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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는 임석재
의 서... 르네상스 건축
프랑스 르네상스 건축
세를리오와 프랑스 르네상스 건축의 성립
알프스 이북의 르네상스 건축은 이탈리아보다 많이 늦었으며 내용에서도 완성된 양식을 창출하지 못했다. 이렇게 된 데에는 역사적 배경이 강하게 작용했다. 영국, 독일, 프랑스 모두 고딕이 융성했던 나라로서 중세 전통이 강하게 남아 있었다.
르네상스 건축은 로마 고전주의를 부활해 구체적 창작 매개로 삼았는데 세 나라는 모두 독자적 고전 양식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16세기에 들어 알프스 이북에도 르네상스 건축이 조금씩 등장하기 시작했다. 독자적 창출은 아니었고 이탈리아에서 전파된 것이었다.
가장 먼저 받아들인 나라는 프랑스였다. 지리, 인종, 언어, 문화 등 여러 면에서 이탈리아와 가까웠을 뿐 아니라 이미 로마 시대부터 전 국토가 속주에 편입되어 고전주의를 경험한 전통이 있었기 때문에 거부감이 적었다. 롬바르디아를 군사적으로 점령하고 있었고 종교개혁의 여파가 적었기 때문에 교황청이 주도하던 표준 고전주의를 적극 수입할 수 있었다. 이미 1460년대부터 프란체스코 라우라나(Francesco Laurana)를 초빙하는 등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원형에 가깝게 접하고 있었으며 16세기에는 양식 운동으로 본격화되었다.
프랑스 르네상스는 1500년부터 1540년의 형성기, 1540년부터 1560년의 정착기, 1560년부터 1600년의 장식기로 나눌 수 있다. 형성기는 프랑수아 1세(재위 1515~47)의 적극적 후원 아래 시작되었다. 르네상스 애호가여서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세를리오를 초빙하는 등 프랑스에 르네상스를 정착시키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도 6-80). 루아르(Loire) 계곡 일대의 성채가 주요 유형이었는데 이것 역시 대부분 프랑수아 1세가 주도했다.
블루아 성체(Chateau de Blois, 1515~24), 샹보르 성체(Chateau de Chambord, 1519~47), 슈농소(Chenonceaux, 1556~59), 퐁텐블로(Fontainebleau, 프랑수아 1세~앙리 4세), 가용(Gaillon) 등이 대표적인 예들이었다.
후기 고딕의 플랑부아양양식으로 지었는데 그 위에 오더, 신전 박공, 아치, 창틀, 조적술 등을 고전 장식 어휘로 만들어 덧붙이는 방식으로 시작했다. 아직 종합적인 르네상스 고전주의를 운용할 단계에 못 이르렀다(도 6-81).
정착기에 들어와 비로소 독자적으로 르네상스를 운용할 수 있게 되었다. 비뇰라, 세를리오, 로소 피오렌티노, 프란체스코 프리마티치오 등 이탈리아 건축가들이 프랑스를 방문해서 르네상스를 직접 전파했다. 비트루비우스와 이탈리아 르네상스 건축가의 고전주의 이론을 연구해서 독자적으로 저서를 남기는 수준에 이르렀다. 정착기 후반부에 들어오면 프랑스만의 자생적 르네상스 건축가들이 탄생했다.
프랑스에 머문 이탈리아 건축가 가운데 프랑스 르네상스 형성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친 사람은 세바스티아노 세를리오(Sebastiano Serlio, 1475~1553 혹은 1555)였다. 1541년에 프랑스로 이주해서 프랑수아 1세의 수석 화가 겸 건축가가 되었으며 토네르(Tonnerre)의 앙시르프랑(Ancy-le-Franc, 1546년경) 성채를 대표작으로 남겼다(도 6-82). 프랑스에 최초로 이탈리아 르네상스의 표준 양식으로 지어진 건물이었으며 부분적으로 프랑스 전통 양식을 혼합한 점에서 향후 프랑스 르네상스의 전개 방향을 결정한 중요성이 있다.
