖의 말에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그게 무슨 말씀이냐고 다그쳐 물었다.
“진나라 임금은 장의를 몹시 사랑하니 그를 구하기 위하여 장차 상용(上庸)의 땅 여섯 고을을 뇌물로 초나라에 주고 절세의 미녀를 초왕에게 바치며 궁중의 가무(歌舞) 잘하는 여인으로 그 미녀들의 시중을 들게 하려 하고 있습니다. 초왕은 땅을 소중히 알며 또 진나라를 존대하고 있으니 진나라의 여인을 귀여워할 것이고, 반면에 부인께서는 천대를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니 초왕에게 말하여 장의를 놓아주도록 하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
성격이 단순한 정수는 근상의 말을 그대로 믿고 밤낮으로 울며 회왕에게 호소하였다.
“남의 신하가 된 사람은 제각기 자기의 임금을 위하여 힘쓰는 것입니다. 진나라에서 장의를 보내온 것은 왕을 존중하기 때문이온데 장의를 죽이면 진나라는 반드시 노하여 초나라를 칠 것입니다. 첩이 모자가 함께 강남(江南)으로 옮겨가서 진나라에 어육(魚肉)이 되는 일이 없게 하여 주시기를 원합니다.”
회왕은 애첩 정수와 떨어져서는 하루도 살 수 없다고 생각할 정도로 그녀를 사랑하고 있었으므로 그녀의 말을 들어 장의를 석방하고 후대하였다.
장의가 옥에서 나와 떠나기 전에 소진이 죽었다는 소문을 들었다. 장의는 초왕을 설득하였다.
“지금 천하의 강국은 진나라 아니면 초나라입니다. 두 나라가 서로 다툰다면 그 형세는 양립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온 천하의 제후들이 맹약을 맺고 종친하여 서로 굳게 지키기를 주장한 사람은 소진입니다. 그는 연나라에 거짓 죄를 지었다고 꾸며 제나라에 들어갔습니다. 제왕이 그를 받아들인 지 2년 만에 음모가 발각되어 저잣거리에서 차열(車裂)의 형에 처해졌습니다. 한낱 사기꾼에 지나지 않는 소진으로서 천하를 경영하여 제후를 하나로 단결시킬 수 없다는 것은 너무도 명백한 일입니다.
지금 진나라와 초나라는 서로 경계를 맞대고 있습니다. 이 같은 지형의 상태로도 서로 화친해야 할 사이입니다. 대왕께서 진정 신의 진언을 들어주신다면 신은 진나라의 태자로 하여금 초나라에 들어와 인질이 되게 하겠습니다. 초나라의 태자도 진나라에 들어가 인질이 되게 하십시오. 이렇게 하면 길이 형제의 나라가 되어 종신토록 공격하는 일이 없을 것입니다. 신이 대왕을 위한 계책으로는 이보다 더 나은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에 초왕이 장의의 말을 듣고자 하니 굴원(屈原)이 반대하였다.
“전에 대왕께서는 장의에게 속았습니다. 장의가 왔기에 신은 대왕께서 장의를 삶아 죽일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차마 죽이지 않더라도 그의 간사한 말을 듣는 것은 옳지 않습니다.”
회왕은 굴원의 말을 듣지 않고 장의를 용서하는 한편 진나라와 친교하기로 하였다. 장의는 초나라를 떠나 그 길로 한나라에 가서 한왕(유방)을 설득하였다.
“진나라의 군사와 산동(山東)의 군사는 마치 저 용사 맹분(孟賁)각주7) 과 겁부(怯夫)와의 대결 같고, 진나라의 군사가 무거운 힘으로 산동의 군사를 압박하는 것은 오확(烏獲) 같은 대역사(大力士)가 어린아이와 대결하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 대왕을 위한 계책으로는 진나라를 위하여 일하는 것보다 나은 것은 없습니다. 진나라가 하고자 하는 일은 초나라를 약화시키는 일이니 지금 대왕께서 서쪽을 향하여 진나라를 섬기고 초나라를 치면 진왕은 반드시 기뻐할 것입니다.”
