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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기가 있다 인간의 보살핌은 약일까 독일까
천년숲 제주 비자림
숲을 잘 보전하려면 그대로 내버려두어야 하는가, 아니면 사람이 적극 관리해야 하는가. 어쩔 수 없이 손을 댄다면 어디까지가 적당한 간섭일까. 제주에서 가장 많은 탐방객이 몰리는 아름다운 두 숲이 이런 고민에 싸여 있다. 천년숲인 구좌 비자림과, 생긴 지 50년밖에 안 되는 한경면 저지오름숲은 이런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북제주군 구좌읍 평대리의 비자림에 들어서면 범상치 않은 기운이 엄습한다. 푸른 비늘 같은 콩짜개덩굴로 뒤덮인 회갈색 거목이 바늘잎을 반짝이면서 사방에 가득 들어차 있다. 화산 분화로 생긴 토양인 송이를 깐 보행로의 붉은색이 숲 바닥과 수피, 하늘까지 물들인 녹색과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중산간지대의 다랑쉬오름과 돛오름 사이에 긴 타원형으로 들어선 비자림은 면적 44만 8,000여 제곱미터에 500~800년생 비자나무 2,800여 그루가 자리 잡고 있다. 최고령 나무는 900살에 육박한다. 두 번째는 2000년 ‘새천년 나무’로 지정된 비자나무로, 수령은 800살이 넘고 굵기가 거의 네 아름에 키가 14미터에 이르러 이 숲에서 가장 웅장하다. 이런 터줏대감 때문에 구좌 비자림은 ‘천년숲’으로 불린다.
국립산림과학원 난대산림연구소 김찬수 박사가 비자나무 사이에 자귀나무, 팽나무, 비목나무 등이 모여 서 있는 곳을 가리켰다. “과거에 비자나무가 죽어 숲에 틈이 생기자 생겨난 선구종인데, 숲이 계속 울창했다면 저절로 나지 못하는 나무”라고 설명했다. 비자림이 지난 수백, 수천 년 동안 끊임없이 변화해왔다는 증거이다. 그렇다면 과거 이 비자림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김 박사는 “1970년대 숲을 조사하다 길을 잃었던 적이 있었는데, 호랑이가 나올까 겁났을 정도로 으스스했다”고 말했다. 빽빽한 하층식생과 덩굴로 원시 분위기를 물씬 풍기던 구좌 비자림은 1999년 숲 가꾸기 사업 대상이 된 이후 비자나무만 주로 보이는 숲이 됐다. 현재의 비자림은 깔끔하게 관리되고 있는 흔적이 역력하다. 비자나무를 덮었던 덩굴식물과 다른 나무들은 상당 부분 제거됐고, 가지치기, 수목치료, 지지대 설치 등으로 보호하고 있다. 비자나무에는 나무마다 일련번호 팻말을 달아 관리하고 있다.
비자나무는 주목과의 침엽수로 우리나라 남부와 제주도, 일본 중남부에 분포한다. 느리게 자라기로 유명해 100년 지나야 지름이 20센티미터 정도밖에 크지 않는다. 대신 목재의 재질이 치밀하고 고와 건축, 가구, 바둑판 등의 고급 재료로 쓰였다. 비자나무의 씨앗은 구충제로 요긴하게 사용되었다. 백양사, 금탑사 등 사찰의 비자림은 모두 주민에게 구충제로 쓰기 위해 조성한 것이다. 《동의보감》은 “비자를 하루 7개씩 7일간 먹으면 촌충이 없어진다”는 처방을 하고 있다. 고려와 조선에 걸쳐 비자는 주요한 진상품이었고 이에 따른 애환도 많았다. 특히 조선 후기 세제가 문란해져 흉년과 풍년에 무관하게 일정량의 비자를 징수하자 견디다 못한 주민들이 비자나무를 일부러 베어버려, 구좌읍 등 일부 지역에만 남았다는 얘기가 전해진다.
하성현 제주도 비자림관리소장은 “숲을 가꾸지 않고 방치했으면 비자림은 모두 죽어 사라졌을 것이다. 송악, 줄사철, 등수국, 마삭줄 등 덩굴식물로 덮인 비자나무는 광합성을 하지 못하거나 무게로 가지가 부러진다”라고 말했다. 그리고 “숲을 내버려두면 빨리 자라는 후박나무와 아왜나무가 금세 뒤덮는다”라고 덧붙였다. 이런 논란은 구좌 비자림의 탄생 비밀과도 관련이 있다. 우리나라의 다른 비자림과 달리 구좌의 비자림에는 조림 기록이 없다. 천연림이라는 얘기다. 김찬수 박사는 “제삿상에 올린 비자 씨앗을 뿌린 것이 숲이 됐다는 속설이 있지만 과학적으로 천연림 주장이 설득력이 있다”고 말한다. 한라산 1,000미터 이상 고지대에 비자나무가 자생하는데, 지형상 그 씨앗이 계곡물에 실려와 구좌에서 싹텄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그렇지만 자연이 낳았다고 해도 기른 것은 사람이다. 비자는 구충제로 중요한 진상품이었기 때문에 비자림도 철저히 보호됐다. 구좌 비자림은 자연과 사람이 절묘한 공조로 이룩한 숲인 것이다.
