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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임석재
의 서... 바로크 건축
절대왕정과 프랑스 바로크의 성립
프랑스 바로크건축은 17세기와 함께 시작되었다. 16세기 후반부에는 종교전쟁으로 프랑스 건축이 침체에 빠져 있었다. 1598년 낭트칙령으로 안정을 되찾고 앙리 4세가 왕권 강화의 일환으로 파리 재개발계획을 실행하면서 건축 붐이 일기 시작했다. 이후 루이 13세 때 바로크 건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고 루이 14세 때 절정을 이룬 뒤 18세기에 로코코로 변화하면서 막을 내렸다. 루이 15세 때에는 계몽주의로 전환이 있었다.
프랑스는 자국 고유의 르네상스 양식을 완성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바로크도 어렵지 않게 시작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 바로크만큼 다양하지는 않았지만 질과 양 모두에서 버금가는 융성을 누렸다. 종교 건축과 비종교 건축으로 양분할 수 있다. 교회로 대표되는 종교 건축은 이탈리아 바로크 가운데 마데르노의 산타수잔나와 베르니니의 표준 오더를 합한 정통 고전주의를 받아들여 자국의 중세 전통 가운데 수직성을 구현하는 경향을 특징으로 보였다(도 7-49). 보로미니 계열의 비정형주의에 대해서는 거부감이 심한 편이었다. 낭트칙령과 함께 종교전쟁이 끝나고 가톨릭이 국교의 지위를 되찾으면서 프랑스 교회가 급격히 보수화되고 건축도 보수적으로 흐른 것이다.
비종교 건축은 프랑스의 전통적 구성 기법으로 건물 전체 윤곽을 짜고 오더 중심으로 바로크 어휘를 섞어 쓰는 경향을 보였다. 정문 출입구가 있는 중앙부를 중심으로 양옆에 윙이 나가고 다시 양 끝을 측동으로 마무리하는 5분법을 표준 구성으로 삼아 히프 루프(hip roof) 같은 프랑스의 전통 지붕을 얹은 위에 오더는 교회 건축과 마찬가지로 마데르노와 베르니니를 합한 이탈리아 표준 고전주의를 사용했다(도 7-50).
프랑스 바로크를 이끈 것은 절대왕정이었다. 절대주의(Absolutism) 시기를 정치 왕조의 입장에서 부르는 말로 루이 14세(재위 1662~1715) 통치기부터 프랑스대혁명이 일어날 때까지인 1660년에서 1789년 사이를 일컫는다. 정치의 군주제와 경제의 중상주의를 양축으로 삼아 교회, 귀족, 자본 같은 다른 권력구조에 대해서 우위를 점하는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였다. 이런 정치적 위상을 표현할 권위적 건축양식이 필요했던 왕정은 프랑스 전통과 정통 고전주의를 합한 바로크건축을 적극 후원, 활용했다.
절대왕정이 주요 건축주로 새롭게 등장하면서 두 가지 큰 변화가 나타났다. 첫째, 기능 유형이 다양해졌다. 성당과 교회라는 큰 축 위에 왕궁, 교육 시설, 정부 행정 시설, 시청사, 시민 회관, 도서관, 박물관, 상류층 주거 시설, 성, 극장, 상업 시설, 군사 시설 등 다양한 세속 건물들이 주요 기능 유형으로 등장했다.
건축 어휘는 기독교 양식을 그대로 사용했지만 기능과 프로그램에서 기독교 건축과 다른 새로운 내용들이 나타나면서 프랑스 초기 근대건축의 중요한 부분을 이루었다. 둘째, 이탈리아의 영향에서 벗어나 프랑스만의 고유한 국가 양식을 창출하려는 시도가 활발해졌다. 이에 따라 아카데미즘, 그랜드 매너, 루이 14세 양식, 왕실 고전주의 등 프랑스 바로크를 지칭하는 다양한 명칭들이 생겨났다.
아카데미즘, 그랜드 매너, 수상 건축
프랑스 바로크는 절대왕정 시기의 국가 양식으로 자리매김했다. 단순히 국가를 대표할 정도로 크게 유행했다는 뜻을 넘어 국가에서 직접 관리, 운용한다는 뜻이 담겨 있다. 왕실에서 직접 왕립 아카데미를 설립해서 운영했다. 루이 14세는 1648년에 왕립 미술 아카데미를, 1671년에 왕립 건축 아카데미를 각각 세웠다(도 7-51). 이곳에서는 건축 교육뿐 아니라 왕실에서 발주하는 건축, 나아가 프랑스 전역에서 이루어지는 건축을 관리, 감독하는 일을 했다.
