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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기가 있다
보부상 노래 깃든 울진 금강소나무숲길
“여러분은 오늘 하루 금강소나무와 산양이 사는 이 숲을 전세 냈습니다.” 경북 울진군 북면 두천1리에서 금강소나무숲길 탐방에 나선 참가자들에게 숲해설가이자 이 마을 주민인 최윤석 씨가 말했다. 여기서부터 13.5킬로미터 떨어진 소광2리까지 약 일곱 시간 동안 차량도 사람도 만나지 않고 숲길을 걸을 수 있다는 얘기다. 뿌듯해하던 탐방객들은 목적지까지 가는 동안 매점, 화장실, 샘터는 물론이고 탈출로도 없다는 설명에 마음을 다잡는다. 이곳은 국내에서 유일하게 미리 예약한 하루 80명에게만 해설가의 안내로 개방하는 숲길이다.
두천1리에서 숲길로 접어들자마자 쇠로 된 비석 2개가 길가 비각에 보존돼 있다. 조선 말 봉화 소천장을 관리하던 이들의 은공을 잊지 말자는 공덕비이다. 이 숲길이 조선시대 보부상과 뒤이은 선질꾼(지게꾼) 등 수많은 행상이 동해와 내륙의 물산을 나르던 ‘동해의 차마고도’였음을 보여준다. 동해안의 울진, 죽변, 흥부 장에서 구입한 미역, 간고등어, 소금 등을 짊어지고 내륙인 봉화 소천장에 가려면 어디서 오든지 반드시 바릿재를 오르기 전 두천리에서 하루 묵어야 했다. 1960년대까지 소장수들이 드나들어 주막이 번성했던 두천1리는 이제 금강소나무숲길 1구간의 시발점으로 다시 사람들의 발길을 불러 모으고 있다.
탐방객들은 오전 아홉시 두천1리를 떠나 바릿재와 임도를 지나 찬물내기에서 주민들이 만든 점심을 먹는다. 새벽에 말래(두천리) 주막을 떠난 보부상들은 보통 이보다 2배 거리를 걸어야 나오는 느삼밭에서 지고 다니는 옹기솥으로 밥을 해먹었다고 한다. 수십 킬로그램의 등짐 · 봇짐을 지거나 지게에 이고 소를 몰면서, 맨손의 탐방객 못지않은 속력을 낸 것이다.
여름을 맞은 숲길은 꿀풀, 털중나리, 인동 등의 꽃으로 화사하고, 산 능선에는 나무껍질이 붉은 금강소나무가 병풍처럼 늘어서 이 숲길의 주인임을 과시한다. 숲길은 산림유전자원보호림과 왕피천 생태경관보호지역 사이를 관통한다. 금강소나무가 대부분인 자연림이 숲길 주변의 90퍼센트를 차지한다. 이곳은 비무장지대를 빼고는 멸종위기종 1급인 산양이 가장 많이 사는 곳이기도 하다.
숲길의 ‘깔딱고개’인 샛재를 넘으면 보부상이 반드시 들러 행로의 안전과 번영을 기원하고 갔다는 성황사가 나온다. 여기서 소광2리의 해설가 박영웅 씨가 일행을 넘겨받았다. 어릴 때 장을 보러 이 숲길을 한 달에 한두 번은 오갔다는 박씨는 그때 배운 바지게꾼의 노래를 들려줬다.
미역 소금 어물 지고 춘양장을 언제 가노
가노 가노 언제 가노 열두 고개 언제 가노
시그라기 우는 고개 내 고개를 언제 가노
한평생 넘는 고개 이 고개를 넘는구나······
꼬불꼬불 열두 고개 조물주도 야속하다······
샛재 주변에는 어명을 받아야만 베어낼 수 있었던 금강소나무 거목들이 문화재 복구용이라는 노란 띠 표지를 두르고 서 있다. 샛재를 넘어 느삼밭재에 이르는 구간은 계곡을 따라 푹신한 솔잎을 밟으며 하늘을 가린 활엽수 지붕 밑으로 걷는 곳이다. 서어나무, 고로쇠나무, 까치박달나무 등이 우거졌고 과거 화전민의 집터와 습지로 변한 묵논이 곳곳에 나타난다. 숲길 1구간의 종착점인 소광2리에 도착한 탐방객들은 숲길에 쓰레기나 인공 시설물이 거의 없어 자연성이 뛰어나다고 입을 모은다.
