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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미술
관 ‘미국의 3대’ 개인 미술관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미술관
Isabella Stewart Gardner Museum위치 | 280 The Fenway Boston, MA 021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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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관일 | 매주 월요일 |
이용 시간 | 화~일요일(11:00~17:00) |
가드너 여사의 정열적인 삶이 잉태한 신비의 공간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미술관을 알게 된 건 순전히 웬디 수녀의 《미국 미술관 기행》을 통해서였다. 웬디 수녀는 그 책에서 가드너 미술관을 직접적으로 다루지 않았지만, 서문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미술관이라고 언급했다. 그 이후로 웬디 수녀가 좋아하는 가드너 미술관은 어떤 곳일지 궁금했다.
가드너 미술관은 보스턴 미술관에서 펜웨이 방향으로 5분 정도의 거리에 위치한다. 미국 미술관을 둘러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공통적으로 느끼는 것 중의 하나가 피로감일 것이다. 장시간 걸어서 관람해야 하는 탓에 또다시 5분 정도의 거리를 걸어야 한다는 게 버거울 수 있었지만, 신비의 미술관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 가벼웠다.
가드너 여사의 개인적 절망감이 미술관을 잉태하다
우선 가드너 미술관은 이탈리아 베니스 궁전을 연상케 하는 중후한 분위기가 압권이다. 이 미술관은 워싱턴 D.C.의 필립스 컬렉션, 뉴욕의 프릭 컬렉션과 더불어 ‘미국의 3대 개인 미술관’으로 불린다. 회색 톤의 미술관은 웅장함과는 다소 거리가 있긴 하나 고고한 자태는 사뭇 위압적이다.
뭐니 뭐니 해도 가드너 미술관의 진가는 미술관 내부에 있다. 미술관에 들어서면 마치 수도원에 발을 들여놓은 듯한 착각에 빠진다. 중세 시대의 건축 자재로 지어진 고풍스러운 건물 내부와 어두컴컴한 조명 때문이다. 설립자인 가드너 여사가 생활했던 당시와 비슷한 분위기를 내기 위해 일부러 실내조명을 낮춘 것이다.
가드너 미술관의 매력은 바로 이 ‘정적인 공간’에 있다. 4층 건물인 미술관은 직각 형태로 건물 중앙에 안뜰이 조성돼 있는 독특한 구조이다. 관람객은 모든 갤러리에서 창문을 통해 안뜰을 볼 수 있고, 전시장으로 연결되는 복도(회랑)는 안뜰의 화려한 정원과 맞닿아 있다. 안뜰에 둘러싸인 기둥들은 이 미술관이 자랑하는 가장 뛰어난 ‘작품’ 가운데 하나이다.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방문객들은 직접 안뜰로 들어갈 수 없고 오로지 눈으로만 아름다움을 즐겨야 한다.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는 다른 사람들의 삶을 무기력하고 볼품없게 할 정도로 현실에 안주하지 않고 정열적인 삶을 살았다. 그녀는 내가 아는 유일하고 가장 뛰어난 군주였다.”
르네상스 미술의 권위자 버나드 버렌슨은 가드너 여사를 이렇게 회고했다. 버렌슨은 가드너 여사의 오랜 친구이자 미술 조언자로서 가드너 미술관의 컬렉션에 큰 영향을 미쳤다.
가드너 여사는 1840년 보스턴의 부호이자 영국 스튜어트 가문의 혈통을 이어받은 존 스튜어트의 딸로 태어났다. 그녀는 엄격한 가정교육을 받고 16세에 파리로 건너가 그곳에서 2년을 지냈다. 파리에서의 생활이 훗날 미술관을 잉태한 밑거름이 됐다.
가드너 여사의 남편 존 잭 가드너는 여성 예술가들을 후원한, 보스턴의 큰 손이었다. 부창부수라고 했던가. 가드너 여사 역시 예술가들을 가까이 했다. 보스턴에서 ‘미시즈 잭(Mrs. Jack)’이라고 하면 모르는 사람이 없었다. 사교계에서 명성을 얻은 가드너 여사는 당시 존 싱어 사전트, 제임스 맥닐 휘슬러, 헨리 제임스 같은 예술가들을 후원하며 친분을 쌓았다. 30여 년 동안 세계여행을 하면서 버렌슨으로부터 조언을 받은 가드너 여사는 뛰어난 미술품을 보유하기에 이르렀다.
가드너 여사는 1891년 아버지로부터 막대한 유산을 받은 뒤부터 본격적으로 미술품을 수집하기 시작했다. 1892년 파리의 한 옥션에서 손에 넣은 페르메이르의 〈세 사람의 연주회〉는 그녀의 첫 번째 컬렉션이다. 2년 뒤인 1894년 버렌슨은 가드너 여사에게 보티첼리의 작품을 구입하도록 권유하는 등 약 70여 점의 컬렉팅에 자문 역할을 했다.
