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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임석재
의 서... 로마 건축
헬레니즘의 영향 ・ 실용주의
알렉산드로스대왕이 동방으로 진출한 덕에 로마는 그 침범을 비껴가며 그 시기에 이탈리아반도 통일 운동에 전념할 수 있었다. 이후 포에니전쟁을 승리로 이끌면서 지중해 패권을 재패했고, 이어 마케도니아왕국도 로마 속주로 귀속할 수 있었다.
이때가 기원전 146년이었는데 이 사건은 로마의 운명을 많이 바꿔놓았다. 동방의 발달한 헬레니즘 고전주의 문화를 자신들의 영토 안으로 직접 손에 넣게 된 것이다. 본바닥을 점령했으니 질과 양 모두에서 이탈리아에 있던 그리스 식민지 문화와는 비교가 안 되는 헬레니즘 고전주의의 정수를 접한 것이다.
이를 본 로마인들은 잠자고 있던 욕망이 타오르기 시작했고 이때부터 그리스 고전주의가 대거 이탈리아로 유입된다(도 2-2). 금은보화와 각종 예술품들을 약탈했고 건물의 일부를 떼어서 이탈리아로 가지고 오는 것을 비롯해서 다수의 장인들도 데려왔는데 이것이 로마 건축의 중요한 출발점을 이루게 된다.
당시까지 로마는 전쟁 및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농업에만 전념하면서 튼튼한 구조물을 짓는 토목 기술에서는 큰 발전을 이루고 있었지만 섬세한 예술 양식으로서 건축은 거의 전무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최고의 완성 상태를 보여주는 뛰어난 예술 양식인 그리스 고전주의가 로마로 유입되면서 로마 사회도 비로소 예술 사조로서 건축을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 실제로 기원전 2세기에 로마 사회에는 완성도 높은 오더 양식을 갖춘 신전이 중간 형성기 없이 하루아침에 등장하게 되는데 이것이 그리스건축을 수입하면서 나타난 현상이었다.
다른 하나는 로마만의 건축 전통으로, 구조 기술을 중심으로 한 실용주의가 주를 이룬다(도 2-3). 인류의 모든 역사가 전쟁을 중심으로 발전, 진행되었지만 로마는 유독 전쟁을 많이 치른 문명이었다. 수많은 전쟁을 승리로 이끌며 처음에는 이탈리아반도를 통일하고 점차 지중해 일대를 재패했으며 나중에는 유럽 대륙과 오리엔트 일부까지 점령했는데, 이를 뒷받침할 기술이 절대적으로 중요했다. 이때 기술은 일차적으로 첨단 기술을 의미했지만 반드시 첨단 기술일 필요는 없었다. 기술을 대단위로 운용하면서 전쟁이 집중될 수 있는 합목적적 합리성과 조직력도 중요한 요소였다(도 2-4).
- 1도 2-3 포르티쿠스 에밀리아(Porticus Aemilia)
로마, 기원전 193년.
- 2도 2-4 페루자 도시 성벽
페루자, 이탈리아, 기원전 2세기.
로마는 이 두 가지 기술을 모두 갖췄는데 그 중심에 건축과 농업이 있었다. 로마의 군사기술은 상당 부분 건축술과 농업기술을 활용한 것이었는데 특히 건축의 역할이 중요했다. 아치는 당시 최고의 첨단 기술로 요즘으로 치면 우주개발기술쯤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아치에서 파생된 볼트와 돔도 마찬가지였다. 아치를 이용해서 협곡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놓고 물을 공급하는 수로를 세울 수 있었다.
이것은 모두 사람과 정보와 물류가 이동하는 혈관이자 채널이었다. "모든 길은 로마로"라는 말은 여기에서 나온 것이었고 그 유명한 로마 기병도 아치 기술 없이는 탄생할 수 없었다. 채널이 튼튼하면 조직도 튼튼해지는 법, 로마는 이런 튼튼한 채널을 활용해서 말을 달려 영토를 확장하고 그렇게 확장한 영토를 다시 채널을 활용해서 개발한 뒤 하나로 묶는 데 뛰어난 재질을 가지고 있었다.
