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출처 자연에는 이
야기가 있다

물길 바람길 다스리는 나무 병풍 마을숲

고향 하면 떠오르는 풍경의 한가운데에 ‘마을숲’이 있다. 마을 들머리나 앞들, 갯가, 뒷동산의 솔밭이나 느티나무 고목 아래에서 마을 제례와 축제가 벌어지곤 했다. 한국인에게 이런 원초적 향수를 불러일으키는 대표적인 고향 경관이자 사람과 자연이 교감하는 최소 생태단위인 마을숲이 산업화와 농촌 붕괴와 함께 급격히 사라지고 있다. 최근 시민운동단체와 정부, 지자체가 마을숲 복원에 나서고 있지만 아직 훼손을 막기에는 미약한 형편이다.

마을숲은 마을의 역사, 문화, 신앙 등을 바탕으로 인위적으로 조성되고 유지돼온 숲을 가리킨다. 마을숲의 명칭은 숲을 뜻하는 ‘수’ ‘쑤’ ‘림’ 등의 접미사를 달거나, ‘수구막이’ ‘성황림’ ‘숲정이’ ‘숲마당’ ‘당숲’ 등으로 불리기도 한다. 신라 때 함양 태수 최치원이 조성한 함양 상림과 1648년 담양의 홍수피해를 막기 위해 부사 성이성이 쌓은 제방에 조성한 관방제림은 널리 알려진 마을숲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마을숲에 대한 조사로는 조선총독부가 1938년 펴낸 《조선의 임수》가 처음이다. 목재 벌채를 목적으로 대규모 숲만을 대상으로 한 이 조사에서 전국의 마을숲은 141개로 집계됐다. 김학범과 장동수는 1987년부터 6년간 전국적인 조사를 바탕으로 우리나라의 전통 마을숲을 정리했다. 이 책을 보면, 전국의 마을숲은 약 400개이며 1938년 조사 때 있던 곳 가운데 92곳이 숲의 기능을 상실했다. 서울에 있던 동대문구 창신동 · 휘경동의 왕산로 주변숲, 동대문구 제기동의 선농단, 마포구 망원동 망원정 주변숲, 마포구 합정동 양화진 도로변숲, 종로구 방산동 조산, 청계천 임수 등 아홉 곳의 마을숲이 모두 사라졌다. 남은 마을숲은 강원 · 경북의 영동해안과 경북 북부지역, 전남 남해안지역, 소백산맥의 지리산 주변, 충청도 서부지역에 집중 분포하고 있다.

마을숲의 규모는 대체로 1,000~3만 3,000제곱미터이며 수종은 소나무와 느티나무가 많다. 소나무숲에는 풍수지리나 유교적 배경이 많은 반면 느티나무숲은 토착신앙적 배경을 갖는 예가 많다. 마을이 외부에 노출되지 않고 둘러싸인 경관을 만들기 위해 마을숲을 만들기도 한다. 입지별로는 동구숲, 동산숲, 호안숲, 해안숲, 마을주변숲 등으로 나누는데, 강이나 하천변의 호안숲이 가장 많다. 마을숲의 생태적 특징은 한꺼번에 심어 비슷한 연령의 한두 수종이 우세하고, 이용에 방해가 되는 하층식생을 제거해 땅 표면이 드러나고 뿌리가 노출되는 경향이 많다. 또한 인근 지역에 자생하는 수종을 주로 심으며 후계림이 잘 양성되지 않아 늙고 큰 나무로만 숲이 구성되곤 한다. 한경대 조경학과 김학범 교수는 “농촌과 마을공동체가 붕괴하면서 도시 주변에 남아 있는 마을숲들이 곧 사라질 운명에 놓여 있다. 전국에 1,000여 개가 남아 있을 것으로 추정되는 마을숲에 대한 국가 차원의 조사와 연구가 시급하다”라고 말했다.

