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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미술
관 로댕의 예술혼을 느낄 수 있는 곳
로댕 미술관
Rodin Museum위치 | Benjamin Franklin Parkway at 22nd Street P.O. Box 7646, Philadelphia, PA 19101-764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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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관일 | 월요일 |
이용 시간 | 화~일요일(10:00~17:00) |
성찰의 시간을 갖게 하는 명상의 공간
필라델피아 미술관을 관람했다면 부속 미술관인 로댕 미술관도 반드시 둘러봐야 한다. 우선 로댕 미술관은 필라델피아 미술관과 가깝다. 여기에 미술관 주변에 단장된 공원은 아담하면서도 제법 운치가 있어 색다른 즐거움을 준다. 특히 미술관의 〈생각하는 사람〉 주변에 자리하고 있는 ‘명상의 연못’은 방문객들에게 성찰의 시간을 준다. 미술관에 들어선 이상 잠시나마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되라는 무언의 메세지 같다.
필라델피아의 로댕 미술관은 파리의 로댕 미술관(Musée Auguste Rodin)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규모가 크다. 필라델피아 미술관에 비해 지명도는 한참 떨어지지만, 매년 전 세계에서 약 6만여 명이 미술관을 찾는다. 최근 10여 년 동안 필라델피아의 중심가인 벤저민 프랭클린 파크웨이가 변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로댕의 정원은 이런 세속의 번잡함을 뒤로한 채 명상의 공간으로 남아 있다.
로댕 미술관은 수많은 영화관을 소유한 ‘극장 재벌’ 줄리스 마스트바움에 의해 세상에 선을 보였다. 영화관 체인 사업으로 막대한 부를 일군 마스트바움은 오래전부터 재산의 일부를 필라델피아 시에 내놓을 생각을 했다. 필라델피아 시민들 덕분에 사업이 번창할 수 있었던 만큼, 시민들의 삶을 풍요롭게 해야 한다는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염두에 두었던 것이다. 오랜 궁리 끝에 생각해낸 게 미술관이었다.
하지만 어떤 미술관을 세워야 하는가라는 또 다른 고민이 생겼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필라델피아 미술관은 그에게 불면의 밤을 보내게 했다.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하지만 필라델피아 미술관을 뛰어넘는 컬렉션과 건물을 짓기란 역부족이었기 때문이다. 규모는 작지만 색깔 있는 미술관을 세우고 싶었던 그는 평소 좋아하던 조각가 로댕을 위한 미술관을 구상하기에 이르렀다.
마스트바움은 1923년부터 본격적으로 로댕의 작품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3년 뒤에는 직접 파리로 건너가 청동 조각품을 비롯해 석고, 드로잉, 판화, 편지, 서적 등 방대한 양의 로댕 분신들을 손에 넣었다. 마스트바움은 1926년 프랑스 건축가 폴 크레와 자크 그레버에게 미술관과 정원 설계를 의뢰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마스트바움은 그의 오랜 꿈인 미술관을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떠났다. 이에 마스트바움의 부인이 그의 유지를 받들어 로댕 미술관을 필라델피아 시에 기증했다. 마침내 1929년 11월 29일, 로댕 미술관은 필라델피아 시민들의 품에 안겼다.
‘명상의 연못’에서 나를 찾다
로댕 미술관에 들어서면 정원에 조성되어 있는 〈생각하는 사람〉이 가장 먼저 방문객을 맞는다. 정문 앞 푸른 나무 사이에 햇빛을 받으며 상념에 잠겨 있는 〈생각하는 사람〉을 지나면 미술관의 그림자가 길게 드리워지도록 설계된 ‘명상의 연못’에 발길이 닿는다. 소박한 연못에서 로댕의 〈생각하는 사람〉이 되어 잠시나마 자신을 둘러보는 것은 미술관이 주는 색다른 선물이다.
정원을 지나 미술관으로 들어서려고 하면 이번엔 〈지옥의 문〉이 반긴다. 하지만 방문객들은 ‘아! 지금부터 로댕의 예술 세계로 들어가는구나’하는 설렘이 밀려온다. 지옥의 문이 아니라 로댕을 만날 수 있는 ‘천국의 문’인 것이다.
