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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세기 건축

페로와 세르반도니

18세기 신고전주의의 문을 연 것은 프랑스다. 이미 바로크 때부터 클로드 페로(Claude Perrault)의 루브르 동익랑(East Wing, Louvre. 1667~70)에서 징후가 싹텄으며 18세기 초반부에 이것을 토대로 새 시대에 맞는 보편적 고전주의 형식을 찾는 국제적 신고전주의로 발전했다.

이후 곧 프랑스다운 신고전주의를 찾는 운동으로 이어졌으며 18세기 중반 이후에는 건축가들의 자유로운 창작이 개입하면서 급진적 신고전주의와 낭만적 신고전주의로 급변을 거듭했다. 대미는 혁명기 신고전주의가 장식했다.

루브르 동익랑에 나타난 18세기 신고전주의의 징조는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건물 전면을 덮는 독립 원형 기둥으로, 벽체가 기본 구조인 바로크건축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장면이었다(도 8-1). 양식은 로마 코린트식이고 쌍기둥으로 처리한 점도 역시 로마식이지만 열주 효과 자체는 그리스 고전주의의 기본 정신을 부활한 것이었다.

도 8-1 루브르 동익랑

클로드 페로 ・ 루이 르보 ・ 샤를 르브룅, 파리, 1667-70.

ⓒ 임석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다른 하나는 건물의 중앙과 양 측동으로 장식을 억제한 대신 고전 어휘의 고고학적 정확성에 치중한 점이다. 벽체 구조와 신전 박공으로 구성된 로마 고전주의의 표준 형식을 부활시켰다. 이것 역시 부재 변형이 심한 바로크 고전주의에 반대되는 처리로 고고학의 발전 및 이에 따른 발굴 붐의 영향을 반영한 경향이다. 이런 점에서 이 건물은 고고학적 신고전주의의 시작을 알린 것으로 볼 수 있다.

바로크 건물로 보기에는 파격적인 특징인데, 둘을 합해서 보면 바로크 비정형주의를 거부하면서 고전주의의 기본 구성을 원본에 충실하게 따르자는 의도였다. 페로 개인 차원에서 보면 과학자 겸 수학자였던 경력이 반영된 새로운 시각이었다.

당시 진행 중이던 과학혁명의 영향이 건축에 나타난 대표적 예며, 이런 점에서 계몽주의 건축의 문을 연 건물로 평가할 수 있다. 더 넓게 보면, 기본에 충실한 불편부당함이 갖는 보편성의 힘이 새 시대를 이끌어가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민족과 지역의 차이를 초월해서 서구 문명 전체에 적용할 수 있다는 뜻에서 '국제적 신고전주의'라 부를 수 있다.

베르사유 확장 공사를 시작도 하기 전에 등장한 건물로서는 혁명적 주장을 한 것인데, 시대를 너무 앞서서 그랬는지 한동안 큰 주목을 끌지 못하다가 반세기 이상 지나서 조반니 니콜라노 제로니모 세르반도니(Giovanni Nicolano Geronimo Servandoni, 1695~1766)의 생쉴피스(St. Sulpice, 1733~45)로 이어지며 18세기 국제적 신고전주의로 정착했다. 처음에는 당시 유행한 양식인 로코코로 설계되어 있었는데 다시 현장 설계에 나온 것을 세르반도니가 완전히 다른 안으로 응모해서 당선되었다.

파사드는 중앙부와 양측면의 첨탑으로 3등분 구성을 했다. 중앙부는 5베이를 갖는 열주만으로 이루어졌다(도 8-2). 열주는 2층으로 중첩시켰다. 첨탑을 받치는 몸체는 개선 아치를 단순화한 벽체 구조로 형성했다. 신전 파사드를 노린 것이었지만 박공은 두지 않았다. 열주와 출입문 사이에 통로를 두면서 열주는 스크린처럼 느껴졌다. 지붕에서 박공을 없애고 평지붕으로 처리했기 때문에 열주의 스크린 효과는 더 강하게 나타났다.

도 8-2 생쉴피스

조반니 니콜라노 제로니모 세르반도니, 파리, 173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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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처리는 루브르 동익랑과 매우 비슷했다. 강한 수평선이 있는 점과 양옆의 첨탑 부분을 벽체 구조로 처리한 점도 동익랑을 닮았다. 이 부분은 첨탑을 받치기 위한 구조적 목적을 가졌지만 양식적 관점에서 보면 로마 건축과의 혼용을 위한 것이었다. 그리스건축의 열주만으로 구성할 경우 로마와의 연계 전통이 강했던 프랑스에서는 받아들이기 어려웠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생쉴피스의 열주 파사드는 건물과 가로변의 관계가 18세기 들어 바뀌었음을 보여준다. 바로크 파사드는 가로변에 직각 방향으로 서 있는 높은 수직 벽 개념으로 정의되었는데 이는 가로와의 단절을 가져왔다. 18세기 열주 파사드는 이와 반대로 가로와 건물의 연속성을 추구했다. 열주 파사드는 단절과 통과의 중간 상태인 반투명으로 볼 수 있다. 가로에서의 이동은 반투명 스크린을 통과해 실내로 이어졌다(도 8-3).

도 8-3 생쉴피스

조반니 니콜라노 제로니모 세르반도니, 파리, 1733-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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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석재 집필자 소개

서울공대 건축학과를 졸업한 뒤 미국 미시간대학교에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펜실베이니아대학교에서 프랑스 계몽주의 건축에 관한 연구로 건축학 박사학위를 받았다. 그는 건축을 소재로 동서고금을 넘나드는..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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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읽는 임석재의 서양건축사
한 권으로 읽는 임석재의 서양건축사 | 저자임석재 도서 소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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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I 바로크건축 1. 바로크건축의 성립과 초기 바로크 2. 성기 바로크 3. 후기 바로크 4. 프랑스 바로크건축 5. 영국 바로크 6. 중부 유럽 바로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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