이탈리아 르네상스는 오더 체계를 중심으로 구사했다. 벽면은 도리스식을 변형한 벽기둥으로 분할했고 출입문 차양은 코린트식을 변형한 독립 원형 기둥으로 처리했다. 바탕 벽면에서 중세 장식을 완전히 제거해서 오더의 정확성과 고전적 의미를 높였다.
프랑스 전통 양식은 경사 지붕, 굴뚝, 측랑을 갖는 5분법 등이었다. 모두 이탈리아 고전주의에는 없던 서북유럽의 전통적인 구성 방식이었다. 출입문 위쪽 벽면 등 부분적으로 매너리즘 기법을 이용해서 아치와 프랑스 전통 장식을 혼합한 새로운 장식 어휘를 창출했다.
레스코와 들로름
정착기 후반부에 들어와 프랑스 건축가들이 독자적으로 르네상스 양식을 구사하는 단계에 이른다. 피에르 레스코(Pierre Lescot, 1500/10년 사이~1578)와 필리베르 들로름(Philibert Delorme, 1510년경~70년)이 주인공이었다. 레스코는 프랑수아 1세에서 앙리 3세에 이르는 40여 년 동안 다섯 명의 왕을 모시며 루브르 궁전을 비롯해서 상류층의 호텔 등에서 대표작을 남겼다.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프랑스 지배 계층의 요구 사항을 체험적으로 잘 알고 있었다. 동시대 첨단 양식이었던 이탈리아 르네상스를 선사하되 프랑스 중세 전통을 적절히 섞어서 민족적 자부심도 동시에 느끼게 했다. 확장하면 프랑스가 르네상스와 바로크 건축에서 취했던 큰 방향이었다.
대표작은 구 루브르(Old Louvre, 1546~78)각주1) 였다(도 6-83). 오더, 상인방, 아치 등 개별 부재를 고전주의 표준 어휘로 정확하게 구사했다. 전체 구성에서는 프랑스 중세 전통을 참고해서 레스코만의 법칙으로 만들었다.
오더 체계는 벽기둥을 사용해서 장식 기능을 높일 것, 평활 벽면과 장식 디테일 사이에 적절한 균형을 이룰 것, 오더를 이용한 수직 층 쌓기로 중세의 앙천성을 표현할 것, 수직 층 쌓기에서 위층으로 갈수록 높이를 낮추고 장식을 늘려서 지구 중력에 충실한 구조적, 시각적 안정성을 확보할 것, 건물 전체를 5분법으로 구성하되 중앙 출입구를 돌출하여 중심을 강조할 것 등이었다.
프랑스 르네상스의 절정은 들로름이었다. 리옹에서 석공 장인의 아들로 태어났는데 당시 리옹은 프랑스에서 르네상스를 제일 먼저 받아들인 도시 가운데 하나였다. 이런 도시 분위기에서 인본주의에 대한 인문학적 지성을 접하며 컸으며 로마에 머물며 고전 유적을 직접 답사, 측량, 연구했으며 세를리오와 비뇰라 등과 교류하며 비트루비우스에 대해서도 연구했다. 이런 배경에 아버지에게 배운 돌 다루는 기술을 더해 자신만의 프랑스 르네상스를 완성했다.
들로름의 건축은 이탈리아 고전주의는 되도록 줄인 대신 프랑스 전통을 최대한 살렸다. 세를리오나 다른 프랑스 건축가들이 이탈리아 고전주의와 프랑스 전통을 반반 정도 섞은 것과 구별되는 경향이다. 언뜻 보면 르네상스라고 보기 힘들 정도였다. '프랑스 오더(French Order)' 찾기는 그만이 했던 대표적인 예다.
이탈리아 고전 오더를 되도록 표준에 가깝게 구사하는 것을 당연히 여기던 당시 프랑스 건축계의 풍토와 달리 그는 오더야말로 국민 정서를 대표하는 건축 어휘라고 생각했다. 주신의 수직 홈 파기를 장식적으로 활용하거나 반지 모양의 수평 띠 장식을 주신에 두르거나 주두를 사람 얼굴로 대체하는 등 중세 전통을 활용하는 방식이었다(도 6-84).
