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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기가 있다
행복한 돼지는 더럽다
돼지는 진흙탕 목욕을 좋아한다. 멧돼지는 늘 다니는 길의 물웅덩이에서 하루에도 몇 번씩 뒹굴며 시간을 보낸다. 그런 본능을 잊지 못한 밀식 사육장의 돼지는 자기 배설물 위에라도 드러눕는다. 이러한 돼지의 진흙목욕이 체온을 조절하기 위한 행동일 뿐 아니라 몸속에 각인된 행동으로서 동물복지에 중요한 요인이라는 주장이 나왔다. 네덜란드 와게닝언 대학 및 연구센터의 가축 연구자는 돼지의 진흙목욕 행동에 관한 66편의 과거 연구를 검토한 끝에 이런 결론을 얻었다고 발표했다.
그의 연구는 진흙목욕이 돼지에게서 흔히 보이는 행동이고 현재의 사육시스템이 이런 욕구를 거의 충족시켜주지 못하는데도 동물복지 관점에서 관심이 없다는 문제의식에서 출발했다. 진흙 수렁이 있는 곳에서 돼지는 하루에 최고 15번까지 1~9분 동안 목욕을 즐긴다. 수렁 속에 몸을 굴리면서 진흙을 묻히고, 목욕 뒤에는 마른 진흙을 떨어내는 몸단장을 한다.
이 논문은 돼지가 진흙목욕을 즐기는 데는 진화론적 뿌리가 있다고 보았다. 돼지와 유전적으로 가까운 하마, 물소, 고래는 모두 진흙목욕을 좋아한다. 이들은 몸에 털이 적고 땀샘이 발달하지 않았다. 물소의 땀샘 밀도는 보통 소의 6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북극에 사는 흰돌고래도 자갈이 깔린 얕은 바다에서 진흙목욕 비슷한 행동을 통해 낡은 피부를 벗겨낸다.
그렇다면 돼지는 왜 진흙목욕을 할까. 연구진은 그동안의 연구를 통해 체온조절, 해충 퇴치, 피부 관리, 성적 행동 등에서 동기를 찾았다. 이 가운데 과학적으로 인정받은 동기는 체온조절이다. 돼지의 몸은 쉽게 과열된다. 지방층이 단열재 구실을 하는데다 땀샘도 적고 몸이 통 모양이어서 체중당 표면적도 작다. 게다가 하루에 1킬로그램씩 자라는 빠른 성장속도도 많은 열을 발생시킨다. 진흙목욕은 체온을 2도 떨어뜨리는 효과를 낸다. 몸에 들러붙은 진흙은 약 2시간에 걸쳐 서서히 마르면서 증발열을 빼앗아가, 피부에 바른 물이 마르기까지의 시간인 15분보다 체온감소 효과가 오랫동안 지속된다.
정량적 증거가 부족하지만 체온조절 이외의 목욕 효과도 무시할 수 없다. 멧돼지는 진흙목욕을 통해 부상을 치료하며, 햇빛의 자외선을 차단하고, 진드기 등 기생충을 제거하며, 냄새 확산을 통해 영역을 확보한다. 실제로 돼지는 체온조절이 필요 없는 추운 날에도 기꺼이 진흙목욕을 한다. 연구진은 돼지의 진흙목욕 같은 복잡한 행동을 과학자들이 충분히 이해했다고 속단하는 것을 경계한다. 진흙목욕을 대신할 냉방시설과 해충 제거 처방을 ‘해결책’으로 내놓는 것은 과거 영양식을 공급함으로써 동물들의 먹이를 찾는 행동을 대신할 수 있다고 믿었던 잘못을 되풀이하는 것이라는 문제의식이다. 그런 잘못된 판단의 결과 닭이 동료의 꽁무니를 심하게 쪼거나 돼지가 다른 돼지의 꼬리를 물어뜯는 등 심각한 문제가 벌어졌다.
이 연구는 무엇보다 진흙목욕이 돼지이기 때문에 그저 좋아서 하는 행동일 수 있다는 점에 주목한다. 닭이 땅을 헤집으며 모이를 찾고 모래로 목욕하는 것은 가장 닭다운 행동인 것처럼, 진흙목욕은 가장 돼지다운 행동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행동은 적극적 동물복지의 대상이 된다. 연구진은 사람이 수영하고 목욕하는 행동을 동물학자가 분석한다면 돼지의 진흙목욕과 비슷한 결과가 나올 거라고 본다. 수영이 몸을 깨끗이 하는 효과가 있고 더운 날일수록 자주 한다는 등의 분석결과가 나오겠지만, 실제로 수영의 가장 큰 동기는 즐거움일 것이다.
“행복한 돼지는 더럽다”는 말이 있다. 그 말처럼 진흙목욕은 돼지의 괜찮은 삶에 중요한 요인일지 모른다. 실제로 일부 축산 선진국에선 돼지의 진흙목욕을 동물복지의 하나로 적극 도입하고 있다. 세계 돼지고기 수출량의 약 20퍼센트를 차지하는 세계적 돼지고기 생산국 덴마크는 2000년부터 돈사를 설계할 때 체온조절을 위해 샤워시설이나 진흙 수렁을 마련해야 하며, 돼지가 가지고 놀 수 있도록 짚, 건초, 나무 조각 등을 제공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덴마크는 이에 앞서 1998년에도 항생제 사용을 금지하고 돼지 사육농가에서 돼지분뇨의 4분의 3을 반드시 거름으로 사용하도록 하는 등 유럽연합보다도 강력한 환경규제와 동물복지 제도를 도입했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내가 먹는 돼지는 행복한 돼지인가’ 하고 묻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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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 M. B. M. Bracke & H. A. M. Spoolder, “Review of wallowing in pigs: Implications for animal welfare”, Animal Welfare, vol. 20(2011). pp. 347~363.
글
출처
동물행동, 생태학부터 진화론, 동물복지, 자연사까지 기초자연과학과 첨단응용과학을 넘나들며 펼치는 흥미롭고 감동적인 생명들의 이야기. 살아 있는 그 모든 것들이 펼쳐내는..펼쳐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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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행복한 돼지는 더럽다 – 자연에는 이야기가 있다, 조홍섭, 김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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