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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기가 있다
죽은 왕들이 노니는 종묘숲
외대문을 넘어 종묘로 한 걸음 내딛으면 종로3가의 번잡함이 한순간에 사라진다. 마치 깊은 산속에 들어온 듯한 적막감과 엄숙함이 감돈다. 어른 두 아름은 돼 보이는 갈참나무의 쭉 뻗은 가지가 팔을 벌리고 앞을 막아서는 듯하다. 서울 한복판에서 600년째 자리를 지켜온 종묘숲은 조선 왕조의 신림(神林)이다. 오랜 세월 나무는 신의 대리물이나 수호신으로 숭배돼왔다. 민중의 신림이 성황림이나 당산나무라면, 왕조의 신림은 국가에서 보호하던 신성한 숲을 가리킨다. 종묘숲에 들어서면 갈참나무와 잣나무 아래 쪽동백과 때죽나무가 우거져 어둑하다. 단청과 정자와 누각을 짓지 않은 ‘죽은 자의 공간’답게 꽃나무를 심지 않았고, 연못엔 소나무 대신 향나무를 심은 모습이 특이하다.
그러나 종묘의 숲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보다 갈참나무숲이다. 전체 숲의 3분의 2를 차지하는 갈참나무는 수령 300~400년 거목이 즐비하다. 멀리서 보면 일자형 전각인 정전과 영녕전은 참나무의 바다에 배처럼 떠 있다. 참나무숲은 속세와 신의 세계를 차단하는 구실을 한다. 조상신과 만나는 의식이 벌어지는 정전(正殿)에 갈 때 왕은 동문으로 들어가고, 신은 남문에서 들어온다. 남문 밖에 있는 것이 바로 참나무숲이다. 이 숲은 신성한 공간을 차폐하는 곳이기에 앞서 신이 사는 곳인 셈이다.
그렇다면 참나무숲은 언제 생긴 것일까. 전문가들은 애초 종묘에는 소나무가 더 많았지만 수백 년이 흐르면서 차츰 참나무숲으로 바뀌었을 것으로 본다. 신준환 국립수목원장은 “세종 13년 종묘의 소나무를 간벌했다는 등의 역사 기록으로 볼 때 처음엔 소나무가 주요 수종이었던 것 같다”라고 말했다. 국민대 산림환경시스템학과 전영우 교수는 “소나무가 주인이었겠지만 참나무도 꽤 많이 심었을 것 같다. 가벼워 보이는 나무를 의도적으로 도태시키고 건축물과 조화를 이루는 참나무류만 남기면서 자연히 참나무숲이 된 것으로 보인다”고 설명한다. 종묘숲은 왕궁 못지않게 중요한 숲이었지만 가지를 치거나 하는 식으로 숲을 관리하지 않고 자연미를 살렸다. 전 교수는 “우리 조상의 자연관과 전통 지혜가 담겨 있다”라고 설명했다.
외대문 쪽에 야트막한 인공 언덕인 가산(假山) 세 곳을 지어 종묘 내부 공간을 포근하게 감싸도록 하고, 인공 연못에는 흘러드는 물소리를 죽이기 위해 물이 땅속으로 스며들어 유입되도록 설계하는 등 세심하게 자연을 활용하는 지혜를 발휘했다. 우리 궁궐 지킴이 활동가인 이옥화 씨는 “정전 앞에 깔아놓은 박석이 투박해 보이지만, 우둘투둘한 표면이 난반사를 일으켜 흐린 날도 어둡지 않고 미끄러짐을 방지하는 등 자연미 속에 세련된 기능을 감추고 있다”라고 말했다. 종묘 건너편 세운전자상가 옥상에 오르면, 종묘숲이 ‘도심의 허파’이자 북한산에서 북악산 응봉을 거쳐 흘러내려온 녹지 축임을 실감할 수 있다. 우리 조상에게 이것은 땅의 기가 흐르는 지맥이기도 했다. 그러나 일제는 돈화문에서 이화동으로 넘어가는 도로를 뚫어 종묘의 주산인 응봉의 주맥을 잘라버렸다. 잘린 창경궁과 종묘를 잇는 다리가 만들어졌지만, 현재 도로를 지하터널로 만들고 두 지역을 연결하는 공사가 진행 중이다.
종묘숲과 창덕궁 후원 그리고 창경궁 북쪽은 하나의 숲으로 연결돼 있다. 종묘숲이 죽은 왕들을 위한 숲이라면 창덕궁 후원은 살아 있는 왕족을 위한 숲이었다. 이곳에서는 휴식과 재충전뿐 아니라 활쏘기 등 야외 행사와 농사 체험, 양잠 등이 이뤄졌다. 창덕궁 후원은 나이 많은 거목의 정원이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된 노거수(老巨樹)만 해도, 돈화문 근처의 300~400년 수령의 회화나무 7그루를 비롯해 4종에 이른다. 선원전 서쪽 향나무는 최고령으로 수령 750살 정도로 추정된다.
1405년 창덕궁 조성을 시작할 때 어느 정도 자란 나무를 옮겨 심은 것으로 보인다. 1820년대 후반의 궁궐 기록화인 〈동궐도〉에도 이 향나무는 현재처럼 받침목을 댄 모습으로 그려져 있다. 돈화문 근처의 회화나무와 금천교의 느티나무도 이 그림에 나와 있다. 애련지 부근의 뽕나무는 왕비가 양잠을 권하기 위해 키웠던 뽕나무 가운데 하나로 수령 400년 정도의 거목이다. 후원 가장 안쪽에 자리 잡은 다래나무도 수령 600년으로 국내에서 가장 크고 굵은 다래나무이지만 수나무여서 열매는 맺지 못한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지 않은 거목도 적지 않아, 수령 300년 이상의 나무가 70여 그루에 이른다. 아쉽게도 거목은 태풍 등 자연재해로 인해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
창덕궁 후원에는 소나무, 잣나무, 회화나무, 뽕나무, 주목 등 160여 종의 나무가 심겨 있다. 후원 숲의 가장 큰 변화는 소나무가 줄어들었다는 것이다. 후원 취한정 편액에는 “정원 가득한 소나무 소리가 밤바다의 파도소리 같다”는 구절이 적혀 있지만 지금은 소나무를 찾아보기도 쉽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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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물행동, 생태학부터 진화론, 동물복지, 자연사까지 기초자연과학과 첨단응용과학을 넘나들며 펼치는 흥미롭고 감동적인 생명들의 이야기. 살아 있는 그 모든 것들이 펼쳐내는..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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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죽은 왕들이 노니는 종묘숲 – 자연에는 이야기가 있다, 조홍섭,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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