미술관 내부는 여느 대형 미술관과 달리 소박하면서도 아늑한 느낌을 준다. 중앙의 거대한 홀과 4개의 방으로 이루어진 석조 건물 안에는 〈칼레의 시민〉, 〈청동시대〉, 〈영원한 청춘〉 등 로댕의 작품이 가득하다. 갤러리의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자연 채광과 계절의 변화를 느낄 수 있는 정원 풍경은 로댕 미술관만의 전유물이다.
로댕 미술관은 세계에서 가장 인기가 많은 〈생각하는 사람〉, 칼레 시민들의 역사적 항쟁을 웅장하고 감동적인 터치로 재현한 〈칼레의 시민〉, 인간의 사랑을 강렬하게 묘사한 〈영원한 청춘〉 그리고 로댕이 1880년부터 1917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매달린 필생의 역작 〈지옥의 문〉 등 124점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로댕 하면 떠오를 정도로 유명한 〈생각하는 사람〉은 근대 계몽주의 철학을 개척한 데카르트의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라는 철학적 명제를 시각적으로 구현한 작품이다.
높이 6미터가 넘는 〈지옥의 문〉은 로댕의 예술 세계를 집대성한 대작이다. 1880년 프랑스 정부는 새로 건립하기로 한 장식미술관의 출입문을 로댕에게 의뢰했다. 로댕은 단테의 《신곡》 중 〈지옥〉편을 주제로 〈지옥의 문〉을 제작했다. 〈지옥의 문〉은 하나의 조각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수많은 조각상이 합쳐진 거대한 작품인데, 〈생각하는 사람〉도 그 중 하나의 독립된 조각상이다.
이 작품을 위해 로댕은 1880년부터 약 37년 동안 100개의 형상을 만들었다. 로댕 미술관의 〈지옥의 문〉은 처음 만든 3개의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나머지 작품들은 이후에 제작됐다. 〈생각하는 사람〉을 포함한 그의 대표작들은 실제로 〈지옥의 문〉을 제작하다가 영감을 얻어 만든 것들이다. 〈키스〉, 〈영원한 봄〉, 〈청동시대〉, 〈다나이드〉 그리고 칼레 시의 요청을 받아 제작한 기념비 〈칼레의 시민〉 등이 전시돼 있다.
로댕은 스캔들 메이커
프랑스 출신의 오귀스트 로댕은 근대 조각의 창시자이다. 19세기 후반 전통적인 아카데미 조각에서 추구하는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거부하고, 인간 내면의 진실을 표현하는 데 집중했다. 역동성과 긴장감이 가득 찬 작품들을 탄생시킨 로댕은 고대 그리스의 피디아스, 르네상스 시대의 미켈란젤로와 함께 조각사의 한 줄기를 이루었다.
하지만 로댕의 초년은 순탄치 않았다. 하급 관리의 아들로 파리에서 태어난 로댕은 14세에 국립공예실기학교에 들어가 조각가로서의 기초를 닦았지만, 그 뒤 국립미술전문학교에 세 번이나 내리 낙방하는 바람에 허드렛 일로 생계를 이어갔다. 1870년부터 1871년 사이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참전하고 제대한 그는 브뤼셀로 건너가 〈청동시대〉를 제작했는데, 이 작품이 로댕 예술의 출발점이 되었다.
