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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자연에는 이
야기가 있다

540여 지켜온 숲의 바다 광릉숲

경기도 광릉숲의 핵심구역인 소리봉(해발 536.8미터) 일대에는 나무의 바다가 펼쳐져 있다. 서어나무, 졸참나무, 까치박달나무, 층층나무 등의 넓은잎나무들이 빽빽이 들어차 햇빛에 반짝인다. 지난 540여 년 동안 사람의 간섭을 받지 않고 성숙한 천연림이다. 어둑한 숲 속에 들어서면 벌레들의 울음소리가 파도처럼 밀려온다. 100년을 훌쩍 넘겼을 졸참나무와 갈참나무 고목 사이로 수피가 사람의 근육처럼 울퉁불퉁한 서어나무들이 몸매를 자랑하듯 서 있다. 그런데 하늘을 가린 숲에 구멍이 뻥 뚫려 있다. 서어나무 고목이 쓰러지면서 생긴 빈틈이다. 그 틈으로 쏟아지는 햇빛을 받으며 어린 까치박달나무와 회목나무가 키 자람을 하고 있다. 5~6년 전쯤 서어나무가 넘어지면서 숲 바닥에서 오랫동안 기다리던 다른 나무들이 기회를 잡은 것이다. 촘촘한 숲에 생긴 빈틈을 철저히 이용하는 이런 모습은 오랜 자연림에서만 볼 수 있다.

소리봉 정상에 오르자 도봉산, 수락산, 천마산, 축령산이 남양주시 진접읍의 아파트 단지와 함께 한눈에 들어온다. 광릉숲은 서울에서 불과 39킬로미터 떨어져 있다. 그러나 이 숲의 생물다양성은 웬만한 국립공원보다 높으며, 단위면적당 생물 종을 따지면 국내 최고 수준이다. 광릉숲 2,240헥타르에는 모두 5,710종의 생물이 산다. 단위면적당 식물 종은 광릉숲이 헥타르당 38.6종으로 설악산 3.2종, 북한산 8.9종을 크게 웃돈다. 이처럼 생물다양성이 풍부한 것은 온대지역에서 이례적으로 장기간 숲이 보전됐기 때문이다. 1468년 조선 7대 왕 세조는 이 지역을 왕릉인 광릉의 부속림으로 지정해 일반인의 출입을 통제했다. 일제강점기인 1913년부터 현재까지 한 해도 멈추지 않고 임업시험림 구실을 해왔고, 이에 따라 개발과 훼손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산림 보전과 생물다양성만 본다면 광릉숲의 반쪽만 보는 셈이다. 광릉숲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먼저 임업 관련기관이 들어서, 한반도에 적합한 나무를 어떻게 심을지를 연구해온 우리나라 임학의 산실이다. 국립산림과학원 김석권 산림생태연구과장은 “광릉숲의 가치는 자연림 못지않게 인공림에 있다. 90여 년 전부터 나무를 심어 가꿔온 광릉숲에서 우리나라 숲의 미래 모습을 볼 수 있다”라고 말했다. 임도인 직동로를 따라가며 광릉숲 인공림의 모습을 살펴봤다. 1914~1917년 심었다는 팻말이 붙은 낙엽송이 앞을 가로막는다. 가슴높이 둘레가 1미터가량이고 높이는 20여 미터로 하늘로 쭉 뻗은 모습이 “낙엽송은 쓸모없다”는 세간의 평가를 무색하게 했다.

심은 지 80년이 지난 상수리나무도 마을 주변에서 보던 것과는 달리 상처 없이 미끈하게 자라나 있다. 상수리나무 밑에 잣나무와 전나무가 자라는 복층 숲에서 인공림이라는 느낌은 들지 않는다. 김 박사는 “조림한 지 약 30년이 지난 우리나라의 인공림을 잘 가꾼다면 광릉숲처럼 아름답고 가치 있는 숲으로 만들 수 있다”라고 강조했다. 실제로 1928년 조림한 전나무숲 바닥에는 어린 전나무가 빼곡하게 돋아나고 있었다. 언제든 상층의 관목을 제거하면 전나무숲이 형성될 수 있다. 독일의 가문비나무숲처럼 전나무의 천연 갱신림이 형성될 여지가 80여 년 만에 마련된 것이다. 그는 임업을 ‘3세대 산업’이라고 했다. 할아버지가 심고 아버지가 가꿔 자식이 혜택을 보는 산업이다. 우리의 임업은 이제 2세대인데, 자식 세대가 누릴 혜택을 우리가 보겠다고 나서면 안 된다는 것이다.

90~100년을 주기로 순환하는 임업의 유장한 호흡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있다. 능내로 임도를 따라가면 1964년 식재한 잣나무숲이 나온다. 나무를 얼마나 조밀하게 심는 것이 바람직한지 알아보기 위한 시험림이다. 2001년 헥타르당 3,000그루를 심는 게 가장 낫다는 중간 결론이 나왔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지 47년째 지켜보고 있다.