왕실은 무료로 건축 교육을 해주고 졸업 후에는 일거리를 제공하는 등 모든 편의를 제공하는 대신 작품 경향을 철저하게 왕실의 정치적 목적에 맞게 구사하도록 강제했다. 교육 내용도 이에 맞게 표준 내용을 규범화해서 강제했다. 고전주의를 이용해서 왕실의 권위를 과시할 수 있는 기본 법칙을 교과서처럼 정리한 것으로 이를 통칭해서 그랜드 매너(Grand Manner)라고 불렀다.
축과 대칭에 의한 안정적 구도, 중심을 강조하는 중앙집중, 쭉 뻗은 일직선 복도, 화려한 장식을 곁들인 코린트식 오더, 고전 비례의 엄수 등이 핵심 내용이었다. 왕립 아카데미를 중심으로 그랜드 매너에 충실하게 구사하는 예술 양식인 아카데미즘이 탄생했다.
그랜드 매너의 이론적 내용은 건축 아카데미의 초대 교장이자 프랑스 바로크의 대표적 이론가였던 프랑수아 블롱델(Francois Blondel) 등이 완성했지만, 정작 이것을 실제 건물에 구현한 것은 19세기 제국주의 때 보자르 양식에서였다. 바로크 때는 그랜드 매너를 충실하게 구현하기에는 프랑스 건축을 둘러싼 환경이 복합적이었기 때문이다. 왕 이외에 수상의 입김도 커서 건축주의 취향이 갈렸으며 건축가도 이탈리아 원본과 프랑스 전통의 혼합같이 그랜드 매너 이외의 순수 창작조건들에 예민했다.
절대왕정 시대에는 왕마다 수석 건축가들이 있었다. 루이 13세의 수석 건축가는 르메르시에였고 루이 14세의 수석 건축가는 전반부에는 르보였고 후반부에는 아르두앙 망사르였다. 어떤 면에서는 왕을 보좌하며 주요 정책을 입안, 실행하던 실질적 권력자인 수상이 더 중요했다. 그리하여 '수상 건축'이라고 부를 만한 프랑스 바로크 특유의 현상이 있었다.
루이 13세 때 리슐리외는 왕국의 융성과 국왕의 존엄을 확립하여 절대왕정을 완성했는데 그 상징으로 르메르시에의 루브르 궁전으로 대표되는 왕궁 유형도 완성되었다. 또 리슐리외는 신앙의 자유는 허용한 반면 신교의 정치 세력과 군사력을 철저히 분쇄하면서 가톨릭의 기반을 공고히 했는데 이에 따라 르메르시에와 망사르가 프랑스 바로크 기독교 고전주의를 완성했다. 이외에 절대왕정을 지탱하는 귀족과 부르주아의 본거지인 호텔이 점차 자리 잡았는데 이것을 이끈 건축가는 1630년대의 망사르와 르보였다.
루이 14세가 섭정을 하던 초기에 마자랭은 외교력을 바탕으로 프랑스 절대왕정이 유럽 전역에서 인정받도록 했다. 외교관이 늘고 내각과 정부가 커져 고급 관리도 늘면서 법복 귀족이 등장했으며 이들의 본거지인 호텔의 전성기가 도래했다. 이것을 담당한 것은 르보였으며 여기에 더해 루이 14세 통치 전반부에 수석 건축가로 활약했다. 또 마자랭은 교황청 관리 출신이었고 추기경을 겸했기 때문에 가톨릭의 안정에 더욱 힘써 프랑스 바로크 기독교 고전주의를 계속 발전시켜 나갔는데 이것을 이룬 것은 망사르의 교회 건축이었다.
루이 14세 통치 중반기에 콜베르는 프랑스 절대왕정의 최전성기를 일궈냈다. 루이 14세 중상주의의 전형인 콜베르티슴(Colbertisme)을 주도하며 프랑스를 무역 대국으로 키웠다. 건축 경향은 이전까지 형성된 프랑스 바로크를 총동원하여 애국심을 고취하고 절대왕정의 영광을 찬양하는 기념비적 방향으로 나타났다.
이런 경향을 왕실 고전주의(royal classicism)라 부르며 마자랭 때의 순수 바로크 경향과 구별하기도 한다. 이것을 담당한 건축가는 아르두앙 망사르였다. 왕궁과 교회 모두에서 프랑스 절대왕정의 국가 양식을 대표하는 대작들이 탄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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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절대왕정과 프랑스 바로크의 성립 – 한 권으로 읽는 임석재의 서양건축사, 임석재, 북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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