경기도 이천시 백사면 송말2리에 있는 송말숲(연당숲)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던 임내신이 1520년 낙향해 이룬 풍천임씨 집성촌에서 조성한 마을숲으로, 전형적인 수구막이로 꼽힌다. 풍수이론에서 수구(水口)란 단지 물이 흘러나가는 곳이 아니라 번영, 다산, 풍요 등의 기운이 나가는 곳이므로 수구를 막아야 좋은 묏자리가 된다고 보았다. 송말2리는 수구막이와 함께 연못을 만들어 이런 상서로운 기운이 마을에 머물도록 했다. 이 마을은 산자락이 마을을 에워싼 모습이 풍수지리상 물 위에 연꽃이 피어 있는 ‘연화부수형(蓮花浮水形)’ 형국이다. 원적산 줄기가 양쪽으로 뻗어내려 마을을 감싸 안는 지형인데, 마을 앞쪽에 시냇물이 흘러나가는 터진 곳(수구)에 마을숲을 만들어 양쪽 산줄기와 연결했다.

두 아름이 넘을 듯한 느티나무 거목들이 줄지어 늘어선 숲 속은 어둑했다. 숲을 넘어가면 너른 들판과 마을이 자리 잡고 있었지만 숲 밖에서는 전혀 보이지 않았다. 숲은 마을의 안과 밖을 자연스럽게 차단하고 있었다. 수구막이를 한 이유는 풍수이론에 따른 것이지만 마을을 안온하고 정서적으로 편하게 만들고, 외부의 시선을 차단하는 실질적인 효과도 거둔 셈이다.

송말숲은 수구막이의 생태학적 의미를 과학적으로 입증하는 연구가 이뤄지는 곳이기도 하다. 국립산림과학원과 서울대 환경대학원 연구진은 마을숲 안팎의 풍향, 풍속, 온도 차이를 정밀 측정해, 실제로 이 숲이 바람을 누그러뜨려주고 봄 갈수기에는 안쪽 논의 수분 증발을 억제하는 기능을 한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국립산림과학원 박찬열 · 최명섭 박사와 서울대 환경대학원 고인수 · 이도원 교수팀은 2004년부터 기상관측을 통해 송말숲이 마을의 미기상(微氣象), 즉 지면에 접한 대기층의 기상에 끼치는 변화를 연구했다. 그 결과 마을숲이 낮 동안 주로 부는 골바람과 이 지역 주풍인 남서풍을 막는 방풍림 구실을 톡톡히 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마을숲에서 숲 높이의 2배인 40미터 떨어진 곳에서 봄에 관측한 풍속은 숲 바깥보다 남동풍일 때 평균 20퍼센트, 남풍일 때 25퍼센트, 남서풍일 때 45퍼센트 줄어들었다. 또한 이런 풍속저감 효과가 숲에서 120미터 떨어진 곳까지 미친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풍속이 줄어들면 주변에 비해 온도 상승, 습도 증가, 증발량 감소 같은 미기상 변화가 나타난다. 실제로 연구팀은 겨울철 남풍이 불 때 숲 바깥들과 안들 사이에 체감온도 차이가 최고 3도에 이른다는 사실을 밝혔다. 숲 안쪽이 바깥보다 온도가 높고 풍속이 약하기 때문에 생긴 현상이다. 여름철엔 마을숲 안이 밖보다 기온이 1~2도 낮았다. 8월 4~6일 낮 동안 숲 바깥에선 불쾌지수가 모두 불쾌하다고 느끼는 수준인 83 이상이었지만 숲 안에서는 83을 넘어가는 시간이 절반에 그쳤다. 주민들은 이런 효과를 이미 체감하고 있었다. 주민들은 “어릴 때부터 아무리 바람이 매운 겨울에도 숲 안쪽으로 들어오면 갑자기 푸근하게 느껴지곤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송말숲은 다른 마을숲에 닥친 문제를 고스란히 안고 있기도 하다. 주민들의 소중한 생활공간이던 마을숲은 외지인들의 유원지가 됐다. 이를 막기 위해 울타리를 둘러쳐야 할 지경이었다. 마을숲 안에도 이천 시민들의 단체행사를 위한 무대 등 각종 시설이 들어섰다. 400여 년 동안 이어진 이 숲에는 평균 수령이 150살인 느티나무, 상수리나무, 음나무 거목들이 들어서 있지만 앞으로 숲을 이어갈 후계목은 자라지 않고 있다. 주민의 노령화와 함께 외지인의 전원주택이 늘어나면서 전통 마을숲은 점차 마을과 멀어지고 있다.