한왕(유방)은 장의의 말을 받아들이기로 하였다. 장의가 진나라에 돌아가 보고하니 진의 혜문왕은 크게 기뻐하여 장의를 무신군(武信君)에 봉하고 다시 동쪽으로 제나라에 가서 민왕(湣王)을 설득하게 하였다. 장의는 민왕에게 말하였다.
“종친을 찬성하는 사람이 대왕에게 말하기를 ‘제나라는 서쪽에 강한 조나라가 있고 남에는 한나라·위나라가 있습니다. 제나라는 바다를 등지고 있고 땅이 넓고 백성이 많으며 군대는 강하고 용감하다.’고 합니다.
그러나 지금 진나라와 초나라는 서로 혼인하여 형제의 나라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한나라·위나라·조나라가 모두 땅을 베어 진나라를 섬깁니다. 만약 대왕께서 진나라를 섬기지 않는다면 진나라는 한나라·위나라·조나라의 군대를 동원하여 청하(淸河)를 건너서 박관(博關)을 향하여 진격할 것입니다. 그리되면 임치와 즉묵(卽墨)은 대왕의 소유가 아닐 것입니다. 그때에 이르러 아무리 진나라를 섬기고자 한들 이미 때는 늦었을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이런 점을 깊이 헤아리시기 바랍니다.”
제왕은 마침내 장의의 말에 따르기로 결정하였다.
장의는 서쪽으로 가서 조왕을 설득하였다.
“대왕께서는 천하의 제후를 모두 거느리시고 진나라를 배척하였습니다. 진나라 군대가 감히 함곡관을 나오지 못한 것이 이미 15년입니다. 대왕의 위업이 산동에 떨쳤으나 지금 초나라는 진나라와 형제의 나라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한나라와 위나라는 동번(東藩)이라고 일컬으면서 진나라를 섬기고 있으며 제나라는 어염(魚鹽)의 산지를 바쳤습니다. 이것은 마치 조나라의 오른팔을 끊어버린 것과 같습니다. 그러니 오른팔을 끊기고 남과 싸우며, 자기의 무리를 잃고 고립해 있으면서 위태하지 않기를 바란들 어찌 그렇게 될 수가 있겠습니까? 신이 가만히 대왕을 위하여 생각하건대 진왕과 만나서 서로 대면하여 우호를 맺고 군대를 무마하여 공격하지 말도록 청하는 것보다 더 좋은 계책은 없습니다.”
조왕이 장의의 진언을 허락하자 장의는 북으로 연나라에 가 연의 소왕(昭王)을 설득하였다.
“대왕께서 진나라를 섬기지 않으면 진나라는 군대를 운중(雲中)·구원(九原)에 보내고 조나라 군대를 동원하여 연나라를 칠 것입니다. 그렇게 되면 역수(易水)·장성(長城)은 대왕의 소유가 아닐 것입니다. 이제 대왕께서 진나라를 섬기면 진왕은 반드시 기뻐할 것이며 연나라는 제나라와 조나라에 대한 근심이 없어질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신의 진언을 깊이 생각하시기 바랍니다.”
연왕이 말하였다.
“과인은 궁벽한 곳에 살고 있어 바른 계책을 얻어 듣지 못하였소. 이제 상객(上客)께서 다행히 가르쳐 주셨으니 서쪽을 향하여 진나라를 섬길 것이며 항산(恒山) 끝의 다섯 성을 바치겠소이다.”
장의는 이때에 이르러 비로소 연횡론의 긴 여정을 마치고 이를 보고하기 위해 진나라로 향했다. 그가 함양(咸陽)에 도착하기 전에 혜왕이 죽고 무왕(武王)이 즉위하였다.
무왕은 태자로 있을 때부터 장의를 좋아하지 않았다. 그가 임금이 되자 장의의 정적들은 일제히 장의를 헐뜯기 시작하였다.