에트루스칸 건축
이상이 로마 건축을 탄생시킨 두 뿌리였는데, 먼저 등장한 것은 구조기술과 실용주의였다. 이런 종류의 건축은 정식 양식 사조가 아니기 때문에 그 탄생 연도를 정확히 짚어내기가 힘든데, 에트루스칸 건축을 출발점으로 잡을 수 있다. 에트루리아인은 이탈리아반도에 최초로 문명을 일군 민족으로 기록되어 있다. 기원전 900년경부터 등장했으며 기원전 753년 로마가 건국하고 기원전 509년에 공화정기가 시작될 때까지 이어졌다. 로마 역사로 보면 왕정기에 해당한다.
로마인들은 대체적으로 공화정기부터 자신들의 독자적인 역사와 문화가 시작된 것으로 보려는 경향이 강한 편이다. 실제로 공화정의 성립은 에트루리아인들을 잔인하게 진압하면서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에트루스칸 문명은 철저하게 파괴되어서 현재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다. 로마인들이 자신들의 문명에서 에트루리아인의 흔적을 지운 것으로 볼 수 있다. 건축도 마찬가지여서 유구가 거의 남아 있지 않은 상태이다. 이런 배경 아래 에트루스칸 건축은 크게 무덤, 신전, 성벽 등 세 종류로 나눌 수 있다.
무덤에는 봉분형, 격자형, 암묘형의 세 가지가 있었는데 봉분형이 가장 대표적인 방식이었다. 체르베테리의 반디타시아 묘역이 대표적인 예다. 이 무덤에서는 실내 천장에 볼트의 초기 형태가 나타났으며 실내 전체를 주택과 유사하게 꾸며서 당시 생활상을 종합적으로 보여준다(도 2-5). 주택 실내를 모방한 것은 의도적이어서 타블리노의 무덤은 평면부터 주택을 본떠 만들었다. 이는 사후 세계를 믿었던 에트루리아인의 내세관을 보여주는 증거로 해석할 수 있다.
신전은 현재 남아 있는 것이 거의 없는데, 처음에 목구조로 짓다가 점차 석구조로 바뀌었으며 그리스 신전과 다른 독특한 특징을 보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네 면 가운데 정면에만 계단을 두고 나머지 세 면은 기단으로 막았다. 정면성이 처음 나타난 것이다(도 2-6).
셀라는 종 방향으로 길게 셋으로 나누었으며 열주는 정면에 세 열과 양 측면에 각 한 열씩 두는 것이 표준형이었다. 약식도 있어서 셀라는 작은 방 하나만으로 구성되고 열주는 정면에 두 열만 세웠다(도 2-7). 대부분의 에트루스칸 신전은 담으로 영역을 구획해서 자연 속에 사면을 개방하며서 있던 그리스 신전과 달랐다.
에트루스칸 신전은 오더 양식의 관점에서 보면 투스칸식 오더라는 새로운 양식으로 지어졌다. 이 오더는 도리스식을 기본 모델로 삼고 이오니아식의 주추를 혼합해서 만들었다. 도리스식 오더에는 원래 주추가 없는데 투스칸식은 주추를 넣은 것이다. 이외에 다른 부재들을 조금 세밀하게 다듬거나 단순화하는 변화를 더했다. 도리스식, 이오니아식, 코린트식에 이어 제4의 오더라고 불린다.
성벽은 에트루스칸 건축의 정수로 같은 시기 그리스 반도의 성벽이 막쌓기에 가까운 데 반해 에트루스칸 성벽은 잘 다듬은 사각형을 주요 재료로 사용한 완자 쌓기로 축조했다. 이는 에트루리아인이 로마에 남겨준 주요 유산으로 로마인들은 이것을 이어받아 자신들만의 튼튼한 조적술로 발전시켰다(도 2-8). 현재 에트루스칸 시대의 성벽은 남아 있는 것이 없는데 페루자의 도시 성벽의 시기는 기원전 2세기로 한참 후지만 축조술은 에트루스칸 때의 기술이 남아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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