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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쿨하다’는 영어식 표현이 유행하고 있다. 긍정적인 뜻으로 사용되는 말이므로 멋지거나 좋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될 것이다. 어떤 것이 멋있고 좋은 것인지에 대해서는 사람이나 시대마다 다를 수 있다. ‘쿨하다’는 말이 좋은 뜻으로 쓰일 수 있음은 그 말이 지금 우리 시대의 정신과 상응하는 것이기 때문일 터인데, 성향이나 행동이 기본적으로 시원시원하다는 것, 구차하지 않고, 청량하고, 매인 데 없이 산뜻하고, 뒤끝 없고, 이지적이고 등등으로 번역될 수 있다. 물론 이것은 좋은 측면에서만 바라본 말이다. 당연한 말이지만 쿨한 것과 반대되는 좋은 성향도 있을 수 있다.
집요하고 진국스럽고 도탑고 온후하고 원칙에 관한 한 비타협적이고 열정적이고 등등이 그런 것이다. 이런 거울에 비춰보면 타락한 쿨함도 가능하다. 끈기 없음 경박함 무책임함 등이다. 하지만 좋고 나쁘고를 떠나서 쿨함과 그렇지 않음은 대개, 도시적임과 그렇지 않음으로 구분될 수 있어 보인다. 개인적인 취향이나 호불호와 무관하게 현재 우리가 비도시적인 것보다는 도시적인 것이 좀더 세련되고 고급스러운 것으로 간주되는 시대에 살고 있음은 부정하기 어렵다. 냉소주의는 그런 시대의 정서적 축에 해당된다.
냉소주의는 시니시즘(cynicism)의 번역어이다. 이 영어 단어는 그리스의 키니코스 학파(Cynic)로부터 유래했다. 키니코스(Kynicos)라는 그리스 말은 ‘개 같다’는 뜻이어서 일찍이 키니코스 학파는 견유(犬儒)학파라는 말로 번역되기도 했다. ‘개 같은 학자님들’이라는 뜻이다. 무엇을 어쨌기에 ‘개 같다’는 소리를 들었는가. 철학사가들에 따르면, 견유학파라 불리는 사람들의 시조는 안티스테네스로서 그와 그의 무리들은 진리에 대해 비타협적이었던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을 이어받고자 했다. 이들은 어떤 외물에도 얽매이지 않고 스스로의 독립성과 자족성을 유지하는 것을 최고의 덕성으로 삼았으며, 금욕적이고 견인주의적 실천을 통해 이런 목표에 도달하고자 했다.
견유학파를 정작 유명하게 만든 사람은, 몇몇의 유명한 일화로 잘 알려져 있는 철학자 디오게네스이다. 신은 아무것도 필요로 하지 않으며 사람이 신의 상태에 가까이 가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필요물로 살아야 한다는 신조를 지니고 있었고, 나무통 속에서 단벌옷으로 살며 무소유를 실천하고자 했던 철학자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디오게네스를 찾아와 소원을 말하라고 했을 때 ‘비켜서시라 왕이여, 나는 왕이 가리고 있는 햇살이 필요하다’고 했던 일화가 전설처럼 전해진다. 여기에서 대단한 것은 왕의 호의를 물리친 행동 자체라기보다 천하의 알렉산더로 하여금 거기까지 찾아오게 한 그의 공력일 것이다.
또 그가 대낮에 등불을 켜고 아테네 시내를 돌아다녔다는 일화도 잘 알려져 있다. 무얼 하고 있었는가. 사람을 찾고 있다는 것이 그 대답이었다. 왕을 무시했던 첫번째 일화는 권력에 대한 반응이기에 누구에게든 유쾌하게 다가올 것이다. 여기에는 알렉산더 자신도 포함된다. 하지만 두번째 일화는 조금 다르다. 아테네에 사람다운 사람이 없다는 말은 그를 제외한 거의 모든 사람에게 해당되며, 이 점에 관한 한 현재의 우리 자신도 예외일 수 없다. 그것은 생각 있는 사람에게라면 매우 공격적으로 다가오는 것일 수밖에 없다.
