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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드라마, 한
국을 말하다

〈전원일기〉는 정서 순화 드라마

5공은 퇴폐 저속한 사회 분위기를 정화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이른바 국민 정서 순화 드라마 제작을 강요했다. 불륜 퇴폐 드라마를 정화한다는 바람이 불면서 방송사가 적극적으로 정서 순화 드라마 제작에 나섰음은 물론이다. 농촌 드라마의 대명사 〈전원일기〉는 바로 그런 흐름 속에서 MBC가 대안으로 내놓은 드라마였다. 그러니까 〈전원일기〉의 제작 의도는 "어디까지나 농촌 차원에 근거한 우리 한국의 보편적인 진리와 교훈을 터득하는 데 작품 가치가 있"는 드라마를 만드는 것이었다. 시청률에 신경 쓰지 않고 공해 없는 농촌 드라마로 잔잔한 감동을 전달하겠다는 기획 의도를 담았던 만큼 사실 〈전원일기〉는 '비정치성'으로 포장한 대단히 '정치적인' 드라마였다.

당시 농촌은 박정희 정권 때부터 지속된 저곡가 정책과 시장 개방에 따른 외국 농산물 수입으로 벼랑 끝으로 내몰리고 있었다. 전두환 정권은 물가 안정을 명분으로 5공 내내 추곡 수매가를 인상하지 않고 쌀값을 낮은 가격으로 묶어두었다. 1982년부터 1986년까지 5년간 추곡 수매가 인상률은 평균 약 4.3퍼센트에 그쳤는데, 물가 인상률을 고려할 때 사실상 마이너스를 기록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특히 1983년에는 수매가를 단 1원도 올리지 않았을 뿐더러 쌀을 팔지 못해 농민들이 아우성을 치는 가운데서도 농가당 쌀 한 가마에서 46.1퍼센트의 이득을 보았다고 선전하는 파렴치한 짓마저 저질렀다.

쌀값 하락으로 1983년 179만 원이었던 농가 호당 평균 부채는 그 이듬해에는 300만 원을 넘어서 농가는 말 그대로 파탄이 났다. 이런 농촌의 비참한 현실을 비관해 자살하는 농민들의 숫자가 급격하게 증가했는데, 신민당 의원 황병우의 조사에 따르면, 1983~1984년 농약을 먹고 자살한 농민은 무려 2600여 명에 이르렀다. 한 농민은 유서에서 이렇게 절규했다. "여태까지 뼈 빠지게 일만 한 것이 잘못이란 말이냐? 사람을 이토록 못살게 구는 세상이 또 어디에 있단 말이냐."

하지만 정서 순화 드라마 〈전원일기〉가 농촌이 처한 그런 구조적 모순과 아픔을 소재로 삼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비참한 현실과 달리 〈전원일기〉 속 농촌의 모습은 한결같이 편안함과 넉넉함의 상징으로 그려졌으며 농촌은 도시인의 '추억'을 되새기는 용도로만 쓰였다.

〈전원일기〉는 농촌의 비참한 현실을 외면하고 농촌을 한결같이 편안함과 넉넉함의 상징으로 그렸다. 농촌은 도시인의 '추억'을 되새기는 용도로만 쓰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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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농촌의 문제를 담아내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때마다 '한국 TV 드라마 수난사'에 오르는 탄압을 받아야 했다. 대표적인 게 1982년 이른바 '양파 사건'을 다룬 '괜찮아요' 편이였다. 당시 전국에서 양파 파동이 발생했고, 이 때문에 함평군의 한 농민이 자살하는 비극이 발생했다. 이때 〈전원일기〉가 농촌 사회가 직면한 비극적 현실을 정면에서 응시했다. 높은 시청률을 자랑하고 있던 〈전원일기〉가 농촌 문제의 실상을 예리하게 드러내자 사회적으로 큰 파장이 발생했다. 정서 순화용으로 출발한 드라마가 오히려 국민 정서를 자극하고 나섰으니, 5공의 심기가 편할 리 없었다. 농수산부를 비롯해 무려 5곳의 기관이 "드라마마저 농정 실패를 공격하고 전 농민의 사기를 일거에 무너뜨린 있을 수 없는"이라며 발끈하고 나섰다. 후폭풍의 위력은 컸다. 이 사건으로 인해 작가와 연출자에 대한 신원 조회와 행적 조사가 이루어졌고, 이들에 대해서 며칠간 거처 제한이 가해졌다. 심지어 기획 의도와 저의를 추궁당하는 사태마저 낳았다. 정권의 통제와 방송사의 과잉 충성 속에서 왜곡되고 굴절될 수 밖에 없었던 〈전원일기〉의 농촌 묘사는 1980년대 중반 농촌에서 들불처럼 번진 '시청료거부운동'의 불쏘시개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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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황호택, 「최불암·김혜자: "권태롭고 창피해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황호택 기자가 만난 사람』(한나래, 2003), 290쪽; 오명환, 『텔레비전 드라마 사회학』(나남출판,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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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박세길, 『다시 쓰는 한국 현대사 3』(돌베개, 1988), 155쪽; 「누구를 위한 수입 개방이냐: 외국소 도입 농민 피해액 2조 원에 달해」, 『월간 말』, 제14호, 1997년 10월 1일, 64쪽.
  • ・ 「늘어나는 부채 농민들 원성 높아」, 『월간 말』, 제10호, 1987년 3월 20일, 56면.
  • ・ 오명환, 『텔레비전 드라마 사회학』(나남출판, 1994). 341~342쪽.

김환표 집필자 소개

IT와 SNS 문화, 사회학에 관심이 많은 문화평론가다. 전북대학교 신문방송학과에서 커뮤니케이션학을 전공했다. 월간 『인물과사상』에 ‘사회문화사’를 연재했으며, 지금은 ‘인물 포커스’를 연재하고..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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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한국을 말하다
드라마, 한국을 말하다 | 저자김환표 | cp명인물과사상사 도서 소개

최초의 드라마사면서 드라마로 보는 사회문화사! 한국인은 왜 이토록 드라마를 사랑하는 것일까? 드라마 공화국, 대한민국 드라마의 역사를 말한다. 한 시대의 문화는 물론 ..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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