원론적으로 본다면, 비자나무숲을 내버려둔다고 비자나무가 모두 죽는 것은 아니다. 덩굴에 덮인 비자나무가 죽으면 덩굴도 죽고 숲은 새롭게 출발한다. 어린 나무에서 죽어가는 나무까지 모두 있는 것이 어쩌면 자연스러운 숲의 모습이다. 그러나 구좌 비자림은 장기간 사람이 보살펴온 전통 마을숲에 가깝다. 면적도 그리 넓지 않아 자연의 손길에 내맡기기엔 불안하다. 김 박사도 “어느 정도 개입은 불가피하다”고 인정했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가 적당할까.
제주도는 비자림 관리에 연간 3억 원을 들이고 있다. 덩굴을 제거하고 산책로를 조성하는 것이 주요 사업이다. 걷기 열풍과 함께 한 해에 10만 명 이상이 찾는 상황에서 나무를 보호하고 산책로를 늘리는 것이 현안일 뿐 숲의 장기적 미래에 관심을 기울일 여유는 없어 보인다. 비자나무의 노령화를 대비해 후계목은 양묘장에서 따로 기르고 있다. 비자림 오른쪽 숲 가꾸기를 덜한 곳에 가면 비자림의 과거 모습을 어렴풋이나마 짐작할 수 있다. 덩굴과 착생식물로 뒤엉킨 열대 정글과 흡사한 숲 군데군데에 비자나무가 서 있다. 바람직한 비자림의 미래는 아마 현재의 숲길과 이곳의 중간쯤 어딘가에 있을 것이다.
제주시 한경면 저지리의 저지오름 숲길은 걷기 편한데다 자연성을 간직해 탐방객이 몰리는 곳이다. 높이 239미터의 봉우리로 제주도에서는 흔히 보는 오름이지만 숲길에 접어들면 전혀 딴 세상에 들어온 듯하다. 오름에는 등고선을 따라 2개의 둘레길이 있다. 숲길 들머리의 현무암 계단을 올라 1.5킬로미터 거리의 둘레길을 걸으면 오름의 아랫부분을 한 바퀴 돌아 제자리에 돌아온다. 곰솔(해송)의 낙엽이 깔려 푹신한 산책로 양쪽엔 담팔수, 자금우, 소태나무, 예덕나무, 보리수나무, 꾸지뽕나무 등의 난대식물이 자란다. 송이로 만든 적갈색 보행로 옆의 고사리밭이 더욱 짙푸르다.
오름의 분화구에 오르면 또 다른 둘레길이 펼쳐진다. 이곳엔 난대림이 더욱 빽빽하게 우거져 숲 터널 밑으로 좁은 보행로가 나 있다. 둘레길에서 다시 나무를 깐 바닥을 타고 내려가면 분화구 안의 전경을 볼 수 있다. 1950년대까지 무, 보리, 감자를 재배했던 분화구 안과 사면은 덩굴식물로 뒤덮여 원시적인 분위기를 연출한다. 시민단체 생명의 숲이 주관하는 2007년 아름다운 숲 전국대회에서 대상을 받은 데 이어 최근 곶자왈을 품은 올레길과 연결되면서 유명세를 타고 있는 이 숲길에는 해마다 약 10만 명의 탐방객이 찾아온다.
그러나 저지오름은 1960~1970년대까지 민둥산이었다. 숲길 조성을 주도한 주민 김태후 씨는 “어릴 때 오름 꼭대기에서 억새나 띠로 썰매를 타고 미끄러져 내려오는 놀이를 했을 정도로 나무가 없었다. 1980년대에 방목이 중단된 뒤부터 나무가 커지기 시작했다”라고 회고한다. 김 씨는 1970년 산불 확산을 막기 위해 오름에 설치한 방화선을 숲길로 바꾸는 작업에 나서 2006년 공개했다. 그는 “70대인 노부모도 다닐 수 있도록 평탄하게 숲길을 만들었다. 힘이 들거나 험하지 않아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며 걷기에 좋다”라고 말한다. 저지오름은 5개 자연마을 한가운데 있다. 유명해진 아름다운 숲이 주민들에게는 자랑거리다. 한경면 주민자치위원회에서 쓰레기와 부러진 나뭇가지 등을 치우는 자원봉사를 하던 조점례 씨는 “숲길이 저지의 얼굴이 됐다”고 말한다.
하지만 이곳에서도 숲 관리는 난제이다. 송악, 상동나무, 청미래덩굴 등이 곰솔을 휘감아 죽이는 일이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 어른 손목 굵기의 송악에 감겨 고사한 곰솔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김 씨는 “한두 그루면 자연성을 위해 그대로 두겠지만 결국 일부는 제거해야 할 것 같다”라고 말한다. 저지오름의 소나무숲은 언젠가 난대림으로 바뀔 수밖에 없다. 사람이 관리하는 저지오름 숲길에서 곰솔과 덩굴식물의 공존은 쉽지 않은 실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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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행동, 생태학부터 진화론, 동물복지, 자연사까지 기초자연과학과 첨단응용과학을 넘나들며 펼치는 흥미롭고 감동적인 생명들의 이야기. 살아 있는 그 모든 것들이 펼쳐내는..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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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천년숲 제주 비자림 – 자연에는 이야기가 있다, 조홍섭,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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