디오게네스의 가르침은 이처럼 문명적인 것 전체에 대한 거부감에 입각해 있다. 신의 상태에 도달하기 위해 필요한 무소유는 단지 물건에만 해당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문화적인 것이라고 부르는 제도와 관습, 덕성 등에도 해당된다. 디오게네스는 배설뿐 아니라 자위행위까지도 중인환시리의 광장에서 공개적으로 행했다. 이런 행동에 포함되어 있는 공격성의 강렬함은 그가 살았던 시대가 지니고 있었던 문화적 허위의식의 강도를 반영하고 있다. 난숙한 시기의 문화가 지닐 수밖에 없는 실정적 위선과 제도화된 가식을 그는 조롱했던 것이며, 견유학파의 가르침 속에 살아 있는 그런 조롱과 야유의 힘을 우리는 냉소주의라 부르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왜 냉소주의를 문제삼는가. 진정성이 없는 것에 대한 비판정신이라면 환영할 일이 아닌가. 문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의 냉소의 공격성이 두 가지 상반된 방향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나는 자본주의 자체가 지니고 있는 공격성으로서의 냉소가 있고, 다른 하나는 그것에 맞서는 힘으로서의 냉소가 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당연히 우리 시대의 정신적 핵자로서의 첫번째 냉소주의, 괴물 같은 마음이다.
자본주의 자체의 냉소주의는 돈 되는 것은 무엇이든 하겠다는 자본가의 마음과, 돈과 무관하게 품위에 목숨거는 귀족주의를 대립시키면 선명하게 드러난다. 전통사회의 귀족들이 내세우는 가치에 대해 근대의 자본가들은 화폐의 양을 맞세워놓는다. 그것 자체가 야유이자 조롱이다. 이를테면, 명예? 그거 얼마짜리인가, 내가 버리고자 하는 이 양심은 돈으로 환산하면 얼마인가 같은 질문들. 『안티오이디푸스』에서 들뢰즈와 가타리가 자본주의를 냉소주의의 시대로 규정했을 때 그들이 지목하고자 했던 것도, 이처럼 모든 질적 차별을 추상적인 화폐량으로 환산해버리는 자본주의적 파토스의 위력이었다. 따지고 보면 아무것도 아니면서 어떤 것도 될 수 있는 마술 같은 존재로서의 화폐가 그것의 핵심적인 표상이다.
하지만 문제는 화폐가 지고의 것임에도 불구하고 그 자체만으로는 공공연한 명분이나 목적이 될 수 없으며, 또 축적된 화폐 속에는 감추어져야 할 태생의 한계들이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축적된 화폐의 양으로 표상되는 자본주의는 필연적으로 위선과 부끄러움을 동반한다. 야생의 세계에는 잔인성이 있고 전제군주의 세계에는 공포가 있지만, 그 세계에 부끄러움은 없다. 잔인이나 포악은 있을지언정 위선과 가식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축적된 화폐, 내력을 확인할 수 없는 무표정한 돈, 그것을 바탕으로 이루어지는 자본주의의 세계 속에는 부끄럽지 않은 것이 없다. 자본주의 자체의 냉소주의는 그런 부끄러움을 부정해버리는 뻔뻔스러움의 형식이다. 나만이 아니라 세상 모두가 썩었다는 식, 도둑 아닌 사람 있으면 나와보라는 식이다.
이에 맞서는 두번째 웃음은 자본가의 냉소에 맞서는 웃음이다. 자본가의 냉소가 말 그대로 차디찬 경멸의 웃음이라면, 이 두번째 웃음은 냉소를 뒤덮어버리는 커다란 너털웃음, 니체의 차라투스트라가 지니고 있는 홍소에 가깝다. 『냉소적 이성 비판』의 저자 슬로터다이크는 이 두번째 웃음을 이제는 일반명사가 된 냉소주의(cynicism)와 구분하여 키니시즘(Kynicism)이라 불렀다(이 책의 한국어 번역자는 이 용어를 견유주의로 옮겼다). 디오게네스의 가르침이 지니고 있던 폭로의 전략과 전복적 힘을 존중하고자 했던 까닭이다.
자본주의 자체의 냉소는 이제는 무시무시한 괴물이 되어 있다. 그것을 제어할 수 있는 힘의 가능성을 찾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중요한 일이다. 기업가나 행정가에게 중요한 것은 분명한 목표의식을 지니고 거기에 도달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이고 효과적인 수단을 찾는 것이다. 그런 목적합리적 행동들은 그 자체가 냉소주의의 표현이다. 냉소주의에 포함되어 있는 견유주의의 역사적 맥락을 강조했던 슬로터다이크의 작업은, 목적 자체에 대해 반성하지 않는 미친 합리성, 몸과 마음의 지나친 다이어트로 인해 삶의 이유도 진정한 건강성도 망각하고 상실해버린 우리 시대의 쿨한 삶에서 하나의 거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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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um백과] 냉소주의와 키니시즘 – 인문학 개념정원, 서영채,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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