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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야기 중국
사1
은주시대

유왕과 포사

새로 왕위를 이은 유왕은 위인이 난폭하고 주색을 좋아하여 유흥으로 정사를 돌볼 겨를이 없었다. 그의 어머니 강후(姜后)가 이를 걱정하여 자주 타일렀으나 유왕은 듣지 않았다. 더욱이 강후가 죽은 후로는 여색에 빠져 국정을 돌보지 않았다. 마침내 포사(褒似)라는 절세미인에게 빠져 자신은 견융(犬戎)에게 무참히 살해되고 주나라는 멸망의 상태에 이르게 되었으니 지금까지의 고대 역사를 비추어 볼 때 왕조 말기에는 으레 절세미녀가 나타나 왕조의 멸망을 가져오는 큰 원인으로 나타났다. 하(夏)의 걸왕(桀王)이 그렇고, 은(殷)의 주왕(紂王)이 그렇고 또 유왕(幽王)도 그러했다.

절세의 미녀 포사의 기구한 출생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야기는 하왕조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하왕조가 쇠퇴했을 무렵 두 마리의 신룡(神龍)이 왕궁의 뜰에 나타나 “우리들은 포(褒)의 두 임금이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포는 하왕조의 왕족으로서 포씨, 비씨(費氏), 기씨(杞氏), 증씨(繒氏)와 함께 봉해진 나라의 하나로 지금의 섬서성(陝西省) 서남부 포성현(褒城縣)에 해당된다.

하왕은 점쟁이에게 비방을 점쳐 보라고 명했다.

죽일 것인가라는 물음에도 흉(凶), 쫓아 버릴 것인가라는 물음에도 흉, 무엇을 점쳐 보아도 흉괘가 나올 뿐이었다. 용의 정기라고 말하는 타액(唾液, 침)을 받아서 간직해둘 것인가라는 점을 쳤더니 길괘가 나왔다. 그래서 이 일을 기록한 내용을 보였더니 용이 입에서 정기를 토해 놓고 사라지는 것이었다. 그것을 상자에 소중히 받아서 꼭꼭 봉하고 정성을 다하여 간직했다가 다음 대에 물려주게 되었다.

소중히 간직하는 물건을 흔히 신주 모시듯 한다고 말한다. 이 상자야말로 소중히 간직되어 하나라가 망하자 그대로 은나라로 전해지고 있었다. 은이 망하자 그 상자는 주나라로 전해졌다.

은나라는 신권국가(神權國家)로서 미신을 소중히 한 나라였으므로 은왕조 5백여 년 동안 이 금단의 상자는 한 번도 열린 적이 없었다. 그러던 것이 무왕으로부터 10대째 되는 여왕(厲王)시대에 이르러 어떤 실수로 인하여 그 상자가 열리게 되었다.

천 년간이나 금단의 상자로 소중히 간직되었던 상자가 열리자 용의 침은 갑자기 궁전에 흘러나왔으며 아무리 쓸고 닦아도 웬일인지 닦여지지가 않았다.

“여자들을 알몸으로 만들어 큰 소리를 지르도록 하라.”

은나라와 비교해서 미신을 믿는 풍습이 많이 없어졌다고는 하지만 주나라 사람들도 역시 주문(呪文)을 외는 일을 많이 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영묘한 기운은 더러운 물건으로 그 영묘한 힘을 없앨 수 있다고 생각했다.

19세기 중엽 아편 전쟁 당시에도 이러한 주법(呪法)을 믿고 있었던 장군이 있었다. 그는 영국군의 포격이 너무도 정확했기 때문에 이것은 필시 주술사(呪術師)의 영묘한 신통력 때문일 것이라고 생각하고 그 신통력을 없애기 위한 주술로써 가까이에 있는 민가에서 부인의 변기를 많이 모아다가 그 변기 주둥이를 영국 군함에 향하도록 했다는 기록이 있다. 더러운 물건 가운데서도 여성의 변기는 더욱 효과적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양이다. 청나라 장군의 이 방법은 아무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실오라기 하나도 걸치지 않은 여자들이 큰 소리로 떠들어대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용의 침은 한 마리의 검은 도마뱀으로 변하여 후원 쪽으로 도망치는 것이었다. 그런데 후원에 있던 일곱 살 난 소녀와 이 도마뱀이 마주친 것이다. 이 소녀와 도마뱀의 마주침은 절세의 미녀 포사의 잉태를 의미하는 것이었으나 그 당시로서는 이 소녀는 물론 아무도 이 신비스러운 조화를 예측하지 못했다. 그 후 도마뱀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 어린 소녀는 열 다섯 살이 되자 처녀의 몸인데도 자꾸 배가 불러왔다. 그녀는 고민에 빠졌다. 어떻게 했으면 좋을지 도무지 대책이 서지 않았다.

