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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기가 있다
아마존은 원시림이 아니다
인간과 자연이 공존하는 길을 모색할 때 아마존 열대우림처럼 적절한 예는 없을 것이다. 해마다 4월 22일 ‘지구의 날’이 오면, 세계의 유력매체들은 아마존의 파괴와 훼손을 예로 들며 환경보전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숲을 태워 목장과 경작지로 만드는 현지 주민과 농업자본으로부터 ‘지구의 허파’를 지키자는 것이다. 앨 고어(Albert Gore) 전 미국 부통령은 “아마존은 우리 모두의 것”이라고 말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Mikhail Gorbachyov) 전 소련 서기장은 “브라질은 아마존에 대한 권리를 적절한 국제기구에 위임해야 한다”고 했고, 영국 총리였던 존 메이저(John Major)는 “아마존 지역에 대한 국제 환경운동은 (···) 실행단계에 접어들었으며 이 단계에서는 당연히 직접적인 군사적 간섭도 포함된다”고 선언했다.
브라질의 산림파괴가 극심했던 1980년대의 이야기이지만, 이런 생각은 아직도 일반인은 물론 세계 환경론자에게서 흔히 발견할 수 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아마존 열대우림에 대한 우리의 믿음은 상당부분 환상에 불과하다. 아마존은 지구의 허파가 아니며, 지구를 위해 아마존 주민들의 삶을 유보하고 개발을 억제하자는 주장은 심각한 주권 침해일 뿐이다.
아마존 유역의 면적은 650만 제곱킬로미터에 이른다. 남한 전체의 65배에 이르는 넓이이다. 페루 안데스 산맥에서 시작된 아마존 강은 적도를 따라 6,450킬로미터를 흐른 뒤 대서양에 도달한다. 1500년 아마존 강 하구를 탐험한 스페인 탐험가 비센테 핀손(Vicente Pinzón)은 자신이 ‘발견’한 것이 강인 줄 모르고 ‘짜지 않은 바다’라고 불렀다. 하구의 폭이 322킬로미터에 이르니 그럴 만도 했다.
세계 열대우림 식물종의 절반이 분포하는 아마존에 대한 가장 널리 퍼진 오해는, 이곳에서 식물이 광합성을 통해 방출하는 산소가 지구 전체 산소 생산량의 80퍼센트에 달한다는 것이다. 이런 주장은 아마존 숲이 사라지고 있다는 소식에 당장 숨이 막힐 듯한 위기감을 느끼게 만들기에는 적당해도, 과학적 근거는 전혀 없다. 아마존처럼 오래되고 성숙한 숲에서는 산소가 생산된 양만큼 소비된다는 것이 과학계의 상식이다. 숲의 양이 계속 늘어나는 젊은 숲은 광합성을 통해 이산화탄소를 목재 형태로 가둔 만큼 산소를 공기 속에 내뿜겠지만, 자란 만큼 죽어 분해되는 장년기 숲에서는 들고 나는 산소의 양이 비슷하다는 것이다. 사실 지구에 산소를 공급하는 주인공은 맨눈으로는 보이지도 않는 바닷물 속 식물플랑크톤이다. 바닷물 한 방울에 수십만 마리가 들어 있는 프로클로로코쿠스속 등 1988년 처음 발견된 극미소 플랑크톤은 광합성을 통해 지구 산소의 절반을 생산한다.
아마존에 관한 더 심각한 오해는 사람의 손길을 차단해야 아마존을 지킬 수 있다는 것이다. 서구 언론과 환경단체에 널리 퍼진 이런 생각의 뿌리는 깊다. 미국의 저널리스트인 마크 런던(Mark London)과 브라이언 켈리(Brian Kelly)는 25년 동안의 아마존 취재 기록을 담은 책 《숲 그리고 희망(The Last Forest)》에서 아마존 연구의 권위자인 베티 메거스의 1950년대 연구가 아마존에 대한 편견을 만들었다고 지적했다. 메거스의 연구는 요컨대, 아마존의 토양은 양분이 폭우에 씻겨나가 너무 척박하기 때문에 지속적인 문명을 건설할 여건이 되지 못한다는 내용이다. 그는 자신의 이론을 확장해 아마존이 건드리면 쉽게 파괴되는 놀랄 만큼 복잡한 모래성 같다는 주장을 폈다. 이런 주장은 1970년대 아마존 횡단 고속도로 건설 등으로 인해 아마존의 산림이 황폐화되자, 아마존에 손을 대면 안 된다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증거로 받아들여졌다.