로댕만큼 스캔들이 많았던 작가도 드물다. 영화로도 제작된 카미유 클로델과의 스캔들부터 〈청동시대〉, 〈발자크 기념상〉 등 그의 손에서 탄생한 작품들 상당수가 논란에 휩싸였다. 그의 데뷔작이자 현대 조각의 효시로 평가받고 있는 〈청동시대〉가 ‘스캔들 메이커’의 시작이었다. 1864년 살롱전에 처음으로 〈코가 뭉그러진 사나이〉를 출품했으나 생생한 사실적 묘사가 심사위원들에게 거부감을 주는 바람에 낙선했다.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1877년 로댕은 프랑스에서 가장 규모가 큰 살롱전에 〈청동시대〉를 출품했다. 사실적 인체 표현이 특징인 〈청동시대〉는 로댕의 세밀한 관찰력과 천재적인 표현력이 빚어낸 걸작이었다. 마치 살아 있는 모델을 앞에 세워놓은 것처럼 생동감이 넘쳤다. 실제로 이 작품은 1875년에 군대 장교인 친구로부터 골격과 근육이 잘 발달된 군인을 모델로 소개받아 만들었다. 하지만 너무 사실적인 표현이 또 문제가 되었다. 이번엔 거부감이 아니라 불신 때문이다. 모든 심사위원이 “살아 있는 모델에서 직접 석고형을 뜬 것이 아닌가” 하며 전시를 거절한 것이다. 〈청동시대〉는 로댕 예술의 출발점이자 그의 사실적 표현의 완성을 보여주는 걸작으로 꼽힌다. 1880년 살롱전에서 3등상을 받았고 프랑스 정부에 팔렸다. 그 뒤 로댕의 예술은 〈청동시대〉의 사실적 박진감에다 내면적 깊이를 더하면서 〈지옥의 문〉, 〈생각하는 사람〉, 〈아담과 이브〉, 〈칼레의 시민〉 등 걸작들을 탄생시켰다.
너무나 인간적인 〈칼레의 시민〉
〈칼레의 시민〉 역시 논란으로 맘고생이 심했던 작품이다. 이는 14세기 영국과 프랑스 사이의 백년전쟁 당시 프랑스 칼레 시를 구한 영웅적 시민들의 기념상이다. 1347년 에드워드 3세가 이끄는 영국군이 북부 프랑스의 항구 도시 칼레를 점령한 뒤 시민들을 가두고 학살하기 시작했다. 오랫동안 거세게 저항했다는 이유로 인정사정없는 보복이 이루어진 것이다. 영국군의 분풀이가 끝날 때까지 기다렸다가는 칼레 시민 한 사람도 남지 않을 상황이었다.
도시 전체가 불타고 칼레의 시민이 학살되는 운명을 면하기 위해 칼레 시는 영국 왕 에드워드 3세에게 선처를 호소했다. 처음엔 거센 저항으로 영국군에 맞선 칼레 시민들에게 본때를 보여주기 위해 완강한 태도를 보이던 에드워드 3세는 자비를 베푸는 조건으로 6명의 목숨을 내놓으라고 말했다. 시장을 비롯한 시민 대표 6명이 칼레 시를 구하기 위하여 교수형을 각오하고 스스로 목에 밧줄을 감고 에드워드 3세 앞으로 출두했다. 에드워드 3세는 이들의 용기 있는 희생정신에 감복해 모두 사면하였고, 칼레 시는 위기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칼레 시민 6명의 비장한 행동은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교훈을 남겨주었다.
1884년 칼레 시는 이들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한 기념상 제작을 로댕에게 의뢰하였다. 그러나 로댕이 완성한 조각은 사람들이 기대한 것과 같은 애국적 영웅의 늠름한 모습이 아니었다. 초인적인 영웅이라기보다는 죽음에 대한 공포로 가득찬, 너무나 인간적인 모습이었던 것이다. 칼레 시민들의 불만과 비난이 쏟아졌음은 물론이다. 〈칼레의 시민〉은 12개로 복제 되어 필라델피아, 서울 등 세계 12곳의 도시에 전시돼 있다.
이외에도 로댕 미술관에서는 거장의 예술혼을 느낄 수 있는 〈아담〉과 〈망령〉, 〈지옥의 문〉을 부조로 만든 작품, 〈발자크〉, 〈우는 소녀〉, 〈빅토르 위고〉, 〈젊은 우승자〉, 〈시인과 사랑〉 등을 만날 수 있다.
초년의 숱한 고난과 궁핍을 견뎌온 로댕의 말년은 비교적 화려했다. 1903년에는 최고의 명예인 레종 도뇌르 훈장을 받았으며 1905년에는 예나 대학, 1906년에는 글래스고 대학, 1907년에는 옥스퍼드 대학에서 명예 박사학위를 받은 것이다. 게다가 자신의 미술관까지 갖게 됐다. 그것도 프랑스뿐 아니라 멀리 미국 필라델피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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