“아기가 태어나면 버릴 수밖에 없다.”

그녀는 그렇게 마음 먹고 몸을 숨기고 지냈다.

여왕이 죽고 선왕 시대가 되었다.

“산뽕나무 활과 대로 만든 전통(箭筒)
이것이 주나라를 망치는 근본”

이런 노래가 거리에서 공공연히 불려지고 있었다. 선왕은 이 노래를 문제삼지 않았으나 웬일인지 마음에 걸려 신경을 쓰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산뽕나무 활과 대로 만든 전통을 팔고 있는 부부가 있다는 보고가 들어왔다. 선왕은 그들 부부를 모두 잡아 죽이라는 명령을 내렸으나 그들은 도망쳐 위기를 모면했다. 있는 힘을 다하여 허겁지겁 도망치던 이들 부부의 귀에 어렴풋이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려 왔다. 활장수 아내가 그쪽으로 달려가 보니 갓 태어난 아기가 버려진 채 울고 있었다.

“아이고 가엾어라!”

활장수 아내가 아기를 안아 올리자 아기는 이상하게도 울음을 뚝 그쳤다.

“도망치기도 바쁜데 아기를 어떻게 하려고 그래. 아직도 우리를 쫓고 있을지 모르니 빨리 도망이나 갑시다.”

아내가 아기를 땅에 내려놓자 아기는 더욱 보채어 울어댔다.

“버려진 아기이니 데려갑시다. 우리는 자식이 없지 않소.”

마침내 그들은 그 아기를 데려가기로 결정했다.

이 아기가 바로 용의 침이 변해서 된 도마뱀과 마주쳤던 처녀가 낳아서 버린 아기였던 것이다.

활장수 부부는 그 아기를 안고 멀리 포(褒)나라로 도망쳐 그곳에서 이 아기를 길렀다. 그녀는 누구라도 한 번만 보면 감탄할 정도의 미녀로 자랐다. 용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 무렵 포의 영주가 어떤 중죄를 지어 주왕실로부터 중벌을 받게 되었다. 포나라에서는 그 죄를 용서받는 대가로 포나라 안에서 제일가는 미녀를 주왕에게 바치고 사태를 수습했는데 이때 미녀로 뽑힌 여자가 활장수 부부가 기른 여자였다. 그녀의 이름은 포사였다.

당시에는 이런 예가 많았다. 하나라를 망친 말희가 그렇고, 은나라를 망친 달기가 그렇고, 포사 또한 그러했다.

그때의 천자는 주의 유왕으로 그는 포사로 인하여 주나라를 망치는 결과를 가져왔다.

여기서 우리는 《사기》에 기록된 연대와 포사의 나이에 너무 차이가 많음을 살피고 넘어가기로 하자. 《사기》에는 “유왕 2년 대지진이 일어나 경수·위수·낙수의 3대 강이 파괴되고 기산이 무너지는 천재지변이 일어났다. 또 8년에 포사가 총애를 받고 얼마 후에 아들을 낳았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유왕이 포사를 맞이한 것은 유왕 3년으로 보아진다.

용의 침이 금단의 상자 속에서 흘러나온 것은 여왕 말년이라고 하니 여왕은 선왕의 아버지이고 유왕의 할아버지이다.