가드너 여사가 미술관을 건립한 배경에는 개인적 아픔이 있다. 유일한 혈육이었던 아들이 병으로 사망한 데다 더 이상 아기를 가질 수 없다는 절망감으로 가드너 여사는 한동안 극심한 우울증을 겪었다. 그녀를 절망의 나락에서 구해준 건 여행이었다. 남편의 권유로 세계여행에 오른 가드너 여사는 유럽, 아프리카, 아시아 등을 돌아다녔다. 당시 가드너 여사는 이탈리아 미술과 건축 등에 큰 인상을 받았다. 특히 베니스와 고대 유물에 관심이 많았다. 이때의 경험이 훗날 미술관 설계에 많이 반영되었다.
보스턴에 돌아온 가드너는 당시 유명 건축가인 윌리어드 T. 시어스를 고용, 1903년 자신의 이름을 딴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미술관을 건립했다. 유럽 전역을 여행하면서 수집한 고대 건축의 잔해들을 미술관 건립에 사용하도록 했다. 이탈리아 맨션 전문가들이 동원되어 시어스가 설계한 이탈리아풍의 궁전을 지었다.
1903년 1월 1일 저녁, 가드너 미술관은 역사적인 개관식을 가졌다. 개관 기념식에 초대받은 보스턴 지역의 유명 인사들은 바흐, 모차르트, 슈만 등의 음악과 함께 안뜰을 가득 메운 싱그러운 나무와 화려한 꽃 그리고 수준 높은 미술품에 푹 빠졌다.
스페인 무희, 가드너 여사를 홀리다
오늘날에도 가드너 미술관은 100여 년 전 보스턴 사람들이 느꼈을 경이로움에 푹 빠지게 한다. 가드너 미술관의 컬렉션은 가드너 여사가 세상을 떠난 1924년 그때 그대로이다. 전시장의 디스플레이도 80여 년 전의 시간에 멈춰 있다. 그렇다고 정체되어 있다는 의미는 아니다. 미술관을 찾은 방문객들은 계절이 바뀔 때마다 새롭게 피는 꽃들로 가득 찬 새로운 정원을 만나게 되기 때문이다.
미술관의 1~3층은 갤러리, 4층은 가드너 여사의 유품이 전시된 방과 사무실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비록 규모는 작지만 뛰어난 회화와 조각, 가구, 섬유, 도자기, 판화, 드로잉, 희귀 도서, 보석, 일본 병풍에 이르는 2,500여 점의 컬렉션을 소장하고 있다. 19세기 미술 작품 가운데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회화뿐 아니라 존 싱어 사전트의 〈가드너 여사의 초상화〉와 〈엘 잘레오〉, 제임스 맥닐 휘슬러의 〈파란색과 은색의 조화〉 등의 걸작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이 가운데 존 싱어 사전트의 〈엘 잘레오〉는 단연 돋보인다. 이 작품으로 가드너 여사는 존 싱어 사전트의 열렬한 팬이 되었다. 정열적인 스페인 무희의 몸짓이 마치 자석처럼 관람객을 화면 속으로 끌어들인다. 1914년 조카인 토머스 제퍼슨 쿨리지로부터 이 작품을 선물받은 가드너 여사는 미술관의 구조를 바꿨다. 이 그림을 사람들 눈에 잘 띄는 곳에 걸어두기 위해 1층에 스페인 클로이스터(회랑)를 지은 것이다. 〈엘 잘레오〉에 대한 그녀의 애정이 어느 정도였는지 알 수 있다. 아치 형태의 1층 복도 정면에 자리 잡고 있는 이 그림을 보기 위해 수만 명의 관광객이 성지 순례를 하듯 가드너 미술관을 찾는다.
작품의 명제인 ‘엘 잘레오(El Jaleo)’는 절정의 순간에 절로 터져나오는 감탄사이다. 스페인의 투우 경기에서 흔히 들을 수 있는 ‘올레(ole)’와 같다. 스페인 무희는 무대의 중심에서 약간 오른쪽으로 기울어져 있기 때문에 그녀의 옆모습만 화면에서 볼 수 있다. 뒤로 치우쳐 있는 몸의 중심을 잡기 위해 정면으로 내뻗은 그녀의 왼팔에 잔뜩 힘이 들어가 있다. 그녀 뒤에는 다른 무희들과 연주자들이 일렬로 앉아 있지만 시선은 제각각이다.
