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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1 춘추전국시대의 사상과 인문과학
묵자
墨子묵가(墨家)의 창시자는 묵자(기원전 468~376)이다. 묵자의 이름은 적(翟)으로 공자보다 좀 늦게 태어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유가와 묵가는 당시 여러 학파 가운데 가장 대립적인 관계에 있었다.
당시 유명한 장인(匠人)으로 이름을 떨치던 공수반(公輸般)각주1) 노반(魯班)은 대송 작전(對宋作戰)의 참모장격으로 초나라가 약소국인 송나라를 공격할 때 쓸 성벽 공격용 운제(雲梯)각주2) 를 만들고 있었다.
묵자는 비공(非攻)각주3) 을 주장하여 적극적으로 전쟁을 반대하고 있었다. 노반의 소식을 듣자 불원천리 초나라로 달려갔다. 초나라에 도착한 그는 노반을 만나 송나라를 공격하지 말라고 권고하였으나 노반은 묵자의 말을 듣지 않았다. 이에 묵자는 초왕 앞에서 노반과 병법 시합을 하기로 하였다.
먼저 묵자가 허리띠를 풀러 성 모양으로 둥글게 만들고 이것을 성벽에 비유하기로 하자 노반은 나무 조각을 운제와 비슷한 기구로 비유하여 성벽을 공격하였다. 운제를 이리저리 옮기면서 9차례에 걸쳐 공격하여 운제를 모두 소비하였으나 성을 함락하지 못했다.
이번에는 공수의 입장을 바꾸어 노반이 성을 지키고 묵자가 공격하기로 하였다. 묵자는 3번에 걸친 공격 끝에 성을 함락하는 데 성공했다.
노반은 매우 불쾌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나는 당신을 타도할 방법이 있긴 하지만 당신에게 구태여 말하고 싶지 않소.”
묵자도 지지 않고 “나는 당신이 어떤 방법으로 나를 타도하려고 하는지 훤히 알고 있지만 당신에겐 말하기 싫소.” 하고 응수하였다.
초왕은 도대체 이들이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종잡을 수가 없어 그들에게 무슨 말을 하고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묵자가 “공수반은 나를 죽이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나를 죽여 없애면 송나라를 원조하는 사람이 없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그것은 커다란 오산입니다. 나의 제자 금활리(禽滑釐) 등 3백 명이 내가 설계한 성벽 방어용 기구를 이미 송나라 성벽에 붙여 놓고 초나라가 공격해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설사 나를 죽여 없앤다 해도 송나라를 함락시킬 수는 없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하였다. 이 말을 듣고 초왕은 송나라 공격 계획을 취소하고 말았다.
이렇듯 묵자는 송나라를 위하여 초나라의 공격을 미연에 방지하였다. 그러나 송나라로 돌아올 때 마침 비가 와 비를 피하려고 성문을 들어섰으나 성문을 지키던 병사가 그를 쫓아버린 일이 있었다. 그 일로 비를 흠뻑 맞고 감기에 걸려 10여 일 동안이나 코가 막혀 고생하였다는 것이다.
송나라 사람들은 묵자가 자기들을 위하여 큰 공을 세웠다는 사실을 몰랐으나 묵자나 그의 신도들은 자신들의 공이 남에게 알려지든 안 알려지든 여기에 구애받지 않고 전쟁을 미연에 방지했다는 사실에 자못 만족해 있었다고 한다.
이 같은 마음가짐은 종교적 정열이 아니고서는 도저히 가질 수 없는 것이다. 당시의 허다한 사상적 집단 가운데서도 가장 종교적 색채가 짙었던 것이 묵자의 교단이었다는 것을 이 이야기에서 알 수 있다.
묵자는 비공을 주장했을 뿐 아니라 또한 겸애(兼愛, 모든 사람을 차별 없이 사랑하는 일)를 주장하였다. 그의 정치적 사상은 현명한 군주가 나타나 사회를 다스리는 것이었다. 현명한 군주란 옛날의 우(禹)임금처럼 백성들과 함께 부지런히 일하고 검소한 생활을 해야 한다고 하였다. 또 사회 전체의 인류들은 서로 협조하고 사랑하여 힘이 있는 자들은 앞을 다투어 힘이 없는 사람을 돕고 재력이 있는 사람은 될 수 있는 대로 재산을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학덕이 있는 사람은 사람들을 교화시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묵자는 모든 사람이 격의 없이 사랑을 나누고 서로 이익을 균등하게 나누면 사회의 재난과 혼란을 없앨 수 있고 천하는 태평해질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 같은 주장은 근로 대중들의 입장을 반영한 것이기는 하나 이것은 소생산자들의 소박한 꿈에 지나지 않고 역사의 발전 법칙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묵자는 당시의 저명한 사상가였을 뿐만 아니라 박식한 학자였으며 뛰어난 기술자이기도 했다. 노반과의 병법 시합의 결과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당시의 저명한 공장(工匠)을 훨씬 능가할 정도였다. 전설에 의하면 묵자가 만든 목제(木製) 새는 날 수 있었다고도 한다. 그가 저술한 《묵자》를 보아도 그가 물리학·기하학 등의 분야에 탁월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저술에서는 심지어 지구는 둥글고 움직이고 있다는 가설까지 내세우고 있어 그의 과학에 대한 탁월한 식견을 엿볼 수 있다.
묵가들은 그들의 이상을 실현시키기 위하여 그들의 신도들을 조직화하였다. 그 조직의 지도자는 ‘신자(臣子)’라 불렀고 신자의 지위는 ‘성인’으로 받들어 모실 정도로 권위가 있었다. 묵가의 신도들은 모두 신자의 명령과 묵가의 규약에 따르도록 되어 있었는데 그 규율이 지나치게 엄격하였다. 여기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한다.
진나라에 복돈(腹敦)이라는 신자가 살고 있었는데 그의 아들이 살인을 했다. 진나라 왕은 신자에게 말했다.
“당신은 이미 늙었고 뒤를 이을 아들도 한 사람뿐이니 당신 아들의 죄를 특별히 용서하리다.”
이 말은 들은 신자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
“묵가의 규약에 사람을 죽인 자는 사형에 처하고 부상을 입힌 자는 형벌을 받아야 한다고 정해져 있습니다. 이러한 규약은 사람들이 서로 살상(殺傷)하는 것을 금하기 위한 것입니다. 대왕의 호의는 더없이 감사하오나 신자로서의 신분을 가지고 있는 저로서는 묵가의 규약에 따르지 않을 수 없는 것으로 생각합니다.”
진왕은 여러 차례 그의 생각을 바꾸도록 권하였으나 신자는 끝내 이를 거절하고 자신의 아들을 사형에 처하도록 하여 그 죄를 속죄토록 하였다.
묵가의 규율은 이와 같이 엄격하여 ‘물과 불 속에도 거침없이 뛰어들고 죽어도 끌어내지 않는다’는 정신 자세를 가지고 있었으나 그들의 이러한 정신을 실현시키려는 노력은 현실과 부합되지 않는 일종의 공상에 불과하였다. 때문에 마침내는 환멸로 끝나게 되었고 진한(秦漢) 이후 묵가의 조직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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