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국을 말하다
드라마 속 패륜은 반공 국민 총화를 해치는 이적 행위
1975년 4월 30일 월남이 패망했다. 박정희 정권은 월남 패망을 국내 정치에 십분 활용하고 나섰다. 그해 5월 13일 긴급조치 9호가 발동됐고 억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드라마는 또 직격탄을 맞았다.
신문은 그런 공격의 든든한 후원자였다. 『한국일보』 1975년 2월 5일자는 안방 관객이 '시각 공해의 인질'로 잡혀 있다고 비판했고, 심지어 스포츠신문인 『일간스포츠』 1975년 4월 2일자까지 "소재 내용의 거의가 남녀 간의 삼각관계, 이중생활, 남녀 갈등에만 치중한 채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져 이제는 흥미마저도 상실해가고 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조선일보』 1975년 5월 11일자는 일일 드라마에서 묘사되는 남녀 간 애정 관계를 '불륜과 저질', '퇴폐풍조 지적 1호'라고 비난했다. 『동아일보』 1975년 5월 19일자 사설은 "우리나라 TV 프로는 과연 얼마만큼 건전한가. 밤 휴식 시간의 대부분을 빼앗고 있는 TV 프로를 놓고 최근 그 저속성이 다시금 문제가 되고 있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라고 했다.
"사실 시청자들한테 가장 인기가 있으며 그래서 각 TV국이 가장 제일 역점을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일일 연속극을 살펴보면 어쩌면 그렇게도 하나같이 저속하고 비윤리적인 것만을 내용으로 하고 있는지 사뭇 아연해진다. 거기선 어떤 진실성이나 호소력도 찾아볼 수 없으며 오직 눈에 뜨이는 것이 있다면 작가의 비현실적이고 관념적인 감정의 유호와 제작진의 양식을 도외시한 최루 취미가 있을 뿐이다. 그중에도 어떤 것은 시청자의 인기를 유지하기 위해 되지도 않는 이야기를 엿가락처럼 억지로 늘이고 있는 후안무치한 것이 있는가 하면 어떤 것은 도무지 상상할 수도 없을 만큼 불륜한 내용의 것이 있고 사극 등에 있어서도 국적을 분별할 수 없는 웃기는 내용의 것 등이 보통으로 방송되어 시청자들을 우롱하고 있는 데서 더한층 개탄을 자아내고 있다."
당시 일일 연속극에 대한 비판은 가히 장마철 폭포수처럼 쏟아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경쟁하듯 쏟아진 신문과 지식인의 드라마 비판을 일별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혼외정사·혼전임신 등의 비도덕적 소재(퇴폐적), 질질 끈다·진전 없이 맴돈다(무절제), 천편일률·겹치기 출연(식상), 주제의식의 빈곤·신변잡기·통속적 애정행각·삼각관계·울고 짜는 퇴영적 여성 취향(비생산적), 현실과 거리가 멀다(비현실적), 드라마 수가 많다(과다), 등장인물 간의 갈등 심화(화합 저해), 도시 중심(농촌 소외), 상류층 소재(계층 간 위화감), 고증이 안 되어 있거나 빈약하다(사극의 고증 부재), 암투·모략·음모 투성이(역사의 희화화) 등."
대학생도 가세했다. 한 대학생은 신문 독자 투고를 통해 "요즈음 우리의 유일한 오락물이 되어버린 TV가, 온 가족이 모여 보는 저녁 시간의 소위 일일 연속극들은 남녀의 패륜을 공공연히 보여줌으로써 건전한 가정 파괴의 기수가 되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게 되었다."라고 말했다.
"하나같은 TV 무대의 호사스런 배경은 오늘 같이 살기 어려운 많은 서민층을 기만하는 듯이 보이며 '강 건너 불구경' 정도가 아니라 '불난 집에 부채질'이란 말이 새삼 생각하게 한다. 침대에 누워 고급 담배와 양주를 즐기며 사랑에 빠져 고민하는 중년 신사, 일류 의상실에서 앉아 디자이너와 환담하는 여대생, 으리으리한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맥주를 마시는 청춘 남녀들, 이것이 진정 오늘날 대학생의 모습으로 비쳤단 말인가? 그러기에는 학비, 하숙비 걱정으로 일주일 내내 가정교사로 뛰어다니며 공부하느라 발버둥치는 대학생들에게 너무나 커다란 인간적 모욕이 아니겠는가. 그러한 TV의 황홀한 무대는 '다수'가 아닌 '일부'를 생각나게 하며 나도 저렇게 한번 잘살아보겠다는 가슴에 부푼 희망을 자극하기에는 증오감이 앞선다. 요즘 한창 절정에 오른 반공 국민 총화를 해치는 이적 행위라 규탄한다 해서 지나친 언변일까."
그런 분위기 속에서 MBC의 〈안녕〉과 〈갈대〉, TBC의 〈아빠〉 등은 된서리를 맞았다. 방윤에서 드라마가 퇴폐적인 내용을 담고 있어 건전한 가정생활과 사회 윤리를 해칠 우려가 있기 때문에 빨리 끝내라는 압력을 넣었기 때문이다. 당시 방윤은 〈안녕〉은 처녀가 유부남을 좋아한다는 설정 자체를, 〈아빠〉는 20대 여자와 40대 유부남의 사랑이 사회와 가정윤리를 해친다는 퇴폐 저속의 근거로 삼았다. 〈갈대〉에 대해선 "등장인물의 애정 행각이 과잉 표현되어 건전한 사회 기풍의 진작을 해치고 퇴폐성을 조장했으며, 어린이를 어른들의 가정불화에 끼어들게 하여 아동 교육상 좋지 않고 극 중의 김혜자를 주변인물이 건전한 가정의 질서를 지키는 데서 출발하지 않아 본래 지녀야 할 가정의 순결성과 건전성을 저버렸다."라며 작가에게 집필 정지 처분을 내렸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 ・ 임종수, 「1970년대 텔레비전, 문화와 비문화의 양가성」, 『언론과사회』, 2008년 봄 16권 1호.
- ・ 「TV 프로의 저질화」(사설), 『동아일보』, 1975년 5월 19일, 2면.
- ・ 조항제, 「1970년대 한국 텔레비전의 구조적 성격에 관한 연구: 국가 정책과 텔레비전 자본 간의 관계를 중심으로」, 서울대학교 대학원 신문학과 박사 학위 논문, 1994년 2월; 오명환, 『텔레비전 드라마 사회학』(나남출판, 1994).
- ・ 김경수, 「남녀 불륜 다루는 TV극」, 『동아일보』, 1975년 5월 15일, 8면.
- ・ 이효영, 「〈신부 일기〉로 맺은 인연」, 김포천 외 엮음, 『김수현 드라마에 대하여』(솔, 1998), 295쪽; 정순일·장한성, 『한국 TV 40년의 발자취: TV 프로그램의 사회사』(한울아카데미, 2000), 106쪽; 정일몽 'TV 드라마의 미래상', 『신문과 방송』, 1979년 3월호, 122쪽.
- ・ 「도중 하차한 TV 드라마」, 『동아일보』, 1975년 5월 19일, 5면.
글
출처
최초의 드라마사면서 드라마로 보는 사회문화사! 한국인은 왜 이토록 드라마를 사랑하는 것일까? 드라마 공화국, 대한민국 드라마의 역사를 말한다. 한 시대의 문화는 물론 ..펼쳐보기
전체목차
백과사전 본문 인쇄하기 레이어
[Daum백과] 드라마 속 패륜은 반공 국민 총화를 해치는 이적 행위 – 드라마, 한국을 말하다, 김환표, 인물과사상사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