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과사전 상세 본문
야기가 있다
비둘기는 스스로 인간에게 왔다
진화론의 물길을 연 다윈의 《종의 기원》은 첫 장에서 야생동물이 아닌 애완용 비둘기를 자세히 다룬다. 한 종의 비둘기에서 수많은 비둘기 품종이 나온 데서 생물종도 변할 수 있다는 확신을 얻었기 때문이다. 다윈은 애완용 비둘기를 직접 기르는 애호가였지만, 당시 비둘기의 주 용도는 식용이었다. 특히 근육이 미처 발달하지 않은 한 달 이내의 어린 비둘기 고기가 인기였다. 기원전 3000년부터 시작된 이런 취향이 아직도 살아 있음은 이탈리아와 프랑스의 고급 음식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비둘기 고기의 최대 수요처는 각국의 차이나타운이다.
비둘기는 역사적으로 쓸모가 많았다. 배설물은 비료와 가죽 무두질에 또는 화약 원료로 요긴하게 쓰였는데, 정부가 주기적으로 수거해 가기도 했다. 건물에 원통형 비둘기장을 설치하는 것은 유럽 상류층의 상징으로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위험이 닥쳐도 숨지 않고 비행술로 회피하는 비둘기의 특성을 살려 살아 있는 사격 표적으로 기르기도 했다. 강한 귀소본능과 빠른 비행능력은 비둘기를 유력한 메신저로 만들었다. 이집트에선 나일 강 상류의 범람을 하류로 알리느라 비둘기를 날렸고, 제1 · 2차 세계대전 때는 전령 비둘기들이 이름과 군번까지 부여받아 맹활약을 했다. 2차 대전 때 미군 비둘기부대에서는 5만 4,000마리의 비둘기가 150명의 군인과 함께 복무했다.
그렇다면 비둘기의 가축화는 인간에게 이용만 당하는 기구한 운명의 시작이었을까. 전문가들은 그렇지 않다고 본다. 비둘기는 인간이 만든 환경변화에 적응해 놀라운 성공을 거둔 동물이라는 것이다. 극지방을 빼고 세계 어디에나 있는 집비둘기의 학명은 ‘콜룸바 리비아(Columba livia)’, 곧 ‘납빛 비둘기’라는 뜻이다. 목에 금속광택이 있는 이 비둘기의 원종은 지중해와 유럽 일부에 살던 바위비둘기로서 많지 않은 야생종이 아직 남아 있다.
현재 전 세계에 퍼져 있는 비둘기는 가축화한 바위비둘기가 다시 야생화해 도시에 사는 것이다. 건조하고 나무가 없는 절벽에 살던 바위비둘기는 아침이면 농경지로 날아가 곡식을 먹고 저녁에 집으로 돌아오는, 출퇴근이 엄격한 새였다. 도시가 발달하고 환경이 바뀌면서 바위비둘기는 절벽 대신 건물을 선택하게 됐다. 사람에게 적응만 한다면, 나무 없는 절벽이나 도심의 건물이나 다를 것도 없다. 도시에선 쉽사리 먹이를 찾을 수 있을뿐더러 천적인 매도 없다. 번식을 하고 잠을 잘 피난처가 건물 구석구석에 있다.
《비둘기가 어떻게 맨해튼과 세계를 점령했나(Superdove: How the pigeon took Manhattan··· and the world)》라는 책을 낸 과학저술가 커트니 험프리스(Courtney Humphries)는 “인간에 의한 비둘기의 가축화는 일방적 관계가 아닌 공진화의 과정”이라고 주장했다. “비둘기는 자발적으로 인간에게 접근했다”는 것이다. 문제는 20세기 중반 도시가 팽창하고 그에 따라 비둘기 개체도 폭증하면서 불거졌다. 배설물로 건물이 더러워지고 병균을 옮긴다는 불평이 터져나왔다. 그렇지만 비둘기는 귀찮다고 쉽게 차버릴 대상은 아니다. 비둘기는 인간이 바꿔놓은 자연에 가장 잘 적응한 야생동물이다. 5,000년 동안 함께 살아온 이들과 친구로 지내지 못하면서 어떤 야생동물과 함께 살 수 있을까.