그러나 1990년대 들어 아마존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보는 경험적인 연구결과들이 잇따라 나왔다. 인간은 오래전부터 아마존에 살아왔으며, 따라서 아마존은 잃어버린 낙원이 아니라 인간에 의해 변형된 자연이라는 것이다. 1992년 〈미국지리학회지(American Geography Journal)〉에 발표된 연구에 따르면 유럽인이 들어가기 훨씬 전부터 원주민들은 아마존을 환경과 조화를 이루는 방식으로 개발해왔다는 것이다. 마크 런던과 브라이언 켈리는 앞의 책에서 “인간은 결코 아마존을 그대로 둔 적이 없다. 1만 년 이상 된 열대우림 대부분은 순수하지도, 원시적이지도 않았다. 유럽인들이 질병을 퍼뜨리고 잔인한 방법을 사용하기 전, 초기 문명이 성공적으로 아마존에 정착했다면 다시 성공하지 말란 법이 없지 않은가?”라고 묻고 있다.
콜럼버스 일행이 가혹한 기후와 질병을 무릅쓰고 아메리카를 ‘발견’했을 때 이미 수만 명의 원주민이 문명을 이루고 잘 살고 있었듯, 유럽에서 이주한 청교도들이 한 번도 도끼질을 당해본 적이 없는 수백 년 된 참나무를 베어내 집을 지었다는 얘기도 신화이기는 마찬가지다.
자연보전을 입에 올리기는 쉽다. 사람의 접근을 막으면 자연은 저절로 살아날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실제로 자연으로부터 사람을 내쫓는 방식의 자연보호는 성공한 적이 없다. 자연을 섬세하게 이해하고 지속가능한 방식으로 이용하는 법을 아는 이들이 사라지면, 자연에 무지하고 냉혹하게 이윤만 추구하는 도시인들이 몰려들기 때문이다. 결국 자연을 어떻게 현명하게 관리할 것인지가 관건이다. 텃밭을 가꾸는 사람이 바로 자연을 지혜롭게 다룰 줄 아는 사람이다.
텃밭은 작은 경이를 안겨준다. 고추, 열무, 토마토 같은 채소를 슈퍼마켓에서 구입하는 것과 모종을 심고 물과 퇴비를 주어 수확하는 것은 전혀 다르다. 농산물의 소비자와 생산자라는 차이만이 아니다. 텃밭은 우리에게 자연을 느끼게 한다. 텃밭 가꾸기는 농산물을 생산하는 행위를 넘어 맑은 공기를 마시고 흙냄새를 맡으며 밭에서 사는 온갖 생물과 접촉하는 기회를 제공한다. 텃밭 농사는 더 근본적인 성찰의 시간이기도 하다. 채소를 재배하다보면 책상 앞에서는 생각지도 못한 문제와 부닥치게 된다.
먼저 잡초와의 전쟁이 시작된다. 일주일만 한눈을 팔면 밭의 주인이 바뀌고 만다. 억울하게도 제 이름 대신 ‘잡초’로 뭉뚱그려지는 다양한 식물들은, 밭처럼 햇빛이 잘 들고 경쟁자가 없는 곳의 개척자로 진화했다. 잡초는 재빨리 신천지를 장악하고 신속하게 자라 번식하는 억센 속성을 타고났다. 그에 맞서 농부는 잡초만 골라 제거하는 ‘자연선택’을 함으로써 작물만의 세상을 창조한다. 뿌리째 뽑혀 시들어가는 잡초가 불쌍하다는 생각을 하는 농부는 없다. 농작물은 자연계의 기준으로 본다면 터무니없이 연약하고 사람이 수확하는 부위가 비대해진 기형적인 식물이다.
잡초 말고도 새와 곤충, 토양생물들이 농작물을 노린다. 그러지 않는 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다. 이랑에 나란히 뿌려진 콩을 발견한 굶주린 멧비둘기를 어떻게 나무랄 수 있을까. 그렇다면 텃밭 농부는 자신의 이익만을 생각하는 자연 파괴범인가. 텃밭을 가꿔본 사람이라면 이런 질문에 화를 낼 것이다. 농사를 지어본 사람은 자연을 더 잘 이해하기 마련이다. 자연은 사람과 분리되었을 때보다 그 속에 사람을 받아들일 때가 더 ‘자연적’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자연을 현명하게 이용하고 보전하는 지혜를 배울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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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마크 런던 · 브라이언 켈리, 《숲 그리고 희망》, 조윤경 옮김, 예지(2009)
글
출처
동물행동, 생태학부터 진화론, 동물복지, 자연사까지 기초자연과학과 첨단응용과학을 넘나들며 펼치는 흥미롭고 감동적인 생명들의 이야기. 살아 있는 그 모든 것들이 펼쳐내는..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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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아마존은 원시림이 아니다 – 자연에는 이야기가 있다, 조홍섭,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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