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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1 춘추전국시대
전국 시대의 서막
방랑의 망명공자 중이가 진나라에 복귀하여 진나라를 초강대국으로 만들고 진의 문공으로서 천하의 패자가 되어 그 위엄을 떨치던 진나라도 기원전 453년에 이르러서는 위·조·한의 세 나라로 분열되었다. 원래 진의 육경(六卿)은 범씨(范氏)·중행씨(中行氏)·지씨(智氏) 및 한·위·조의 여섯 사람이었다. 범씨와 중행씨는 먼저 멸망하고 나머지 네 사람이 세력 다툼을 벌이게 되었다. 이 가운데서도 지씨의 지백(智伯)이란 자가 가장 강하여 이들의 맹주 역할을 하고 있었다.
이것을 기회로 하여 지백은 세 사람에게 땅을 베어 달라고 요구하였다. 첫 번째 대상은 한(韓)의 강자(康子)였다. 강자는 매우 불쾌했으나 힘을 앞세우는 당시의 형편으로는 호소할 곳도 없고 해서 만호(萬戶)의 고을을 그에게 주었다. 이에 자신을 얻은 지백은 또 위(魏)의 환자(桓子)에게도 요구하였다. 위에서도 만호의 고을을 그에게 주었다. 이번에는 조(趙)의 양자(襄子)에게 채고랑(蔡皐狼)의 땅을 요구하였다. 자기 땅을 달라고 하듯이 아주 어느 땅을 지정해서 달라고 요구한 것이다.
조양자는 괘씸하기 짝이 없었다. 그의 가신(家臣) 장맹담(張孟談)과 더불어 숙의한 끝에 지백의 요구를 거절했다.
지백은 크게 노했다.
“제놈이 감히 내 요구를 거절하다니, 어디 두고 보자. 내 그 놈을 기어코 멸망시키리라.”
지백은 조양자를 힘으로 없애 버리려 하였다. 자신의 군대만 아니라 한의 강자와 위의 환자에게도 군사를 동원토록 하여 공격을 감행하였다.
조양자는 진양성으로 가서 이들 연합군과 대항하기로 하였다.그가 진양성을 방어 진지로 선택한 이유는 나름대로 그 이유가 있었다.
일찍이 조양자의 아버지 조간자가 윤탁(尹鐸)으로 하여금 진양성을 다스리게 할 때 그곳에 가장 세금을 가볍게 부과하고 선정을 베풀도록 해서 백성들이 그의 선정에 감복하여 유사시엔 죽기로써 싸우기로 맹세하고 있는 곳이었다. 이러한 사실을 안 조간자는 그가 살아 있을 때부터 그의 아들 조양자에게 이 다음에 만약 무슨 어려움이 닥치거든 진양성이 비록 멀지만 반드시 그곳으로 가서 대책을 세우라고 일러두었던 것이다.
진양성에서는 조양자를 바삐 맞아들이고 온 성 안이 한덩어리가 되어 지백의 군사와 맞섰다. 지백이 거느린 연합군은 진양성을 포위하고 부근을 흐르는 하천을 막아 그 물을 모두 진양성 안으로 몰아넣었다. 성을 물에 잠기게 하자는 작전이었다.
하루 이틀 시간이 흐름에 따라 진양성은 자꾸 물에 잠겼다. 성 안의 주민들은 가재도구를 높은 곳으로 옮기고 노숙을 해야 했으며 성이 잠기지 않은 곳이 6척에 불과하여 개구리가 우글거리고 있는 상태였지만 조금도 불평을 하거나 배반할 뜻이 없었다.
조양자는 성이 물에 완전히 잠기기 전에 승부를 내야 할 긴박한 사태에 빠졌다. 그는 궁리 끝에 기사회생(起死回生)의 묘책을 생각해냈다.
‘진양성이 물에 잠겨 우리 진양성의 백성도 싫증을 느끼고 있지만 지백의 군사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더욱이 한·위의 군사는 지백의 명령에 할 수 없이 출전했으므로 눈치만 보고 있을 것이 뻔하다. 한·위의 군사들을 내 편으로 만들어 지백의 군사를 협공해 보자.’
조양자는 장맹담을 은밀히 한·위의 진영으로 파견하여 그들을 설득시키도록 하였다.
“만일 조가 망하면 그 다음은 누구의 차례입니까? 입술이 없어지면 이가 시리다는 말이 있듯이 그 다음은 한도 위도 우리와 같은 운명이 될 것입니다. 결국 지백의 천하가 될 것이 확실합니다. 우리들 셋이 힘을 합하여 지백을 치는 일만이 오랫동안 함께 살 수 있는 길입니다.”
