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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야자키 하야오의 장편 애니메이션 〈바람계곡의 나우시카〉에는 산업문명이 붕괴한 뒤 곰팡이가 지배하는 세계가 나온다. 거대한 곰팡이 숲에서 피어오른 포자가 방사능과 독성물질에 오염된 세상에 눈처럼 휘날리는 모습이 섬뜩하게 아름다웠던 기억이 난다. 그곳을 부패의 바다, 곧 ‘부해(腐海)’라고 작가는 불렀다. 바로 균류의 세계이다.

곰팡이, 버섯, 효모로 이뤄지는 균류는 동물도 식물도 아닌, 그리고 박테리아와도 구별되는 독립된 왕국을 이룬다. 권오길 강원대 명예교수의 쏙쏙 들어오는 설명을 인용하자면 “낯짝의 버짐, 발가락 사이의 무좀, 이불이나 책갈피에 피는 곰팡이나 가을 송이가 다 한통속”이다. 균류는 죽은 생물체 등 유기물을 분해해 식물이 섭취할 수 있는 무기물로 만들어 자연의 순환고리를 이어주는가 하면, 발효에 관여하고 약용물질을 생산하는 등 인간을 위해서도 없어서는 안 되는 존재다. 하지만 균류가 지닌 무서운 얼굴을 잊어서는 안 된다. 병원성 곰팡이가 세계에 어두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2012년 4월 12일자 〈네이처〉는 영국 임피리얼 칼리지 런던의 매슈 피셔(Matthew Fisher) 박사 등의 논문을 ‘곰팡이 공포’라는 제목의 표지기사로 실었다. 연구진은 지난 20년 동안 세계적 추세를 분석해 곰팡이로 감염되는 병이 박테리아와 바이러스를 합친 것보다 동식물과 생태계에 더 큰 위협이 되고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곰팡이는 해마다 쌀, 밀, 옥수수, 감자, 콩 등 주요 작물 1억 2,500만 톤의 수확 감소를 초래하는데, 이는 6억 명이 먹을 식량이다. 연구진은 만일 5대 작물이 동시에 곰팡이로 인한 타격을 입는다면 그 피해는 9억 톤에 이를 수 있으며 이는 42억 명이 굶주리는 세계적 기근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했다.

사실 곰팡이가 식물에 얼마나 큰 타격을 입힐 수 있는지는 19세기 아일랜드에서 100만 명의 목숨을 앗아간 감자병, 20세기 들어 영국에서만 2,500만 그루의 느릅나무를 고사시키는 등 유럽과 북아메리카에 큰 피해를 준 네덜란드느릅나무병의 사례에서 극적으로 드러난 바 있다. 동물도 재앙을 비켜가지 않음이 최근 드러나고 있다. 개구리 등 양서류의 피부에 감염돼 죽음에 이르게 하는 항아리곰팡이는 1997년 처음 발견된 이래 세계 54개국 500종에 번져 생태계 자체를 흔들고 있다. 세계의 모든 양서류 종의 절반이 이 곰팡이 때문에 감소하고 있고 중앙아메리카 일부 지역에서는 양서류 종의 약 40퍼센트가 사라졌다. 우리나라에서도 개구리의 약 8퍼센트가 이 곰팡이에 감염된 것으로 알려졌다.

항아리곰팡이에 감염된 개구리

ⓒ Lee Berger, James Cook University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항아리곰팡이에 감염된 개구리 피부의 전자현미경 사진

돌출된 둥근 물체가 곰팡이 포자이다.

ⓒ Center for Invasive Species Research, University of California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병원성 곰팡이는 개구리뿐 아니라 꿀벌, 바다거북, 산호, 가재, 물고기 등으로 확산되고 있다. 곰팡이는 생물 멸종을 초래하는 병원체의 70퍼센트를 차지한다. “우리는 ‘부패자’가 승리자가 되는 세계로 향하고 있다”는 피셔 박사의 우울한 예언은 ‘나우시카’의 부해를 떠올리게 한다. 사실 곰팡이는 약 2억 5,000만 년 전 지구 최대의 생물 멸종사태 때 세계의 숲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주역이기도 했다. 시베리아를 형성한 대규모 용암 분출로 인한 기후변화로 쇠약해진 방대한 침엽수림은 썩음병곰팡이의 공격에 맥없이 무너졌다.

병원체가 아무리 독성이 심해도 숙주를 멸종으로 몰아넣지는 않는다는 것이 생태계 원리이다. 감염 대상이 드물어지면서 병원체의 확산이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곰팡이는 다르다. 워낙 번식력이 높아 숙주의 밀도가 떨어지기도 전에 거의 모든 개체를 감염시킬 수 있다. 곰팡이의 포자는 어디에나 있다. 버섯 하나가 흩날리는 포자만 해도 지구의 인류보다 많다. 잔나비불로초라는 버섯이 6개월 동안 생산하는 포자를 다 합치면 5조 4,000억 개에 이른다는 보고도 있을 정도다. 게다가 포자는 어떤 악조건도 견뎌낸다.

문제는 병원성 곰팡이가 기승을 부릴 환경을 우리가 만들고 있다는 사실이다. 기후변화와 세계화에 따른 교역과 이동의 증가는 감염 기회를 늘린다. 또한 생태계 교란으로 신종 감염성 곰팡이가 진화할 가능성은 점점 커지고 있다. 균류는 죽음의 얼굴과 부활의 얼굴 모두를 갖고 있다. 어느 쪽이 드러날지는 인류에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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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 권오길, 《흙에도 뭇 생명이》, 지성사(2009)
  • ・ Matthew. C. Fisher et al., “Emerging fungal threats to animal, plant and ecosystem health”, Nature(12 April 2012). DOI: 10.1038/nature10947

조홍섭 집필자 소개

환경과 과학 분야에서 30년 가까이 통찰력과 이슈가 있는 기사와 칼럼을 써온 우리나라 환경전문기자 1세대이다. 생태보전, 원자력발전, 4대강 개발 등 1980년대 이 후 급부상하는 환경 현안들을..펼쳐보기

출처

자연에는 이야기가 있다
자연에는 이야기가 있다 | 저자조홍섭 | cp명김영사 도서 소개

동물행동, 생태학부터 진화론, 동물복지, 자연사까지 기초자연과학과 첨단응용과학을 넘나들며 펼치는 흥미롭고 감동적인 생명들의 이야기. 살아 있는 그 모든 것들이 펼쳐내는..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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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곰팡이의 습격자연에는 이야기가 있다, 조홍섭,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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