선진국의 많은 도시가 ‘비둘기와의 전쟁’을 벌여왔다. 가장 널리 쓰인 방법은 비둘기를 잡아 죽이는 것이었다. 총, 독극물, 마취약, 덫 등이 동원됐지만 효과가 없었다. 비둘기들은 몇 주 만에 원상을 회복했고, 오히려 더 늘어나기도 했다. 비둘기의 90퍼센트는 태어난 첫 해를 넘기지 못한다. 사인은 주로 먹이 부족이다. 그러나 성체의 사망률은 11퍼센트에 지나지 않을 정도로 낮다. 따라서 먹이는 그대로 둔 채 비둘기를 잡아 죽인다면, 어린 새들이 죽은 어른 새의 빈자리를 신속하게 채운다. 비둘기를 젊은 집단으로 만드는 효과밖에 없는 셈이다. 영국 왕립조류보호협회(RSPB)가 대안을 제시했다. 비둘기가 깃드는 곳에 철조망 등 장애물을 설치하는 것이다. 먹이에 피임약을 섞는 방법, 천적인 매를 풀어놓는 방법도 있다. 그러나 근본적인 해결책은 되지 못한다.
이 협회가 제시하는 장기적인 최선의 대책은 교육이다. 비둘기에게 먹이를 주는 것이 결코 비둘기를 위하는 길이 아니라는 사실을 널리 알려야 한다는 것이다. 스위스 바젤 시는 비둘기 수 조절의 세계적 사례이다. 배설물 공해에 시달리던 바젤 시는 1961년부터 25년 동안 10만 마리의 비둘기를 잡아 죽였지만 여전히 2만 마리가 시가지를 활보했다. 5년간의 조사연구 끝에 얻은 결론은 먹이만이 비둘기 집단을 조절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우연히 빵조각을 던져주는 행위는 별 영향을 미치지 않았다. 정기적으로, 아프면 다른 이들에 부탁해서라도 먹이를 주는 ‘비둘기엄마’가 비둘기 집단을 키우는 핵심원인으로 밝혀졌다. 바젤 시는 이 비둘기엄마들에게 먹이 주기가 과밀화를 불러 결국 비둘기를 비참하게 만든다고 설득했다. 지속적인 교육과 홍보 결과 바젤 시는 4년 만에 2만 4,000마리의 비둘기를 8,000마리로 줄일 수 있었다.
국내에서도 비둘기 과밀화는 심각한 문제다. 환경부는 2009년 집비둘기를 ‘유해야생동물’로 지정했다. 유해야생동물이란 농작물이나 양식장, 항공기, 전력선 등에 피해를 주므로 합법적으로 죽일 수 있는 동물이다. 조류로는 꿩, 오리류, 참새, 까치, 갈매기, 기러기류, 백로류가, 포유류로는 멧돼지, 고라니, 청설모가 해당한다. 유해야생동물로 지정되면 지자체가 포획해 제거할 수 있다. 다행히 집비둘기를 대규모로 쏘아 잡는 일은 벌어지고 있지 않다. 공원 등에서 비둘기 먹이를 판매하지 못하게 하고 ‘먹이 주기는 비둘기를 학대하는 일’이라고 계도하는 것만으로도 상당한 효과가 나타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지자체는 이밖에 낙곡과 음식쓰레기의 신속한 제거, 알과 둥지의 제거, 비둘기의 접근을 막는 그물이나 기피제 살포 등의 대책을 쓰고 있는데, 포획은 부득이한 경우 최소한으로 하도록 돼 있다.
선진국의 경험은 비둘기 문제는 결코 기술적 대책으로 해결되지 않음을 보여준다. 무엇보다 비둘기를 더불어 살아야 할 상대로 여기지 않는 한 비둘기 문제는 근본적으로 해결되지 못한다.
본 콘텐츠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
위 내용에 대한 저작권 및 법적 책임은 자료제공처 또는 저자에게 있으며, Kakao의 입장과는 다를 수 있습니다.
참고문헌
・ Courtney Humphries, Superdove: How the pigeon took Manhattand··· and the world, Smithsonian Books(2008).
글
출처
동물행동, 생태학부터 진화론, 동물복지, 자연사까지 기초자연과학과 첨단응용과학을 넘나들며 펼치는 흥미롭고 감동적인 생명들의 이야기. 살아 있는 그 모든 것들이 펼쳐내는..펼쳐보기
전체목차
백과사전 본문 인쇄하기 레이어
[Daum백과] 비둘기는 스스로 인간에게 왔다 – 자연에는 이야기가 있다, 조홍섭, 김영사
본 콘텐츠의 저작권은 저자 또는 제공처에 있으며, 이를 무단으로 이용하는 경우 저작권법에 따라 법적 책임을 질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