장맹담의 말은 백 번 옳았다.
“만약 우리 셋이 힘을 합하면 지백을 이길 수 있는 계책이 있겠소?”
장맹담은 힘이 났다.
“물론입니다. 문제는 물입니다. 지금 진양성으로 흘러 들어오는 물길을 지백의 진영으로 돌리는 일입니다.”
“좋소! 그렇게 하기로 합시다.”
세 사람은 날짜와 시간을 맞추어 정하고 장맹담은 진양성으로 돌아왔다.
조양자는 약속된 날짜에 장졸을 보내어 먼저 제방을 지키던 지백의 군사를 모두 죽이고 진양성으로 흘러 들어오던 물길을 지백의 진영으로 돌렸다.
갑자기 물난리를 만난 지백의 군사들이 아우성을 치며 물을 피해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 한·위의 군사들이 일제히 협공하고 조양자는 직접 그 앞을 가로막아 무찔러 들어가니 지백의 군사는 대패하였다. 조양자는 지백을 죽이는 한편 그 일족도 모두 멸망시키고 지백이 소유하고 있던 땅을 삼분하였다.
조양자는 지백을 죽이고도 직성이 풀리지 않아 그의 두개골에 옻칠을 하고 변기로 사용하였다. 지백의 가신에 예양(豫讓)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예양은 본래 범씨와 중행씨를 섬기다가 나중에 지백을 섬기게 되었다. 지백은 그를 매우 소중히 여기고 총애하였다.
조양자가 지백을 죽이고 지백의 두개골을 변기로 만들자 예양은 다음과 같이 한탄하였다.
“내 들으니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하여 죽고, 여자는 자기를 좋아하는 사람을 위하여 화장을 한다고 하였다. 지백은 나를 알아주었으니 반드시 그를 위해 원수를 갚아 지백에게 보답할 것이다.”
그는 드디어 성명을 바꾸고 스스로 죄인이 되어 조양자의 궁중에 들어가 변소의 내부를 바르고 있었다. 그는 양자가 변소에 오는 틈을 타서 양자를 죽이기 위해 비수를 품고 있었다. 양자가 변소에 가는데 갑자기 살기(殺氣)를 느끼어 변소를 수색하였다. 죄수로 가장한 자를 붙들어 심문하니 그는 예양이었다.
무슨 일로 비수를 품고 변소에 침입했느냐는 물음에 “지백을 위하여 원수를 갚고자 한다.”라고 말하였다. 예양은 좌우의 사람들이 그를 베어 죽이려 하자 양자가 만류하였다.
“그 사람은 의로운 사람이다. 내가 조심하여 피하면 그만이다. 신하로서 주인을 위해 원수를 갚고자 하니 이 사람이야말로 천하의 현인이다.” 그리고는 예양을 석방하였다.
그 후 예양은 또 몸에 옻칠을 하여 문둥이처럼 꾸미고 불에 탄 숯덩이를 머금어 벙어리가 되어 자기의 얼굴을 남이 전혀 알아볼 수 없게 하고 저잣거리에 다니며 거지 노릇을 하니 그의 아내조차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친구가 예양을 알아보고 울면서 말하였다.
“자네의 재능으로 양자의 신하가 되어 섬긴다면 반드시 양자의 신임을 받을 수 있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자네 하고자 하는 일이 쉽지 않겠는가? 무엇 때문에 이같이 고생을 사서 하여 원수를 갚으려 하는가? 그러니 어찌 원수 갚기가 어렵지 않겠는가?”
예양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남의 신하가 되어 섬기면서 그를 죽이려 하는 것은 두 마음을 가지고 주인을 섬기는 일이다. 내가 하려는 일은 극히 어려운 일인 줄 나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내가 이렇게 하는 까닭은 장차 천하 후세 사람들에게 남의 신하가 되어 두 마음을 품고 섬기는 자를 부끄럽게 해주기 위한 것이다.”
이렇게 말하고는 가버렸다.
얼마 뒤 양자가 외출하게 되었는데 예양은 양자가 통과할 다리 밑에 숨어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양자가 수레를 타고 다리에 이르자 갑자기 말이 놀라는 것이었다. 양자는 다리 밑에 틀림없이 예양이 잠복해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사람을 시켜 수색한 결과 예양이었다. 양자는 예양을 꾸짖었다.
“그대는 원래 범씨·중행씨를 섬기던 자로 지백이 그들을 모두 멸망시켰는데도 범씨·중행씨의 원수를 갚지 않았을 뿐 아니라 도리어 지백의 신하가 되었다. 지백은 이미 죽었는데 어찌 특별히 지백을 위해서만 끝까지 원수를 갚으려 하는가?”
