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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하고 얌전한 사람을 ‘식물성’이라고 한다. 식물은 제자리에서 햇빛과 물과 공기로 다른 동물은 만들지 못하는 유기물질을 만드는 귀한 일을 한다. 제 몸을 동물에게 기꺼이 내어주기도 한다. 모든 동물이 살아갈 먹이를 묵묵하게 만드는 식물은 성직자처럼 숙연해 보이기까지 한다. 그런데 정말 그렇기만 할까.

생물학자들은 식물에게서 속으로 타오르는 불꽃을 본다. 식물은 달려드는 동물에게 만만한 먹이 노릇만 하지는 않는다. 마치 분노와 투쟁과 복수를 버무린 것처럼 단단한 껍질과 날카로운 가시로 무장하고, 지독한 독성물질을 만들어 동물과 맞선다. 그리고 이런 직접적인 방어수단 말고 교묘한 방어책을 구사하기도 한다. 적의 적을 유인하는 것은 아주 일반적인 수법이다. 초식성 곤충이 공격을 시작하면 식물은 휘발성 물질을 발산해 포식곤충을 끌어들인다. 식물체에서 달콤한 진액을 분비해 개미나 말벌을 불러들여 벌레를 견제하기도 한다. 식물 잎 뒷면에 곤충을 잡아먹는 응애(진드기목의 절지동물)가 살 수 있는 작은 집을 마련해주는 식물도 많다. 우리나라 산분꽃나무 잎 하나에서는 그런 집이 평균 24개나 발견되기도 했다.

그러니까 어린이 만화영화에서 양배추가 용감한 말벌 아저씨에게 도움을 청해 나방 애벌레의 침입을 막는다는 이야기는 공상이 아니라 현실에서 벌어지는 일이다. 최근 네덜란드 과학자들은 유럽에 분포하는 양배추의 일종인 흑겨자와 거기에 알을 낳아 애벌레를 키우는 배추흰나비의 관계를 면밀히 관찰했다. 수세에 놓인 흑겨자는 화학무기를 갖춰 포식자의 접근을 막지만, 배추흰나비는 그 독성을 무력화한다. 그러면 흑겨자는 배추흰나비의 알이나 애벌레를 공격하는 기생 말벌을 유인하는 전략으로 맞선다. 이 말벌은 흑겨자가 내뿜는 휘발성 유기화합물질을 알아채고 찾아온다. 마치 만화영화에서 양배추가 “도와줘요!”라고 외치는 소리를 듣는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이 식물은 배추흰나비의 애벌레가 식물을 물어뜯어 상처가 날 때가 돼서야 신호물질을 방출하는 게 아니라, 나비가 식물 표면에 알을 낳기만 해도 알아차리고 신호물질을 내보낸다.

ⓒ 김영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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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겨자 잎에 배추흰나비가 알을 낳은 모습

이때 흑겨자가 내뿜는 휘발성 유기화합물질을 알아채고 말벌이 찾아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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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자들은 식물이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똑똑하다는 사실을 차츰 깨닫고 있다. 잔디를 깎으면 독특하고 신선한 풀 냄새가 난다. 우리에겐 상쾌하게 느껴질지 몰라도 풀의 입장에서는 동료에게 보내는 조심하라는 경계경보이자 도움을 요청하는 긴급 구조신호일 수 있다. 식물의 소통은 땅 위에서뿐 아니라 땅속에서도 이뤄진다. 미국 과학자가 애기장대라는 식물을 상대로 한 연구가 있다. 애기장대의 잎에 ‘슈도모나스 시린개(Pseudomonas syringae)’라는 병원성 박테리아를 감염시켰다. 당연히 식물은 시름시름 앓았다. 하지만 이 식물의 뿌리에 미리 유익한 세균인 ‘바실루스 수브틸리스(Bacillus subtilis)’를 접종한 뒤 이 병균을 감염시켰더니 식물은 건강했다.

과학자들은 애기장대 잎에 병균을 감염시킨 뒤 신호가 전달되는 과정을 분자생물학적으로 조사했다. 식물의 잎은 뿌리에게 신호를 보내 탄소가 풍부한 사과산(말산)을 분비하도록 요청했다. 사과산은 감염을 막는 바실러스균이 좋아하는 먹이이다. 결국 애기장대는 병균과 싸울 우군 박테리아를 유인하기 위해 자신에게 소중한 양분을 미끼로 분비해 병에 걸리지 않도록 만드는 고도의 책략을 쓰는 셈이다.

식물을 먹고 사는 곤충은 무려 30만 종에 이른다. 지구상에서 생물학적으로 가장 중요한 상호작용이 바로 식물과 곤충 사이에서 벌어진다. 벌레라면 ‘징그럽다’는 생각부터 든다면, 또는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화초에 피해를 끼치는 어떤 곤충은 지구상에서 사라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한다면, 과학적 연구결과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식물은 곤충과의 싸움을 통해 매일매일 진화하고 있으며, 우리가 귀하게 여기는 맛, 향기, 약효 등 식물의 여러 형질은 그런 싸움의 결과라는 것이다. 만일 징그럽다고 곤충을 사라지게 한다면 소중한 식물의 자산마저 사라질지 모른다.