광릉숲은 ‘숲의 바다’이지만 그 바다엔 길이 나 있다. 광릉숲은 65개의 임반(林班, 산림의 위치와 넓이를 표시하여 측량이 편리하도록 구분하는 큰 단위)으로 나뉘고 각 임반은 또 여러 개의 소반(小班)으로 나뉜다. 임반은 모두 13개 노선 45킬로미터의 임도를 통해 접근하도록 돼 있다. 광릉숲의 관리 지도를 보면 마치 동네 부동산 소개업소의 지번도를 보는 것 같다. 수백 년 동안 손대지 않은 천연 활엽수림과, 그것을 둘러싸고 전국 평균의 약 4배인 헥타르당 255세제곱미터의 목재가 축적돼 있는 인공림은 광릉숲의 두 얼굴이다.

세조는 1468년 자신의 능이 들어설 자리를 능림으로 정한 뒤 능 주변과 진입로에 소나무, 전나무, 잣나무를 심고 능과 산을 관리하는 직책 능원과 산직을 두어 보살폈다. 그러나 당시의 나무가 살아남은 것은 없다. 해방과 한국전쟁 이후의 시기는 광릉숲의 최대 시련기였다. 풀뿌리까지 캐 땔감으로 쓰던 시절이라 도벌이 횡행했다. 임업연구원(현 산림과학원)이 2003년 펴낸 《광릉시험림 90년사》를 보면, 1965년 광릉출장소의 주 임무는 도벌꾼으로부터 나무를 지키는 일이었다. 초막을 짓거나 잠복근무를 하면서 지켰는데도 역부족이었다. 심지어 도벌꾼과 폭력배가 임업시험장 안에 쳐들어와 난동을 부리는 일도 있었다. 1980년 전두환 정권이 들어선 뒤엔 인근 군부대가 숲 115헥타르를 군사시설 터로 빼앗기도 했다.

민주화 이후에는 휴양지로 숲을 이용하고 개발하려는 욕구가 새로운 위협으로 떠올랐다. 1989년 시험림 일부가 산림욕장으로 개방됐고 수목원, 산림박물관, 야생동물원이 개장됐다. 관람객이 몰리면서 광릉숲 주변에 식당, 노래방 등이 우후죽순처럼 들어섰다. 마침내 1997년 광릉숲 보전 종합대책에 따라 산림욕장과 동물원이 폐쇄되고 수목원의 예약제와 관람인원 제한 조처가 시행됐다. 국립수목원은 1999년 광릉숲의 절반 면적을 관할하면서 독립했고, 나머지 숲은 현재 국립산림과학원 산림생산기술연구소가 관리하고 있다.

광릉숲에서 처음 발견된 희귀난 광릉요강꽃

ⓒ 김영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현재 ‘광릉’이라는 접두어를 가진 식물과 광릉에서 처음 발견돼 학계에 보고된 식물이 10종에 이른다. ‘광릉’으로 시작하는 식물로는 광릉요강꽃을 비롯해 광릉골무꽃, 광릉물푸레나무, 광릉제비꽃, 광릉개고사리 등이 있다. 광릉에서 처음 발견돼 학계에 보고됐기 때문이니, 고향이 광릉이라고 할 수 있다. 광릉이라는 이름이 붙지는 않지만 광릉에서 처음 발견된 식물도 적지 않다. 노랑앉은부채, 개싹눈바꽃, 털음나무, 흰진달래, 털사시나무 등이 그런 예이다. 이 식물들은 나중에 광릉 이외의 장소에서도 자생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이처럼 적지 않은 식물이 광릉에서 처음 학계에 알려진 이유는 우리나라 식물의 약 30퍼센트를 기재한 일본 식물학자 나카이 다케노신(中井猛之進)이 광릉시험림에서 조선총독부의 촉탁연구원으로 근무하면서 조사를 하러 다닌 결과이다.

일반인에게 광릉숲은 산책과 여가의 공간이지만, 그보다 소중한 것들이 그곳에 있다. 소리봉 주변의 천연림과 한 세기 가까이 가꿔온 시험림 그리고 각종 식물연구시설이 그것이다. 생물다양성의 시대에 대규모 식물원으로서 광릉숲이 지닌 가치는 더욱 커질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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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임업연구원, 《광릉시험림 90년사》(2003)

조홍섭 집필자 소개

환경과 과학 분야에서 30년 가까이 통찰력과 이슈가 있는 기사와 칼럼을 써온 우리나라 환경전문기자 1세대이다. 생태보전, 원자력발전, 4대강 개발 등 1980년대 이 후 급부상하는 환경 현안들을..펼쳐보기

출처

자연에는 이야기가 있다
자연에는 이야기가 있다 | 저자조홍섭 | cp명김영사 도서 소개

동물행동, 생태학부터 진화론, 동물복지, 자연사까지 기초자연과학과 첨단응용과학을 넘나들며 펼치는 흥미롭고 감동적인 생명들의 이야기. 살아 있는 그 모든 것들이 펼쳐내는..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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