예양은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고 태연한 태도로 말하였다.
“신이 일찍이 범씨·중행씨를 섬긴 일이 있사오나 범씨나 중행씨는 신을 여러 사람 중의 한 사람으로 대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그들을 여러 사람으로서 보답하였습니다. 그러나 지백은 나를 국사(國士)로서 대우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국사로서 그에게 보답하는 것입니다.”
양자는 탄식하며 말하였다.
“아, 예양이여! 그대가 지백을 위하여 하는 충성된 일은 이미 세상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졌다. 그리고 내가 그대를 석방시키는 일도 이미 충분하였으니 더 이상 그대를 용서할 수 없다. 그대는 죽음을 각오하라.”
양자는 군사들에게 명하여 예양을 포위하니 예양의 목숨은 경각에 달려 있었다. 예양은 조금도 동요하는 빛 없이 말하였다.
“신이 듣자오니 어진 임금은 남의 아름다운 일을 은폐시키지 않으며, 충신에게는 절의(節義)를 위하여 죽는 의리가 있다 합니다. 전날 임금께서는 이미 신을 너그럽게 용서하여 천하의 사람들로부터 임금의 어지신 덕을 칭찬받았습니다. 오늘의 일로 신은 당연히 죽음을 받아야 할 것이오나 원컨대 임금의 옷을 얻어 그 옷을 쳐서 원수를 갚는 뜻을 이루게 해주신다면 비록 죽더라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이에 양자는 그를 의롭게 여겨 사람을 시켜 자기 옷을 가져다 예양에게 건넸다. 예양은 칼을 빼들고 그 옷을 치며 말하였다.
“내 이렇게 하여 지하에 있는 지백에게 보답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는 마침내 칼에 엎어져 자결하였다. 예양이 죽던 날 조나라의 지사(志士)들은 모두 울며 그를 애도하였다고 한다.
진양성의 싸움에서 지씨 일족을 완전히 멸망시키고 조·한·위의 세 나라로 갈라진 후 주의 왕실에서 정식으로 제후의 나라로 인정받은 것은 그로부터 50년이 지난 기원전 403년의 일이다.
따라서 춘추 시대와 전국 시대의 경계는 진이 사실상 세 나라로 갈라진 해인 기원전 453년이라는 설과 정식으로 제후의 나라로 인정받은 기원전 403년이라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자치통감(賚治通鑑)》의 저자 사마광(司馬光)은 기원전 403년(주의 위열왕 23년)으로부터 편년체(編年體)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춘추 시대에서 전국 시대로 들어서면 중국의 역사는 제(齊)·초(楚)·연(燕)·조(趙)·한(韓)·위(魏)·진(秦)의 무대로서 이른바 전국 칠웅(戰國七雄)의 시대가 된다. 이 칠웅 사이에 끼인 약소국으로 주나라를 위시하여 노(魯)·송(宋)·중산(中山) 등 10여 국이 존재하였다.
주나라는 주왕이 다스리는 나라로 춘추 시대로부터 이미 허수아비 정권에 지나지 않았으나 종주국의 상징적 존재로서의 권위를 완전히 상실한 것은 아니었다. 때문에 천하의 패자로서 그 위엄을 떨치던 제후들도 존왕(尊王)의 기치를 높이 들었던 것이다.
그러나 전국 시대에 접어들면서부터는 그 양상이 아주 달라져 갔다. 주왕의 상징적 존재로서의 의의는 점점 사라져 작은 제후국과 다름없는 존재로 전락하고 말았다. 따라서 패자를 꿈꾸는 제후들 가운데 누구 하나 주왕의 존재를 마음속에 생각하는 사람이 없었던 것도 당연한 일로 생각되었다.
춘추 시대에는 주왕에 복종하지 않았던 초나라만이 자칭 왕이라 칭하고, 그 밖의 나라들은 공(公)이나 후(侯)로 칭하고 있었다.
기원전 334년 위(魏)의 영주가 왕이라고 칭한 데 이어 한·조·연·중산 등이 연합하여 왕을 칭하고 나섰다. 이를 계기로 하여 불과 2, 30년 동안의 짧은 기간에 모든 나라가 왕이라 칭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군웅들의 투쟁 목표는 한결같이 천하를 통일하고 자기의 권력을 소신대로 휘둘러 보겠다는 방향으로 귀결됨으로써 250년에 걸치는 전국 시대가 펼쳐지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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