여왕 37년에 민중의 내란이 일어나 여왕이 망명했고 이 망명 14년 동안 두 신하가 공화 정치를 폈다. 공화 원년은 사마천이 연표를 쓰기 시작한 해로 이후부터는 연대가 일목요연하다. 공화 원년은 서기 전 841년으로 되어 있다.

망명지에서 여왕이 죽자 선왕이 즉위했다. 선왕은 46년간 재위했고 그가 죽은 후 유왕이 왕위를 계승했다.

그런데 여왕 말년 일곱 살의 소녀가 궁궐 후원에서 도마뱀과 마주치고 열 다섯 살에 아이를 잉태했으니 포사의 탄생은 공화 시대의 중반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또한 선왕 재위 46년을 지나 유왕 3년에 포사가 바쳐졌으니 이로써 보면 당시 포사의 나이는 50세가 넘는 셈이 된다. 아무리 절세의 미녀라도 50세가 넘었다면 과연 미인들의 숲속에 파묻혀 사는 유왕의 총애를 독차지할 수 있었을 것인가? 상상할 수 없는 일이다.

그래서 어떤 기록에는 잉태한 지 40년에 아이를 낳았다고 얼버무리기도 했다. 《사기》에도 이미 머리를 틀어올리고각주1) 잉태함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니 잉태한 지 40년에 아이를 낳았다고 하면 연대상의 모순은 없는 것이다.

어쨌든 유왕은 포사를 보고 놀랐다. 지금까지 많은 미녀를 편력했지만 포사 같은 여인은 일찍이 못 보았던 것이다. 유왕은 포사에게 완전히 빠져들었고, 유왕의 총애를 받고 포사가 아들을 낳자 그를 태자로 삼았다.

일찍이 유왕은 신후(申侯)의 딸을 정비로 맞아 그녀에게서 태어난 아들 의구(宜臼)를 이미 태자로 책봉했었다. 하지만 유왕은 포사의 환심을 사기 위해 의구를 폐하고 포사가 낳은 아들 백복(伯服)을 태자로 세운 것이다.

절세의 미녀 포사에게는 웃음이 없었다. 그녀가 기뻐서 웃지 않을까 하고 정비의 소생인 태자를 폐하고 그녀의 아들 백복을 태자로 세웠건만 웃는 기색은 하나도 없었다. 어떻게 하면 그녀를 웃길 수 있을까? 그녀의 웃는 얼굴을 상상만 해도 유왕은 뼈가 녹는 것 같았다. 시험삼아 별의별 일을 다 꾸며봤지만 웃는 시늉조차 내지 않았다.

“도대체 너는 무슨 좋은 일을 보아야 웃겠느냐?”

“소첩은 좋아하는 것이 없사옵니다. 다만 비단 찢는 소리를 들으면 기분이 좋을 듯합니다.”

“비단 찢는 소리가 좋다면 왜 진작 말하지 않았느냐?”

유왕은 그날부터 매일 비단 백 필씩을 가져다가 궁녀를 시켜 찢게 하였다. 그러나 포사는 웃지 않았다. 다만 뺨 부근이 희미하게 경련을 일으키는 듯했고, 입술이 약간 벌어지는 데 불과했다. 그래도 유왕은 미칠듯 기뻐했다.

매일 산더미 같은 비단이 찢겨 없어지니 이미 창고는 바닥이 나 있었다. 제후들로부터 또는 일반 백성들로부터 징발해 이를 충당하니 백성들의 원성은 나날이 높아갔다.

그러는 사이에 비단 찢는 소리에도 이젠 싫증이 나버렸는지 그녀는 이제 뺨도 움직이지 않았다.

어느 때 무슨 실수로 봉화대에 봉화가 올랐다.

봉화는 외적이나 반란군의 침공 등 아주 긴급한 사태가 일어났을 때 봉화를 차례차례 중계식으로 올려서 원근 제후들에게 긴급을 알려 군대를 이끌고 왕궁으로 집결하라는 신호이다.

“이거 큰 일이다. 긴급한 사태다!”

제후들은 군사를 이끌고 밤을 도와 왕궁으로 집결했다. 그런데 아무 일도 없었다. 훈련 중에 실수로 일어난 봉화였다는 것이다. 제후들은 맥이 빠져 있었고 무장한 군사들은 투구 따위를 땅바닥에 집어던지며 분개했고 맥이 풀린 채 그 자리에 주저앉는 자도 있었다.