대부분의 무희와 연주자의 발은 어둠 속에 갇혀 있으며, 연주자들의 얼굴은 모자의 챙에 가려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는 무대의 바닥에서 빛을 비추고 있는 듯한 조명 효과를 준다. 특히 오른쪽 무대 위의 무희를 비롯한 모든 사람이 노래를 부르거나 팔을 휘젓는가 하면, 소리를 지르고 박수를 치면서 절정의 순간을 한껏 표현하고 있다.
그림은 전체적으로 어두운 톤이다. 때문에 자칫 무거워 보일 수 있지만 화면 오른쪽 두 소녀가 입고 있는 빨강색과 오렌지색의 의상이 이 같은 느낌을 날려버린다. 금속 하이힐로 무대를 누비는 무희의 열정이 두 소녀의 화려한 의상과 오버랩된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연주자와 무희, 관객이 하나가 되는 절정의 순간을 표현하기 위해 오른쪽 맨 끝에 화사한 의상을 입은 두 소녀를 배치시켜놓은 듯하다. 마치 포인트를 준 것처럼 말이다. 어디선가 흥겨운 플라멩코의 선율과 시끌벅적한 노랫소리, 흥에 겨워 내지르는 소녀들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하다.
문득 이 그림이 가드너 여사의 마음을 훔친 매력이 무엇일까 궁금해졌다. 모두가 잠든 밤, 적막한 저택에 홀로 깨어 그림 앞에 서 있는 가드너 여사의 모습이 떠올랐다. 혹시 가드너 여사의 마음 한 구석에 자유로운 영혼과 주체할 수 없는 열정을 지닌 스페인 무희가 되고 싶은 바람이 있었던 건 아닐까.
세상에 내놓을 수 없었던 〈가드너 여사의 초상화〉
존 싱어 사전트의 〈가드너 여사의 초상화〉 역시 미술관의 자랑이다. 1886년 영국을 여행 중이던 가드너 여사는 지인인 소설가 헨리 제임스로부터 사전트를 소개받았다. 2년 뒤 그녀는 사전트를 보스턴으로 초청해 자신의 초상화를 그려 달라고 부탁했다. 하지만 에너지가 넘쳐 잠시도 가만히 앉아 있지 않은 가드너 여사는 사전트의 애를 무던히도 태웠다. 자신의 저택 창문 밖으로 보이는 강가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수시로 일어나 살피는 바람에 작업을 자주 중단해야 했던 것이다. 이 때문에 사전트는 8번의 실패 끝에 가드너 여사의 초상화를 완성할 수 있었다.
다행히도 가드너 여사는 자신의 초상화에 만족했다. 사전트가 그린 그 어떤 여인의 초상화보다 뛰어난 작품이라고 추켜세웠다. 특히 초상화를 실제 모습으로 그리기보다는 예술적 분위기를 담아내는 사전트의 재능에 감탄했다. 그녀의 초상화는 종종 화려한 의상을 입은 〈마담 폴 포어슨의 초상화〉와 도발적인 검은 드레스가 인상적인 〈마담 X의 초상화〉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긴다. 그러나 가드너 여사의 초상화는 이들에게서 찾아보기 힘든 원숙미가 전해진다. 이는 당시 46세였던 가드너 여사가 여러 개인적인 아픔을 극복하고 마음의 평화를 얻어 여인으로서 절정의 기품을 자랑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초상화의 배경으로 쓰인 15세기 벨벳 직물은 당시 그녀가 소장했던 것으로 현재도 미술관에 남아 있다. 그러나 사전트는 이 직물을 원래의 디자인 크기보다 3배나 크게 확대해 그렸다. 이를 본 헨리 제임스는 “마치 비잔틴의 성모마리아 같다”고 말했다. 실제로 이 그림을 보면 거대한 문양이 가드너 여사의 머리 뒤에서 빛을 비추는 듯한 후광 효과가 느껴진다.
이 초상화가 보스턴의 세인트 보톨프 클럽에 전시되자 여기저기서 수군거렸다. 쇄골이 다 드러나 보이는 데다 하늘거리는 드레스 때문이다. 이에 가드너 여사의 남편은 자신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이 작품을 절대로 공개된 장소에서 전시하지 말라고 말했다. 남편의 의사를 존중한 가드너 여사는 사전트가 자신의 전시회에 출품해 달라고 여러 번 부탁했음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떠날 때까지 거절했다. 이 초상화를 누구보다도 마음에 들어 했으면서도 말이다.
미국 미술관으로는 처음으로 마티스를 품에 안다
가드너 미술관은 미국 미술관으로서는 처음으로 마티스의 작품을 소장한 곳으로도 유명하다. 1911년 소장자인 토머스 휘트모어로부터 임대해 미술관에 전시한 〈생 트로페즈의 테라스〉는 마티스의 작품으로는 미국에서 처음 전시한 작품이다. 이후 1922년 휘트모어가 가드너 미술관에 기증하면서 미국 미술관 최초로 마티스를 품에 안은 영예를 얻었다.