제후들은 장의와 무왕 사이가 좋지 않다는 소문을 듣고 모두 연횡을 배반하고 다시 합종하게 되었다.
일세의 지략가이며 변설(辯舌)의 천재 장의도 이때에 이르러서는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어떻게든 이 위기를 슬기롭게 넘겨야겠다고 생각했다. 진나라에 오래 있으면 장차 신변이 위태로울 것은 뻔했다. 드디어 장의는 무왕에게 말하였다.
“신을 위나라에 보내 주십시오.”
무왕이 그 이유를 물었다.
“지금 들으니 제왕이 신을 매우 미워하고 있다 합니다. 신이 가 있는 곳이면 제왕이 반드시 군사를 동원하여 침공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신이 만약 위나라에 가면 제나라는 반드시 군대를 동원하여 위나라를 칠 것입니다. 제나라와 위나라는 성 아래에서 서로 대치하여 싸우느라 그곳을 떠나지 못할 것이니 대왕께서는 그 틈을 타서 한나라를 쳐서 삼천(三川)에 들어가시고 군대를 함곡관 밖에 내보내시어 공격하지 않은 채 주나라에 육박하면 주나라에서는 반드시 제기(祭器)를 내놓을 것입니다. 천자를 끼고 천하의 지도와 장부와 호적을 점검하여 제후들을 지휘하는 것이야말로 왕자의 일입니다.”
진왕이 그럴 듯하게 생각하고 병거(兵車) 30승(乘)을 갖추어 장의를 위나라에 보냈다. 장의가 위나라에 들어오자 제나라에서는 과연 군대를 동원하여 위나라를 공격했다. 위나라 애왕(哀王)이 어쩔줄 몰라 근심하니 장의가 말하였다.
“대왕께서는 근심하지 마십시오. 제나라 군대는 신이 책임지고 물러나게 하겠습니다.”
장의는 이렇게 말하고 그의 부하 풍희(馮喜)를 일단 초나라에 보냈다. 그리고는 초왕의 사자라는 신분을 빌어가지고 제나라에 가서 제왕에게 앞서 장의가 무왕에게 말했던 내용을 모두 털어놓은 다음 다음과 같이 설득케 하였다.
“이런 속셈이 있었기 때문에 장의에게 병거 30승을 갖추어 그를 위나라에 들여보낸 것입니다. 장의가 위나라에 들어오자 대왕께서는 위나라를 공격하였으니 이것은 대왕께서 나라를 피폐하게 만들고 동맹국을 쳐서 진나라를 유리하게 만들며 진왕으로 하여금 장의를 신임하도록 만드는 결과밖에 없습니다.”
제왕은 풍희의 말을 듣고 드디어 위나라 공격을 중지하였다.
장의는 위나라에서 정승이 된 지 1년 만에 죽었다. 세상을 떠들썩하게 했던 오기(吳起)·상앙(商鞅)·소진(蘇秦)이 비참한 최후를 마친 데 비하여 목숨을 보전하여 천명대로 살다 죽었다.
소진과 장의가 그들의 뛰어난 권모술수를 바탕으로 합종(合從)과 연횡(連衡)의 이론을 내세워 여러 제후들을 설득하고 천하의 부귀를 누리게 되자 이를 부러워하여 다투어 소진과 장의를 본받는 자가 많았다. 위나라 사람 공손연(公孫衍)은 그의 호를 서수(犀首)라 하여 역시 변설로 이름을 날렸고, 소진의 아우 소대(蘇代)·소여(蘇厲)와 주최(周最)·누완(樓緩) 등 천하를 누비고 다니며 변설과 사술(詐術)로써 경쟁을 일삼는 자가 수없이 많았으나 그 가운데 가장 뛰어난 사람은 소진·장의·공손연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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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전국시대 합종과 연횡 – 이야기 중국사1, 김희영,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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