이런 모습을 보고 포사는 단순호치(丹唇皓齒)각주2) 를 드러내어 살짝 웃었다.

꿈에 그리던 포사의 웃는 얼굴이었다. 꿈에 그리던 것보다 몇 배, 아니 몇백 배 더 아름다웠다. 한 번 웃음에 백 가지 교태가 서려 있었다. 이 세상에 그녀의 웃음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없다고 생각했다. 하늘도 땅도 그녀가 웃는 이 순간을 위해 생겨난 것이라고 착각한 유왕은 제정신이 아니었다.

유왕과 포사

실수로 올려진 봉화를 보고 다급히 달려오는 병사들을 보며 포사가 웃자 유왕은 몇 번이나 포사를 웃게 하기 위해 거짓 봉화를 올렸다. 봉화를 믿지 않게 된 병사들은 후에 진짜로 적이 공격해왔을 때 출정하지 않아 주나라는 멸망하게 되었다고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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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다음부터 유왕은 끊임없이 봉화를 올리게 했다. 처음에는 제후들도 달려왔지만 거듭 되풀이되는 동안에 제후들의 생각도 달라져 갔다.

이번에야 설마 거짓이 아니겠지, 한 여자를 웃기기 위한 장난이 아니겠지 하고 숨을 몰아쉬며 달려오면 높은 다락 위에서 유왕과 포사가 굽어보며 웃고 있는 것이었다.

제후들은 이제 봉화가 올라도 가만히 있기로 했다. 쓸데없는 고생으로 한 여자의 웃음거리가 되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이런 사태를 전후하여 정비의 자리에 있던 신후의 딸은 쫓겨나고 포사가 정비의 자리에 앉았다. 정비인 신후를 폐하고 태자 의구까지 폐한 데 대한 신후 일족의 원한은 깊었다. 신후의 일족은 하남성 남양현 북쪽에 있는 강성(姜姓)의 나라로 백이의 후손들에게 봉해진 나라였다. 신후의 일족은 은밀히 군사를 모았다. 증(繒)·서이(西夷)·견융(犬戎) 등 변방의 유목 민족들도 꾀여 반란을 일으켰다. 이 반란군의 주력부대는 군사 1만 5천의 대군을 출동시킨 견융이었다.

유왕 11년 신후 일족의 반란군은 이들 견융족과 합세하여 호호탕탕 수도인 호경을 향하여 물밀듯이 닥쳐 들어갔다. 이들 반란군은 호경을 세 겹으로 둘러싸니 호경은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졌다. 유왕은 크게 놀라 중신들과 의논 끝에 봉화를 올려 제후들에게 구원을 청하기로 하였다.

“봉화를 올려라.”

마침내 봉화는 올랐다. 그러나 이틀이 지나도록 제후들의 구원병은커녕 개미 새끼 하나도 오지 않았다.

봉화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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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란군들은 물밀듯이 궁궐로 쳐들어오고 있었다. 다급해진 유왕은 몇몇 신하의 도움을 받아 작은 수레에 포사와 백복을 싣고 후문으로 빠져나가려 했다. 그때 사도 정백우가 뒤를 따르며 큰 소리로 외쳤다.

“대왕께선 놀라지 마십시오. 신이 신명을 다하여 어가를 모시겠나이다.”

정백우는 사람을 시켜 여산 별궁 앞에 불을 놓아 반란군을 현혹시키고 자기는 유왕 일행을 인도하여 뒷문으로 빠져나가는 데 성공했다.

정백우는 동행하던 윤구에게 어가를 보호하여 앞으로 나아가게 하고 자기는 뒤를 끊고 싸우면서 도망하였다. 그러나 견융의 장수들과 좌충우돌하며 혼전을 벌이다가 그들이 집중적으로 쏘아대는 화살에 일국의 제후이며 어진 재상인 정백우는 무참히 죽고 말았다. 유왕 일행은 붙들려 견융족의 추장에게 넘겨졌다. 그는 곤룡포에 옥대를 띤 유왕과 백복을 단칼에 두 동강 내고 포사는 수레에 태워 진중으로 데려가 자기 여자로 삼았다. 이것이 유왕 즉위 11년의 일이었다.

