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국을 말하다
드라마에 몰아친 자율 정화 바람
전두환 정권은 방송의 사회적 영향력을 고려해 박정희 정권 말기에 느슨해진 방송 심의도 대폭 강화하고 나섰다. 방윤이 1980년 8월 29일 발표한 이른바 TV 프로그램 정화 시행에 따른 세부 지침은 이후 방송 심의의 기준이 되었다. 『동아일보』 1980년 8월 30일자 기사는 "이 지침에 따르면 퇴폐적이고 저속한 방송 내용이나 지역 간 계층 간 위화감을 조장하는 내용, 폭력, 살상, 학대 등 비도덕적인 내용 등을 규제하는 것을 원칙으로 품위가 손상된 연예인의 출연 억제조처까지 포함되어 있다."라고 했다.
"TV 드라마의 경우 호화 주택이나 응접실, 가구, 장식, 정원, 별장, 농장 등이 무대로 등장하지 못하며 부동산 투기 행위, 자가용차 드라이브 데이트, 고액계 놀이, 명분 없는 해외 나들이, 여러 명의 가정부 사용 등은 규제의 대상이 되며 고부간의 갈등, 노부모와 자식 간의 갈등, 친척·부부·형제 간의 갈등 역시 규제된다. 또한 혼전 동거, 혼외정사, 혼전 임신 등이나 이중생활 등 비도덕적인 남녀 관계, 퇴폐풍조를 조장하는 남녀 관계, 선정적인 포옹이나 침실 장면, 정사 관계 묘사에서 옷을 차례로 벗어던지는 장면, 신음소리, 침구 등을 움직이는 간접적 정사 표현은 TV에 내보낼 수가 없다. 사회 질서나 공중도덕에 위배되는 내용에 있어서는 교통 법규 위반, 길거리에 담배꽁초를 버리는 장면, 침 뱉는 행위, 공중전화를 장시간 사용하는 행위도 규제된다. 사극의 경우 계도성이 없는 야사에 의거한 흥미 위주의 내용은 다룰 수가 없으며 당파 싸움, 궁중의 암투, 권모술수 등 부정적 측면의 묘사 등도 금지된다. 수사극에서도 살상 및 폭력 장면의 클로즈업, 총포의 난사, 칼 등을 사용한 난투장면도 내보낼 수 없고 윤락가 유흥 접객업소의 빈번한 무대 설정도 억제된다."
전두환 정권이 그렇게 미주알고주알 간섭하고 나섰으니, 드라마가 수난을 당하지 않을 재간이 없었다. KBS와 MBC의 충성 경쟁 속에서 방송가엔 이른바 '자율 정화' 바람이 불었다. MBC의 〈홍 변호사〉는 1980년대 드라마 수난의 첫 타자로 1980년 3월 방영을 시작했다가 8월 말 22회로 막을 내렸다. 〈홍 변호사〉는 왜 정권의 미움을 받았던 것일까? 오명환은 "이 작품은 '법과 인간' 관계를 골격으로 하여 법의 뒤안길에 묻힌 인간상과 법 해석에 희생된 사람들의 실상을 드라마로 들춰냄으로써 법치국가에서 있을 수 있는 법의 허실과 양면성을 묘사하려 했다."라면서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법률과 인간을, 검사와 변호사, 원고와 피고, 승소와 패소 등으로 교차되는 드라마의 전개는 자연히 양분법 형식을 띠면서 그 명암을 극명하게 갈라냈다. 타이틀 롤인 홍 변호사(박근형)의 동분서주 활약과 인간적인 배려가 두드러졌다. 그는 항상 피해자의 대변인 격이었고 억울한 사건의 구제자로 비쳐졌다. 반면에 검사 측은 비정하고 비인간적인 집단으로 묘사되었다. 이 상대적인 설정과 전개는 드라마 해석을 둘러싸고 논란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항상 변호인의 인간적 승리로 결말나는 것은 검사 측의 직업적 특성을 왜곡하는 것으로 전달될 수 있었다. ······ 장차 이 드라마는 법철학에 대한 불신에서 법질서의 훼손까지 우려되었다. 더구나 이 드라마는 픽션을 자처하지도 않았고 시청자 역시 픽션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쿠데타를 통해 헌법 질서를 파괴하며 권력을 장악한 정권이 법질서에 대한 훼손을 걱정해 드라마를 단두대에 세웠다는 게 어이없는 일이지만 그래도 〈홍 변호사〉는 〈홍길동〉에 비해선 행운아였다. 〈홍길동〉은 세상 구경도 못했던 데 비해 〈홍 변호사〉는 잠깐이나마 안방극장을 찾는 호사(?)를 누릴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방송사의 자율 정화라는 미명으로 인해 신봉승이 1970년대부터 구상한 〈홍길동〉을 접어야만 했던 것과 관련해 김연진은 다음과 같이 증언한다.
"서슬이 퍼런 5공 초기 때인지라 구렁이 담 넘어가듯 어름어름 넘어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우선 작가 신봉승 씨를 만났다. '선생님 쓰려고 구상을 잡아놓은 〈홍길동〉은 안 되고 부득이 다른 것으로 써주셔야 하겠습니다.', '다른 것으로 쓰라니 ······ 왜 〈홍길동〉 드라마가 안 된단 말이오?' '빤히 아시잖습니까. 지금 시국에 의적 홍길동 애기를 쓰면 정부가 좋아하겠습니까?' '무슨 말인지 ······ 알았소.' 신봉승은 아무 말 없이 다른 작품(대하드라마)을 내놓았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 ・ 「TV 드라마 호화 생활, 포옹 장면 사라진다」, 『동아일보』, 1980년 8월 30일, 5면.
- ・ 오명환, 『텔레비전 드라마 사회학』(나남출판, 1994), 321쪽.
- ・ 김연진, 『내 연출 내 젊음 35년: 김연진의 TV 비망록』(다인미디어, 2000), 197~198쪽.
글
출처
최초의 드라마사면서 드라마로 보는 사회문화사! 한국인은 왜 이토록 드라마를 사랑하는 것일까? 드라마 공화국, 대한민국 드라마의 역사를 말한다. 한 시대의 문화는 물론 ..펼쳐보기
전체목차
백과사전 본문 인쇄하기 레이어
[Daum백과] 드라마에 몰아친 자율 정화 바람 – 드라마, 한국을 말하다, 김환표, 인물과사상사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