경북 예천군 용문면 상금곡리 금당실마을은 조선 중기 《정감록》이 난세에도 전쟁이나 흉년의 피해가 없는 길지로 꼽은 십승지(十勝地)의 하나이다. 이곳을 최고의 명당으로 만든 지형은 소백산 줄기의 높은 산자락이 포근하게 둘러싼 넓은 들과 마을을 굽이치는 금곡천이다. 한 가지 허점이 있었으니, 마을 앞쪽에 터진 부분이다. 1500년대에 이런 풍수적 결함을 보완하는 솔숲을 조성했다. 마을사람들이 ‘솔둥지’라고 부르는 마을숲에는 수령 250~300년 된 소나무 거목이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애초 2킬로미터 길이로 마을을 모두 감싸 안았던 이 금당실솔숲은 현재 4분의 1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다. 이만큼이나마 솔숲을 보전할 수 있었던 것은 마을 주민들의 오랜 보전 노력 덕분이다.

경북 예천의 마을숲 금당실솔숲 내부

350~400년 수령의 소나무 600여 그루가 마을숲을 이룬다.

ⓒ 김영사 | 저작권자의 허가 없이 사용할 수 없습니다.

‘사상송계’는 금당실 주민들이 소나무를 보호하기 위해 1890년대 초 결성한 모임이다. 1903년에 작성된 명부에는 계의 목적으로 “선대유산을 영구 지속한다”고 명시하고 있다. 솔숲이 주민의 삶 속에 깊이 뿌리내리게 된 데는 역사적 배경이 있다. 1892년 마을의 주산(主山)인 오미봉에서 금을 채광하려던 러시아 광산회사 소속 광부들과 마을의 지기가 끊어진다며 이를 가로막던 주민들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광산회사 현장책임자 2명이 숨지는 사건이 일어났다. 러시아와의 외교문제로까지 번진 이 사건 때문에 주민 2명이 구속됐고 사건이 확대되면서 마을의 존립이 위태로워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마을에서는 배상금과 로비자금 마련을 위해 공동재산인 금당실솔숲의 소나무를 베어 팔았으니, 소나무는 마을을 지켜준 보배인 셈이다.

현재 솔숲을 이루는 것은 당시의 어린 나무와 새로 심은 소나무가 자란 것인데, 소나무 하나하나에 예천군이 관리하는 표찰이 붙어 있고, 휴계림을 육성하는 것은 물론 빈자리에 보식(補植)도 이뤄지고 있다. 이 숲이 전에는 어른과 아이들이 모두 모여들어 쉬고 생활하는 터전이었지만 지금은 문화재에 견줄 만한 공간이 된 것이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 ・ (사)생명의숲국민운동, 《조선의 임수》, 지오북(2006)
  • ・ 김학범 · 장동수, 《마을숲-한국전통부락의 당숲과 수구막이》, 열화당(1994)

조홍섭 집필자 소개

환경과 과학 분야에서 30년 가까이 통찰력과 이슈가 있는 기사와 칼럼을 써온 우리나라 환경전문기자 1세대이다. 생태보전, 원자력발전, 4대강 개발 등 1980년대 이 후 급부상하는 환경 현안들을..펼쳐보기

출처

자연에는 이야기가 있다
자연에는 이야기가 있다 | 저자조홍섭 | cp명김영사 도서 소개

동물행동, 생태학부터 진화론, 동물복지, 자연사까지 기초자연과학과 첨단응용과학을 넘나들며 펼치는 흥미롭고 감동적인 생명들의 이야기. 살아 있는 그 모든 것들이 펼쳐내는..펼쳐보기

전체목차
전체목차
TOP으로 이동
태그 더 보기

우리나라 숲

추천항목


[Daum백과] 물길 바람길 다스리는 나무 병풍 마을숲자연에는 이야기가 있다, 조홍섭, 김영사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