이때 반란군의 주동이었던 신후는 성중에 있다가 궁궐에 불이 일어남을 보고 급히 군대를 이끌고 들어가 불을 껐다. 먼저 냉궁(冷宮)에 갇혀 있는 신후(申后)를 구해내고 유왕과 포사를 찾았다. 유왕이 북문으로 빠져 도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여산 별궁으로 갔을 것이라 짐작하고 별궁으로 급히 달려가다가 견융을 만나 유왕이 이미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놀랐다. 애당초 그의 계획은 왕후와 태자 의구를 복위시키려 했을 뿐이었고 유왕을 죽일 의사는 없었다. 일이 이렇게 될 줄은 생각 못했던 것이다. 그는 유왕의 시체를 거두어 예를 갖춰 장례를 치렀다.

신후는 호경으로 돌아와 잔치를 베풀어 견융을 위로하고 처음 약속대로 창고를 열어 금은보화와 비단을 잔뜩 주어 그들을 돌려보내려 하였다.

그러나 견융은 유왕을 죽인 것을 세상에 없는 무슨 큰 공이나 세운 양 그대로 머물러 술을 마시고 놀며 자기 나라로 돌아가려 하지 않았다.

신후는 하는 수 없이 밀서를 여러 제후에게 보내어 이 사실을 알리고 견융을 몰아내는 데 협력해줄 것을 호소하였다. 이에 여러 제후들은 즉시 군사를 출동시켜 서로 협력하여 견융을 몰아내는 데 성공했다.

포사는 그동안 견융의 추장이 데리고 지냈으나 밤중에 갑자기 도망치는 바람에 아무리 놓치기 아까운 미인이었으나 동행할 수가 없었다. 홀로 떨어진 포사는 사람을 대할 면목이 없었음인지 자신의 과거를 뉘우쳤음인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용의 침이 화해서 태어난 포사의 일생은 이것으로 끝났다.

포사의 죽음에 대해서 《사기》에는 유왕과 함께 견융에게 잡히자 유왕과 백복은 그 자리에서 죽임을 당하고 포사는 포로가 되었다고만 말하고 있을 뿐 그 후의 일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견융을 물리친 신후는 곧 잔치를 벌여 여러 제후들을 환대하고 신국에 있는 태자 의구를 받들어 왕위에 나가게 하였다. 택일을 해서 종묘에 고하고 왕위에 오르니 이가 곧 평왕(平王)이다.

한편 견융은 제후들에게 한 번 쫓김을 당하긴 했으나 항상 원한을 품고 기회만 있으면 대군을 출동시켜 변방을 침범하고 점차 호경에 육박해왔다. 이러한 급보가 봉화로 알려질 때마다 제후들은 군사를 거느리고 호경에 왔다갔다 편할 날이 없었다. 호경은 언제 오랑캐 군대가 다시 침범해올지 몰라 평왕은 낙양(洛陽)으로 도읍을 옮겼다. 낙양은 지리적으로 천하의 중심지이고 사방 제후들이 왕래하기에도 교통이 편리한 사통오달의 곳이었다. 궁실 제도를 호경과 꼭같이 하고 동도(東都)라 했으니 모든 시설이 수도로서 손색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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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희영 집필자 소개

서울에서 태어나 한문사숙에서 한문을 수학하고 충남대학교에서 공부했다. 저서로 《이야기 일본사》, 《이야기 중국사》가 있다.

출처

이야기 중국사1
이야기 중국사1 | 저자김희영 | cp명청아출판사 도서 소개

중국 고대부터 전한 시대까지의 역사를 재미있는 에피소드와 함께 이야기 식으로 풀어 썼다. 엄청난 인구와 광대한 국토가 가진 무한한 가능성이야말로 진정한 중국의 힘이며,..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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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유왕과 포사이야기 중국사1, 김희영, 청아출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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