아네트 성채 출입문과 예배당
들로름은 많은 작품을 남겼으나 철거, 파괴되는 등 대부분은 보존 상태가 좋지 않다. 대표작은 아네트 성채(Chateau de Anet, 1547~55), 퐁텐블로 내 앙리 2세 갤러리(Galerie Henry II, 1548~59), 슈농소의 화랑 다리(Pont Galerie, 1556~59) 등이다. 프랑스 르네상스 건축가로는 최초로 이론서를 남겼는데 『건축 제1서(Le premier Tome d'Architecture)』(1567)를 대표작으로 들 수 있다.
들로름의 건축은 매우 독특해서 이탈리아 고전주의와는 많이 달랐으며 비슷한 예를 찾기 힘들 정도로 특이한 생김새를 보여준다. 개인적 독창성이 크게 작용했으며 프랑스다운 전통을 가미했다. 이런 현상은 문화 전파의 문제로 확장해서 생각할 수 있다.
고전주의가 알프스 이북 지역으로 전파될 때에는 이탈리아 양식이 국제적 보편성을 갖는 원본이 된다. 관건은 원본을 얼마나 정확하게 구사하는지와 알프스 이북 각 나라의 전통을 어떤 식으로 얼마나 반영하는지의 두 방향으로 나타난다. 들로름은 이 문제에서 프랑스 전통에 많이 기운 경우에 해당한다.
제일 중요한 작품은 아네트 성채인데, 출입문과 예배당이 중심 건물이었다. 출입문은 로마의 개선 아치를 기본 모티브로 삼아 매너리즘으로 각색했다(도 6-85). 개선 아치의 구성과 부재의 위치는 고전주의 표준형을 구사했다. 매너리즘은 프랑스 중세 전통과 장식을 혼용하는 방식으로 구사했다.
오더 자체가 고전주의 표준형 다섯 가지에는 없는 새로운 형식으로, 그가 찾고자 했던 프랑스 오더의 한 종류를 제시한 것이다. 아키트레이브는 매우 낮았고 트리글리프를 프리즈와 아키트레이브 양쪽 모두에 새겼지만 그 위치는 일치하다가 어긋나는 등 불규칙했다.
가장 두드러진 처리는 수직 구성이었다. 수직 방향으로 '오더-아치-지붕'의 세 단계로 이루어졌는데 위로 올라갈수록 점차 좁아지면서 하늘을 향한 수직성을 표현했다. 수직성은 프랑스의 중세 전통이었다. 이상을 종합하면 이 건물은 개선 아치, 신전 박공, 오더, 3분법 등의 고전 문법을 이용하여 중세 고딕의 수직성을 표현함과 동시에 세부 어휘를 매너리즘으로 각색하고 장식을 더한 작품이었다. 이는 프랑스 르네상스 나아가 프랑스 고전주의의 한 유형이 되었다. 앞의 세를리오와 레스코가 제시한 유형에 더한 또 하나의 새로운 유형이었다.
예배당은 프랑스 최초의 중앙집중형 건물이다. 원형 중심부를 정사각형 윤곽이 싸는 구성으로 이탈리아 르네상스에는 없던 새로운 유형이었다. 돔도 이탈리아에서 유행하던 펜덴티브 방식이 아니라 로마의 원형 무덤이나 판테온 방식이었다.
외관도 이탈리아에서는 실내 구성과 별도로 개선 아치와 신전 박공 등의 고전 어휘로 치장하는 것이 통례인데 반해 여기에서는 실내 구성을 그대로 반영했다. 그 위에 엔타블러처를 단순화한 수평 띠, 아치, 박공 등의 고전 어휘를 더했다. 출입문과 마찬가지로 수직성을 이용해서 중세 전통을 표현했다. 드럼과 랜턴의 높이를 인위적으로 높였으며 첨탑 두 개를 더했다(도 6-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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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프랑스 르네상스 건축 – 한 권으로 읽는 임석재의 서양건축사, 임석재, 북하우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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