쇠라와 함께 신인상주의를 이끈 점묘주의 화가 폴 시냐크는 1892년 자신의 요트 올림피아를 타고 항해하던 중 프랑스의 작은 어촌 생 트로페즈에 닿았다. 지중해 특유의 아름다운 풍광에 매료된 그는 당장 집을 구한 뒤 ‘뱃머리’라는 뜻의 ‘La Hune’이라는 스튜디오를 오픈했다. 그러고는 친구들인 마티스, 드랭, 크로스, 마르케 등 이른바 야수파 화가들을 스튜디오에 초대했다. 이후 생 트로페즈는 20세기 아방가르드 미술의 근거지가 되었다.
시냐크의 초대로 생 트로페즈에 발을 들여놓은 마티스는 지중해에 깊은 인상을 받아 이를 배경으로 한 작품들을 그렸다. 〈생 트로페즈의 테라스〉가 그 중 하나이다. 미술관 1층 노란색 방에 전시된 〈생 트로페즈의 테라스〉는 누구나 금방 마티스의 작품임을 알 수 있게 한다. 주변의 다른 작품과 달리 상당히 튀는 그림이다. 그도 그럴 것이 다른 작품들이 색이 바란듯한 느낌을 주는 반면, 마티스의 그림은 화려하고 밝고 선명한 색상을 자랑하기 때문이다.
따스한 햇볕이 드는 테라스는 보는 사람의 마음을 그림 속으로 끌어들인다. 오른쪽에는 밝은 터키 옥색의 문이 나 있는 흰 벽이자리하고 있으며, 왼쪽과 정면에는 다양한 식물들이 배치돼 싱그러운 느낌을 준다. 테라스의 마루에서 햇볕을 받으며 졸고 있는 휴양객의 모습이 평화롭기 그지없다.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지상의 낙원이 바로 이런 곳이 아닐까 싶다.
세기의 도난 사건
가드너 미술관이 일약 전 세계에 이름을 알리게 된 계기는 미술품 도난 사건 때문이다. 1990년 5월 18일, 경찰복 차림을 한 두 명의 절도범이 미술관에 침입해 페르메이르의 〈세 사람의 연주회〉와 렘브란트의 작품 3점 그리고 마네와 드가의 작품, 프랑스와 중국의 예술품 등 총 13점(추정가액 약 5억 달러)을 훔치는 사건이 일어났다. 이 사건은 미술품 도난 사상 최대 규모이다.
렘브란트의 그림 3점 가운데 〈갈릴리 바다의 폭풍우〉는 바다를 배경으로 그린 작품으로는 유일하다. 그리스도와 그의 제자들을 태운 배가 갈릴리 바다를 건널 때 갑작스레 폭풍우를 만나 큰 파도에 휩싸인다는 격렬한 풍경을 그린 것이다. 도둑은 벽에서 액자를 떼어내어 바닥에 놓은 뒤 액자 안쪽에 커터나이프와 같은 날카로운 칼을 찔러 넣어 그림을 뜯어내는 수법으로 2점의 그림을 훔쳐갔다. 현장에는 뜯어냈을 때 떨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안료의 파편이 남아 있었다고 한다.
미술관은 지금도 가드너 여사의 유언에 따라 도난 전 그림이 내걸렸던 갤러리에 그림이 없는 액자를 전시하고 있다. 이 사건으로 가드너 미술관은 일약 신비의 미술관으로 인식되었으며, 많은 관람객이 찾았다.
비록 가드너 여사가 자신이 생존했던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라는 유언을 했지만, 가드너 미술관은 정기적으로 전시회를 열어 관람객들을 불러 모았다. 미술관은 가드너 여사의 공로를 기리기 위해 이사벨라라는 이름을 지닌 방문객들에게는 무료 입장과 특별 행사도 제공한다.
이처럼 가드너 미술관은 수도원을 연상케 하는 정적인 공간일 뿐 아니라 약 100여 년 전의 옛 모습을 그대로 갖추고 있어 관람객들에게 색다른 경험을 선사한다. 마치 미술관의 안주인 가드너 여사와 시공간을 뛰어넘어 교감을 나누고 온 듯한 착각 말이다. 아마도 이것이 웬디 수녀의 마음을 훔친 비결이 아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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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관은 다른나라의 역사와 정치, 문화를 들여다 볼 수 있다고 한다. 현대 문화예술의 메카인 미국 전역에 있는 미술관 27곳의 탄생 배경과 전통, 변천 과정, 건축 구..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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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이사벨라 스튜어트 가드너 미술관 – 처음 만나는 미국 미술관, 박진현, 예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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