불영계곡 옆으로 국도 36호선이 뚫리기 전까지 내륙인 경북 봉화와 바닷가인 경북 울진을 잇는 가장 가까운 길은 십이령 길이었다. 이 길은 조선시대부터 방물고리에 댕기, 비녀, 얼레빗, 분통 등을 담아 멜빵에 맨 봇짐장수(보상)와 지게에 생선, 소금, 토기, 목기 등을 진 등짐장수(부상)를 일컫는 보부상의 길이기도 했다. 물류 통로인 십이령 길은 거의 일직선으로 뚫려 있다. 에둘러 갈 여유가 없으니 수많은 고개를 넘는다. 큰 고개만 해도 바릿재, 평밭, 샛재, 느삼밭재, 너불한재, 저진치, 한나무재, 넓재, 고치비재, 멧재, 배나들재, 노루재 순으로 12개를 넘어야 한다. 작은 고개는 30~40개에 이른다.
조선시대 보부상은 이후 선질꾼으로 바뀌었는데, 이들이 거래한 물목은 울진 · 흥부의 바다에서 얻은 미역, 각종 어물, 소금과 내륙지방에서 생산된 쌀, 보리, 대추, 담배, 옷감 등이었다. 이들은 울진에서 봉화까지 무거운 짐을 짊어지고 130리 길을 3박 4일 동안 주파했다. 안동의 간고등어가 유명해질 수 있었던 건 이들이 길바닥에 뿌린 땀방울 덕분이었다.
울진문화원이 발간한 《가노 가노 언제 가노 열두 고개 언제 가노》를 보면, 선질꾼은 가지가 없는 지게를 지고 가다 선 채로 쉬었는데, 밥을 지어 먹기 위해 도기로 만든 솥과 여벌 짚신을 꼭 달고 다녔다. 또한 소장수들은 고개를 넘으면서 소의 발굽이 상하는 것을 막기 위해 밤새 수십 켤레의 ‘소 짚신’을 만들어 신겼다고 한다. 행상이 머무는 곳마다 주막이 있었는데, 숙박비는 따로 받지 않고 밥과 술값을 받았으며 잠을 자는 봉놋방은 장작을 넉넉히 때 따로 이부자리가 없었다고 한다. 그러나 행상 중에는 집 없이 처자를 이끌고 장삿길에 오르는 이도 적지 않았다. 최윤석 숲해설가는 “길 위에서 들꽃을 꺾어 혼인하고 주막에서 아이 낳은 가난한 상인의 삶의 애환이 깃든 곳이 바로 이 숲길”이라고 말했다.
요즘 전국에서 숲길과 걷는 길이 인기이지만 금강소나무숲길은 미리 예약한 방문객 하루 80명만을 교육받은 해설가가 안내한다는 점에서 독특하다. 건국대 환경과학과 김재현 교수는 이것을 “절제와 협력을 바탕으로 한 거버넌스 체제”라며 “물리적인 길을 조성하는 데 급급하거나 급증하는 방문객으로 인한 부작용 때문에 갈등을 빚지 않도록 지역주민과 지원 시스템이 잘 융합했다”라고 평가했다.
아름다운 숲길 아이디어는 이 지역의 자연생태를 지키기 위해 댐, 온천, 도로 건설을 반대해온 녹색연합과 지역 시민운동가들에게서 나왔다. 녹색연합 배제선 팀장은 “워낙 반대운동으로 악명이 높아 처음엔 명함 내밀기도 힘들었다. 그러나 빼어난 자연을 노린 난개발을 막고 지역 공동체를 유지할 수 있는 개발을 모색하면서 숲길을 추진하게 됐다”라고 설명했다. 환경단체이면서도 “주민이 중심이고 산양은 그다음”이었다. 생태조사 등 3년간의 준비 끝에 2010년 제1구간이 개통됐다. 산림청이 사업비를 댔고 사단법인 ‘울진숲길’이 위탁운영을 하고 있다. 전체는 4개 구간으로 70킬로미터에 이른다. 숲해설가 6명은 소광2리와 두천1리 주민이 맡고 있다. 두천리 울진숲길의 장수봉 운영위원장은 “적적한 시골생활에서 민박손님과 이야기를 나눠 재미있고 보부상 길의 의미를 알아줘 자긍심을 느낀다”고 말했다. 울진숲길 이규봉 사무국장은 “민박과 식사, 농산물 구입 등으로 얻는 농외소득이 주민에게 도움이 된다”고 밝혔다.
걷기 열풍을 타고 전국 곳곳에 걷는 길이 조성되고 있다. 하지만 대개 자연은 걷는 이의 여가와 건강을 위한, 또 주민의 소득을 위한 수단일 뿐이다. 자연과 주민, 그들이 엮어내는 이야기가 있는 ‘울진숲길’은 그런 점에서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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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울진문화원, 《가노 가노 언제 가노 열두 고개 언제 가노》(2010)
글
출처
동물행동, 생태학부터 진화론, 동물복지, 자연사까지 기초자연과학과 첨단응용과학을 넘나들며 펼치는 흥미롭고 감동적인 생명들의 이야기. 살아 있는 그 모든 것들이 펼쳐내는..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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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보부상 노래 깃든 울진 금강소나무숲길 – 자연에는 이야기가 있다, 조홍섭,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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