최근 미국, 캐나다, 핀란드 과학자들의 연구는 그런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연구자들은 5년 동안 야외에서 달맞이꽃을 기르면서 곤충과의 관계가 진화에 어떤 영향을 끼치는지 조사했다. 달맞이꽃은 둘로 나눠 한곳에는 한 달에 두 번 살충제를 쳐 곤충의 접근을 막았고, 다른 곳은 그냥 내버려두었다. 달맞이꽃에도 다양한 형질이 있는데, 16가지 표현형의 달맞이꽃을 똑같은 비중으로 심고 시간이 지나면서 어떻게 변해가는지 관찰했다. 살충 구역에서 벌레가 사라지자 달맞이꽃에서는 변화가 일어났다. 첫 변화는 뜻밖이었다. 천적인 벌레들이 없어졌는데도 달맞이꽃의 수가 줄어든 것이다. 민들레가 급속히 늘어나면서 달맞이꽃 종자가 싹트는 걸 방해했기 때문이었다. 민들레는 대조군에서보다 곱절로 많아졌다. 민들레 또한 그동안 수많은 딱정벌레와 나방 애벌레의 공격에 시달렸기 때문이다.

5년간의 현장실험에서 분명해진 것은 곤충이 식물을 바꾼다는 사실이다. 살충제를 뿌린 달맞이꽃은 더는 나방 애벌레가 씨앗을 갉아먹는 것을 막아주는 독성물질을 분비하지 않았다. 엄밀하게 말하면, 이제는 불필요해진 독성물질을 만드는 달맞이꽃은 그런 노력 없이 생존과 번식에 몰두한 다른 형질의 달맞이꽃에게 자리를 내어주게 된 것이다. 16가지 형질의 달맞이꽃 가운데 1가지 형질은 ‘멸종’했고, 3가지 새로운 형질이 출현해 총 18가지 표현형이 나타났다. 달맞이꽃의 종자기름은 전통적으로 널리 쓰이는 허브 약재이다. 만일 곤충이 사라진다면 이 오랜 약용성분도 사라질지 모른다.

벌레가 없어지자 생겨난 또 다른 변화는 꽃이 일찍 피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그전까지 달맞이꽃은 나방 애벌레가 알에서 깨 왕성하게 먹는 시기를 피해 꽃을 피웠지만 이제 그럴 필요가 없어졌던 것이다. 놀랍게도 이런 모든 변화는 불과 달맞이꽃의 3~4세대 만에 이뤄졌다.

“콩 심은 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라는 속담에서 알 수 있듯이 식물은 변함없음을 상징한다. 그렇지만 최근의 연구결과는 식물도 변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사실 변함없어 보이는 유리도 오랜 세월이 지나면 엿처럼 흐르지 않는가. 수백 년 된 유럽의 성당에 가보면 유리창이 울퉁불퉁해져 있음을 관찰할 수 있다. 결정이 없어 유체의 성격을 지닌 유리가 서서히 흘러내렸기 때문이다. 하물며 식물은 주변환경과 끊임없이 상호작용하는 생물 아닌가. 게다가 식물의 변화는 우리가 생각해왔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일어나고 있다. 이제 고정적이고 수동적이며 변화가 없다는 식물에 대한 선입견은 바꾸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아니 식물뿐 아니라 곤충에 대한 생각도 달라져야 한다. 자연은 우리가 알던 것보다 서로 훨씬 더 밀접하게 연결된 존재임이 분명해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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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Anjel M. Helms et al., “Exposure of solidago altissima plants to volatile emissions of an insect antagonist (Eurosta solidaginis) deters subsequent herbivory”, PNAS(2013). DOI: 10.1073/pnas.1218606110
  • ・ Venkatachalam Lakshmanan et al., “Microbe-associated molecular patterns-triggered root responses mediate beneficial rhizobacterial recruitment in arabidopsis”, Plant Physiology, vol. 160(2012), pp. 1642~1661. DOI: 10.1104/pp.112.200386
  • ・ Anurag A. Agrawal et al., “Insect hervibones drive real-time ecological evolutionary change in plant populations”, Science, vol. 338, no. 6103(2012), pp. 113~116, DOI: 10.116/science. 1225977

조홍섭 집필자 소개

환경과 과학 분야에서 30년 가까이 통찰력과 이슈가 있는 기사와 칼럼을 써온 우리나라 환경전문기자 1세대이다. 생태보전, 원자력발전, 4대강 개발 등 1980년대 이 후 급부상하는 환경 현안들을..펼쳐보기

출처

자연에는 이야기가 있다
자연에는 이야기가 있다 | 저자조홍섭 | cp명김영사 도서 소개

동물행동, 생태학부터 진화론, 동물복지, 자연사까지 기초자연과학과 첨단응용과학을 넘나들며 펼치는 흥미롭고 감동적인 생명들의 이야기. 살아 있는 그 모든 것들이 펼쳐내는..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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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똑똑한 식물의 SOS자연에는 이야기가 있다, 조홍섭,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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